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학교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258화 (258/687)

258화

‘생각보다 순찰 도는 게 나쁘지 않군.’

처음에는 1학년 학생이 마법학교의 순찰을 돌아야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주머니가 묵직해지자 생각이 좀 달라졌다.

이한은 식료품 창고로 쓰는 방 2개와 시약 창고로 쓰는 방 1개를 순찰하며 교묘한 손동작으로 쓸만한 물건들을 슬쩍했다.

랫포드가 봤다면 눈물을 흘리며 감탄했을 모습이었다.

-잠깐.

“!”

이한은 긴장했다.

설마 들켰나?

‘분명히 사각이었는데.’

-워다나즈 군이 배가 고플 것 같은데, 뭐라도 좀 갖고 오자구.

-아차. 그랬지. 이게 언데드가 되면 허기가 사라져서 착각한다니까.

-젊은이들은 한창 먹어야 할 때지. 돌도 씹어 먹을 나이잖나.

데스 나이트들은 식료품 창고방 구석으로 휘휘 걸어가더니 상자를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단단하고 긴 빵과 살라미 소시지, 같이 먹을 싱싱한 채소, 단단히 밀봉된 유리병 등을 갖고 왔다.

-대충 갖고 왔네. 취향에 맞을지 모르겠군.

-식사를 한지 너무 오래됐어.

“감, 감사합니다.”

이한도 데스 나이트들이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먹을 걸 한보따리 챙겨주는 모습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래도 됩니까?”

-하하하! 성실한 학생답군.

-당연히 안 되지. 그런데 뭐 어쩌겠나? 일하느라 먹는 건데.

이제는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 옛 왕국 출신의 기사들은 규칙을 어기는 것에 매우 관대했다.

배가 고프면 먹고, 목이 마르면 마셔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학교 일을 돕는데!

‘아니. 술이잖아?’

유리병의 뚜껑을 연 이한은 놀랐다.

“순찰 도는데 술 마셔도 됩니까?”

-하하하! 당연히 안 되지. 하지만 일은 우리가 하는 거니까 워다나즈 군은 목 좀 축여도 되네.

-돌아가면 또 검은 빵과 식은 주먹밥으로 배를 때워야 하잖나. 든든히 먹어두게.

‘요즘 기사들이 옛날 기사들을 본받아야하는데.’

이한은 데스 나이트들이 보여주는 자비와 의기에 감동했다.

흰 호랑이 탑 놈들은 이런 거나 보고 배울 것이지...

이한이 와구와구 식사를 하는 동안 데스 나이트들은 옆에서 말했다.

-원래 미로로 도망친 쥐새끼 한 마리를 찾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일이지. 워다나즈 군은 어리고 야망이 넘치니 직접 찾고 싶어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만, 너무 무리하진 말게.

-맞아. 주인님께서 제시한 시간만 성실히 채우고 자기 할 일을 하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잠깐. 저 야망 없습니다만?”

주머니칼로 빵과 소시지를 자르던 이한은 멈칫했다.

데스 나이트들은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래 진정한 야심가들은 야망이 없다고 말하곤 하지.

-야망이 있다고 말하는 놈들 중에 진짜 제대로 된 야심가가 없는 법이거든.

“아니...”

이한은 데스 나이트들의 말이 논리적으로 잘못되어있다고 지적하고 싶었지만, 데스 나이트들은 이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원래 나이가 들면 어린 사람의 말은 잘 듣지 않게 되는 법.

‘에인로가드에는 헛소문 퍼뜨리는 놈을 징벌방에 보내는 규칙이 필요해.’

이한은 포기하고 식사를 마저 끝냈다.

‘확실히 순찰이 생각보다 나쁘진 않은데.’

해골 교장을 공격하고 싶었던 처음과 달리 여러모로 쏠쏠한 이득들이 있었다.

데스 나이트들과 친해질 수 있었고, 그 사이에 몇몇 창고에서 아이템들을 빌릴 수도 있었으며, 평소 궁금했던 곳들도 확인 가능했으니...

데스 나이트들은 이한이 창고에서 뭘 빌려가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젊은데 도둑질 좀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깃펜으로 지도를 그려가던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려면...

“좋습니다. 이번에는 아래층으로 한 번 가보시죠.”

