257화
합격이라고 했네.
악마는 다음 학생을 상대하기 위해 손짓했다. 합격이니 빨리 비키라는 뜻이었다.
“???”
물론 그런다고 납득이 되진 않았다.
이한 뒤에 서있던 학생들도 당황했는지 소곤댔다.
“방금 대화의 어떤 점이 합격이었던 거지?”
“아! 예의바르게 인사한 점 아닐까?”
뒤의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들은 이한은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노리고 한 건 아니었지만,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말을 꺼낸 것이 악마에게 호감을 산 것이다.
“과연... 배웠습니다. 공손하게 인사한 것 덕분이라니.”
이한은 언제나 공손하게 아부하는 습관이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아부해서 손해 볼 건 정말...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아닙니까?”
자네 마력은 거래조건으로 타당해서 합격을 한 걸세.
“잠깐!”
로지네 교수는 듣다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리고 악마를 끌고 옆으로 이동했다.
“오리퓰라스 씨. 이러시면 안 되죠. 성실하게 일하셔야 합니다.”
성실하게 하고 있지 않나...
“방금 대충 했잖습니까.”
로지네 교수는 엄격한 관리의 모습으로 돌아와 딱딱거렸다.
강력한 악마지만 계약에 묶여 있는 오리퓰라스는 억울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내가 들은 말은 분명 학생들이 타당한 계약 조건을 갖고 오면 합격시키라는 소리였네.
마법사에게 화술과 언변은 생각보다 많이 중요했다.
마법사로서 살다보면 자기보다 강한 존재를 만날 때도 많았으니까.
힘에만 의존하느라 지혜가 없는 마법사는 이런 경우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영리한 마법사는 자기보다 강한 존재를 만나도 그 존재를 설득해서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런 만큼 1학년 때부터 다른 차원의 존재들의 규칙을 파악하고 설득하는 요령을 익혀놓는 건 중요한 일이었는데...
‘그걸 그냥 합격시키면 안 되지!’
하지만 마력이 충분하잖나... 조건을 만족시켰는데 억지라도 부려야 한다는 건가?
“......”
이렇게 나오자 로지네 교수도 할 말이 없었다.
실전처럼 하라고 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악마처럼 마력을 주식으로 삼는 종족들에게 주기적인 마력 공급은 언제나 인기 좋은 계약 조건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주기적인 마력 공급은 일반적인 마법사들이 생각하는 규모를 훨씬 뛰어넘었다.
마법사들은 피와 살과 뼈로 된 육신을 가졌기에 마력이 없어도 살 수 있었고, 그렇기에 절대 악마 같은 종족의 끝없는 굶주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많이.
더 많이!
괜히 악마와 계약할 때 각종 사악한 제물이나 사술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악마가 원하는 만큼 마력을 채우는 게 불가능해서였다.
하지만 아주 가끔, 별다른 준비 없이도 악마가 원하는 게 마법사한테 있을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이 그랬다.
“...좋습니다. 대신 주의사항이라도 좀 강하게 말해놓도록 하십시오.”
알겠네.
오리퓰라스는 다시 이한을 불렀다.
사실, 마력만 믿고 악마들에게 섣불리 계약을 시도하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 있네.
“...그런 미친놈이 있습니까?”
이한은 의아해했다.
자세한 조사나 준비도 없이 마력 좀 넉넉하다고 악마한테 찾아가서 ‘거래합시다!’라고 말하는 마법사가 있단 말인가?
그건 마법사가 아니라 멍청이 같은데...
언제나 가끔씩 그런 놈이 나오곤 하네. 그러니 명심하게. 악마를 얕보는 건...
오리퓰라스는 이한을 앉혀놓고 ‘악마를 조심해야 할 101가지 이유’를 늘어놓았다.
이한은 자신이 뭘 잘못했나 의아해했다.
‘합격 아니었나?’
이해가 되나?
“예. 오리퓰라스 님 덕분에 확 와닿았습니다. 절대로 마력만 믿고 악마들에게 섣불리 계약을 시도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네.
“그런데 오리퓰라스 님.”
왜 그러지?
“오리퓰라스 님은 어떤 계약을 하셨길래 제국 소속으로 근무를 하시는 겁니까?”