-어디든 따라가지!

*         *         *

이칼도렌 공작의 심복, 지더프는 차오르는 공포를 견뎌내기 위해 애써야했다.

사실 어느 누구라도 똑같았을 것이다.

경계 태세가 올라간 에인로가드의 한복판에 자기 혼자 숨어 있는데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냉정하고 침착하기로 소문난 지더프였지만 점점 그 이성도 닳아가고 있었다.

‘<단풍나무의 뱀> 놈들을 믿은 게 실수였다. 그래. 그 놈들을 믿은 게 실수였어.’

금화만 주면 무엇이든지 하는, 마법사를 상대할 줄 아는 노련한 모험가들.

그 정도라면 충분히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 줄 알았다.

심지어 지더프가 많은 걸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들어와서 조용히 힘을 합쳐 조용히 훔치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이 정신 나간 모험가 놈들이 죽을 거면 곱게 죽지 무슨 짓을 했는지 경계 태세를 올려버린 것이다.

밤마다 사악하고 위대한 대마법사 고나달테스가 ‘넌 나와도 죽고 나오지 않아도 죽는다’고 경고하며 돌아다니는 모습에 지더프는 신경줄이 메마를 지경이었다.

달칵-

지더프는 청동 펜던트의 뚜껑을 열었다.

‘3번 남았다.’

아주 강력한 아티팩트로, 이제까지 지더프의 생명을 지켜준 구명줄 중 하나였다.

한 번 작동시키면 주변의 마법들을 교묘하게 마비시키는 강력한 아티팩트!

온갖 마법 결계와 순찰자들이 돌아다니는 마법학교였다. 대마법사도 실수 한 번에 들킬 수 있었다.

은신 마법에 제법 능숙한 지더프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 아티팩트가 없었다면 진작 발각됐을 것이다.

사용 횟수가 고정되어 있다는 게 아쉬웠지만...

‘슬슬 준비해야겠군.’

지더프는 다른 아티팩트를 꺼냈다.

작은 석상 형태의 아티팩트였다.

“위대한 마법사 골티네우스시여, 존경심을 바치오니 저를 바꿔주시옵소서!”

말이 끝나자 지더프의 몸이 감쪽같이 석상으로 변해버렸다.

고위 변화 마법사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강력한 마법.

이 아티팩트가 지더프의 다른 구명줄 중 하나였다.

청동 펜던트와 같이 며칠마다 한 번씩 위치를 옮겨가며 석상으로 위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경계가 풀릴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

벌컥!

“그러니까 1층 정문 계단 뒤쪽에 샛길이 있었단 말입니까?”

-그런 셈이지. 참. 주인님에게는 말하지 말아주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데스 나이트 한 무리가 들어오자 지더프는 심장이 얼어붙을 정도로 놀랐다.

석상으로 몸이 변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분명 ‘헉’하고 신음소리를 냈을 것이다.

고나달테스의 하수인인 저 데스 나이트들은 한 명 한 명이 살벌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건드리는 순간 주변의 모든 적들을 불러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더프는 그저 저 데스 나이트들이 빨리 꺼져주기만을 빌었다.

“이 방은 무슨 방입니까?”

-글쎄... 사실 마법학교의 방들은 눈만 감았다 뜨면 새로 생기고 바뀌는 방들이 여럿이라. 물론 나는 눈을 감지 못하지만!

-으핫핫핫핫핫!

-크핫핫핫핫핫!

“...우하하하하하하하!”

이한은 늦지 않게 웃어주었다.

별다른 즐거움이 없는 언데드들답게 데스 나이트들은 농담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다행히 이한은 교수들이 무슨 개소리를 하더라도 웃을 수 있는 비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창고 방인가?

-예술품들을 보관하는 곳 같군. 그림들하고 조각상들.

‘저런.’

이한은 아쉬워했다.

비밀통로도, 샛길도, 식료품도, 시약도 없다면 그 방은 그냥 쓰레기 방 아니겠는가.

-너무 아쉬워하지 말게. 워다나즈 군.

데스 나이트 중 한 명이 이한의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조언을 던졌다.

-이런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을 것 같은 방도 의외로 쓸모가 있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뭘 보관하기 좋거든.

“!”

이한은 데스 나이트의 말에 솔깃했다.