이한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오리퓰라스가 받는 대가를 알아놓는다면 이한도 나중에 참고할 수 있었으니까.
‘금화? 보석? 마법? 제물?’
난... 속아서 계약한 걸세.
“......”
답을 기대하던 이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니 자네도 계약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걸세. 알겠나? 계약이 이렇게 위험하지.
“아... 예.”
이한은 경악했다.
악마를 속여서 강제근무시킨다니...
제국 관리들도 에인로가드 못지않았던 것이다.
* * *
목요일.
이한은 하품을 하며 복도를 걸어 나갔다. 아침인데도 잠이 부족해 덜 깬 기분이었다.
흐음!
“......”
멀리서 해골 교장의 둥그스름한 흰색 머리뼈를 목격한 이한은 잠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놀랍군. 정신이 놀라울 정도로 맑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안녕... 잠깐.
이한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당장 내일 모레 첨탑 마구간으로 학교 밖을 나갈 생각인 만큼, 해골 교장을 만났을 때 찔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해골 교장이 제국에서 손꼽히는 교육 전문가라면 이한은 그에 못잖은 제자 전문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이한은 되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어제 이 주변에서 뭔가 본 적 있느냐?
“없습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지금 해골 교장과 데스 나이트가 서있는 곳에서는 딱히 뭔가 본 적이 없었으니까.
‘무슨 일이지?’
그러게 쓸데없는 소리 좀 줄이고 보초나 제대로 서란 말이다.
-죽여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주인님의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자꾸 실수 하나 하고서 죽여 달라고 하지도 말고. 대체 네놈은 언제쯤 되어야 그 옛날 습관을 버릴 수 있겠나? 요즘 기사들은 실수 하나 했다고 죽지 않는단 말이다.
해골 교장은 데스 나이트들을 타박했다.
얼마 전에 건방지게 학교에 들어온 침입자.
해골 교장은 그 침입자의 발을 묶어버리기 위해 학교 전체에 언데드들을 세워버리는 기행으로 대응했다.
그런 다음 본관 건물을 하나씩 샅샅이 뒤져가며 침입자 놈을 찾고 있는 중이었는데...
간밤에 이 주변의 결계가 파손된 걸 지금 발견한 것이다.
물론 우연의 일치일수도 있었다. 마법학교의 본관 건물은 워낙 오래된 데다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마법들이 엮여있어서 이계(異界) 못지않게 마력의 변덕이 심했으니까.
흐름 변화로 결계가 파손된 걸 수도 있었지만, 해골 교장은 절대로 방심하지 않았다.
여기 배치를 늘리도록. 이 주변부터 뒤져라. 침입자 놈이 나오면 살점을 씹어버리고. 알겠나?
-명을 따르겠습니다!
“침입자가 아직 안 잡혔습니까?”
곧 잡을 거다. 아니면 이미 죽어있을 수도 있고.
해골 교장은 툴툴대며 대답했다.
혹시라도 오해할까봐 하는 말인데, 탐사나 경계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저 파손된 결계도 아주 사소한 일부일 뿐.
‘음. 교수님들은 왜 다 실수했을 때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건지 모르겠군.’
물론 이한은 괜히 해골 교장의 성질을 건드리는 일은 피할 생각이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주말에 나가는 일이 꼬일 수도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침입자 놈은...
“대마법사입니까?”
데스 나이트들의 눈을 피하고 다른 결계들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유물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 원래 도둑놈들이 그런 걸 제법 갖고 다니니까.
해골 교장이 보기에, 만약 이 주변의 결계가 파손된 게 침입자가 한 짓이라면 침입자는 상당히 강력한 은신 유물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은신 유물의 힘을 빌리더라도 데스 나이트들과 마법 결계들을 모두 피할 수는 없을 테니 실수로 이 구석의 결계를 부순 것일 테고.
참. 어리석은 놈이지 않나? 스스로 나오면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줄 텐데.
‘나였어도 못 나올 것 같은데...’
해골 교장의 말을 듣고 있던 이한은 별 생각 없이 물었다.
“데스 나이트들의 숫자를 더 늘려보는 건 어떻습니까?”
숫자를 늘려봤자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군.
해골 교장은 숫자를 늘리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지금도 본관 곳곳에 데스 나이트들이 배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걸리지 않고 이동했다는 건 데스 나이트의 시선을 피할 방법이 있다는 뜻.
“데스 나이트들은 은신 마법을 못 꿰뚫어봅니까?”
어느 정도는 꿰뚫어 볼 수 있지만 강력한 유물이라면 데스 나이트도... 하지만 그걸 대비해서 각종 결계를 쳐놨는데.
뛰어난 마법사들은 강력한 언데드 몬스터의 시선을 막아내는 은신 마법을 쓸 수 있었다.
당연히 해골 교장도 그걸 알았기에, 곳곳에 그런 은신 마법들을 약화시키는 결계들을 덕지덕지 깔아놓은 상태였다.
결계들이 멀쩡한 이상 그런 종류의 마법은...
아니군.
해골 교장은 이한과 대화하다가 문득 깨닫고 말했다.
강력한 유물이라면 주변의 결계까지도 잠시 정지시킬수도 있겠어. 아마 그랬겠군.
곳곳에 배치된 결계들이 잠시 정지되면 데스 나이트들의 시선을 피해서 돌아다닐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해골 교장은 끌끌 혀를 찼다. 이한은 그래도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다.
“허점을 발견했다면 대비가 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
해골 교장은 이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한은 어쩐지 불길해져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가장 쉬운 대비 방법 중 하나가, 뛰어난 마법사가 이 결계석을 들고 있는 거다.
어떤 유물인진 몰라도 결계를 정지시키는 원리는 단순했다.
결계가 담겨 있는 결계석을 힘으로 뒤흔들어서 잠시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계석을 뛰어난 마법사가 들고서 방어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아니, 저 방어 마법 모릅니다.”
방어 마법을 쓰라는 게 아니라 네 무식한 마력을 쓰란 거지.
마력의 양이 많아지면 그 자체로 다른 마법에 저항하는 힘이 되기 마련.
이한은 그냥 결계석만 들고 있어도 외부에서 날아오는 힘을 막아낼 가능성이 높았다.
“...교장 선생님께서 하시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나도 할 거다. 지금 수색하고 있었던 게 안 보였나? 번갈아가면서 하자는 거지.
“저 기말고사 과제중인데요.”
그러니까 하루에 두 시간 정도만 쓰란 거지. 여기 데스 나이트들하고 같이 수색 좀 해라.
“......”
지나가다가 갑자기 데스 나이트들 데리고 수색에 참여하게 된 이한은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아니...
해골 교장이 달래듯이 말했다.
서로 힘을 합쳐야 빨리 끝나지 않겠느냐?
“교장 선생님. 저 1학년...”
에인로가드가 위기에 빠졌을 때는 학생, 교수 가리지 않고 서로 힘을 합쳐야 하는 법이다.
“딱히 위기 아닌 것 같...”
고맙다. 만약 성과를 내면 내가 꼭 포상해주마.
“지금 두 시간이 아까우셔서 이러시는...”
자. 죽음의 기사들아. 여기 이 총명한 제자 녀석과 같이 수색을 진행할 준비가 되었는가?
-맡겨만 주십시오! 반드시 설욕하여 명예를 되찾겠습니다!
‘정말 죽이고 싶군.’
* * *
이한은 결계가 새겨진 돌들을 한아름 들고 데스 나이트들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돌들은 제각각 크기가 들쭉날쭉하고 모양새도 별로 볼품이 있지는 않았지만, 이한은 이 돌에 걸린 마법이 얼마나 고난이도의 마법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구조가 아예 짐작이 가지 않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침입자의 은신 마법을 약화시키는 마법이라더니 역시...
-정말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영광이야. 워다나즈 군.
-우리 기사들 사이에서 자네의 소문이 꽤 자자하지.
“아. 네. 감사합니다.”
데스 나이트들은 언데드치고 매우 사교적인 이들이었다.
이한은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그럼 여기 문부터 하나씩 열어보면 될까요?”
-그러도록 하지! 뒤로 물러서있게.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아참. 제가 의심가는 곳들은 다 확인해봐도 되는 겁니까?”
-물론이지!
데스 나이트들은 이한의 흑심을 눈치 채지 못하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침입자를 찾을 수 있다면 다른 층을 뒤지는 게 뭐 그리 어렵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