‘확실히 요즘 공간이 좀 필요하긴 하지.’

처음에 탑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공간이 부족할 거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개인실은 물론이고 휴게실까지 넉넉하기 그지없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점점 물건이 늘어났다.

밖에서 사온 식료품들부터 시작해서 과제를 위해 쌓아놓고 있는 각종 시약들과 재료들, 서적들과 종이뭉치들...

요즘 이한은 선배들이 왜 몰래 훔친 재료들을 산맥 한복판의 비밀창고에 숨기는지 알 것 같았다.

탑 안에는 공간도 없고, 그렇다고 주변에 대충 놓으면 다른 탑 학생들이 훔쳐갈 수도 있으니(심지어 자기 탑 학생들도).

훌륭한 마법학교 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창고 서너개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쯤되면 도토리 숨기는 다람쥐인지 마법사인지 모르겠군.’

“확실히 안에 나무 상자 몇 개 던져 놓으면 아무도 안 건드리겠군요.”

-그렇지. 시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옛 격언도 있지 않나?

“?”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격언 아니었나?’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데스 나이트들을 배려해서 지적하진 않았다.

옛날에는 뭐 그랬을지도...

-워다나즈 군. 비밀창고로 쓰려는 건가?

“예.”

다른 데스 나이트가 끼어들었다.

-다 좋은데 이 방은 너무 잡동사니가 많아. 절반 정도는 덜어내는 걸 추천하지. 어차피 입구에 가벼운 놈들만 쌓아놔도 학생들은 안 들어오거든.

“과연...”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피가 커다란 놈들은 치우는 게 확실히 보기 좋을 것 같았다.

“조각상들이나 석상을 밖으로 빼도 될까요?”

-워다나즈 군. 언제나 말하는 거지만, 세상에 안 되는 건 없다네. 그냥 하면 되는 거야.

-본관 정문 주변에 조각상들 있잖나. 거기 두자고.

“어... 그래도 됩니까?”

-워다나즈 군. 언제나 말하는 거지만...

“알겠습니다. 치워보도록 하죠.”

이한과 데스 나이트들은 조각상들을 하나씩 들고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한 일행은 알지 못했다.

조각상 중 하나가 사색이 되어서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것을!

‘안... 안 돼!’

지더프는 심장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탈출을 위해서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변신을 풀고 아티팩트를 쓸 준비를 할 과정이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본관 정문 앞이라니.

마법학교의 모든 존재들이 눈을 뜨고 지켜보는 곳 아닌가.

변신을 풀어버리는 순간 1초도 되지 않아 즉사할 것이다.

‘안 돼! 안 된다고! 안 된단 말이다!’

지더프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데스 나이트 사이에 있는 소년이 누군지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1학년 같은데 대체 왜 데스 나이트들과 함께 돌아다니고 있단 말인가.

너무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많아서 이 모든 게 고나달테스의 농락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지더프의 정체는 이미 다 들킨 상태고, 악랄한 고나달테스가 지더프를 조롱하기 위해 이러는 게 아닐까?

“그런데 이런 조각상들은 어디에 쓰는 겁니까?”

-학생들이 취미로 제작도 하고, 강의도 있을 걸? 나중에 마법할 때 필요하면 가져다 쓰기도 하고 그러지.

-조각상 제작 클럽도 있을 텐데. 워다나즈 군은 아직 1학년이라서 클럽에는 못 들어갔겠군.

“......”

이한은 클럽에 가입하더라도 절대 조각상 제작 클럽 같은 곳에는 가입하고 싶지 않았다.

*         *         *

“오늘 감사했습니다.”

-뭘. 워다나즈 군이 일을 참 잘해서 우리가 더 좋았지.

-다음에 또 만나고, 들어가서 공부 열심히 하게!

이한은 데스 나이트들을 배웅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 있어서 마음은 무거웠지만 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그나저나 침입자 놈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였지만, 이한은 상대가 참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적진 한복판에서 이렇게 끈질기게 버티다니.

대체 뭐하는 사람이길래?

‘마주치지 않길 빌어야지.’

이한은 혹시라도 돌아다니다가 마주치지 않길 빌었다.

그 정도 되는 침입자라면 분명 강력한 상대일 테니까.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