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
아침.
강의실에 들어선 이한은 깜짝 놀라서 넘어질 뻔했다.
아니, 실제로 놀란 탓에 의자를 쳐서 넘어뜨렸다.
쿠당탕!
-무슨 일 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하게.
데스 나이트들은 다시 복도로 나갔다.
이한은 침착을 되찾고 강의실 칠판의 글씨를 다시 읽어보았다.
교수 사정으로 휴강
-볼라디 배그렉
‘교수님...’
이한은 볼라디 교수의 배려에 깊이 감동했다.
학생들이 다른 강의 과제와 시험으로 바쁠 때 휴강을 해주는 교수님만큼 선량한 사람도 없었다.
볼라디 교수가 이런 배려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물론 이걸 강의실 칠판이 아니라 그냥 따로 말해줬으면 참 좋았을 테지만...
‘이 정도만 해도 어디냐.’
이한은 양심이 있었다. 너무 많은 행운까지 바라진 않았다.
이렇게 공짜 시간을 얻다니.
-왜 다시 나오지?
“교수님께서 사정이 있으셔서 휴강이라고 하시는군요. 혹시 배그렉 교수님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이한은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볼라디 교수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사람은 아니었지만, 마법학교의 괴팍함은 교수한테도 예외가 아니었다.
-글쎄? 들은 게 없는데.
-조용한 거 보니 별 일 아닐 거다. 스승을 걱정하는 모습이 갸륵하구나.
“...하하. 쑥스럽습니다.”
이한은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버두스 교수의 강의도 듣고 있었나?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버두스 교수가 워다나즈 군을 찾더군.
“......”
이한은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은 아침.
버두스 교수의 추가 강의 시간까지 적어도 6시간이 남아 있었다.
“시간을 착각하신 거 아닙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내가 물어보니 강의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군.
‘강의 시작하기 전까지 탑 안에 있어야겠다.’
이한은 강의 시간 전까지 성각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 * *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버두스 교수는 이한을 보자마자 애틋하게 외쳤다.
이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분명 시간에 맞춰서 왔는데요?”
“강의 시간이 뭐가 중요해? 나 같으면 계속 여기에서 지낼 텐데!”
부여 마법이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버두스 교수는 이한을 이해하지 못했다.
버두스 교수가 이한이라면 다른 강의를 전부 다 내팽개치고 여기 성각관에서 연구만 할 텐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교수님. 여기 과제 갖고 왔습니다.”
이한은 오기 전에 마력을 불어넣은 방패를 내밀었다.
뒤늦게 강의실에 도착한 친구들은 그걸 보고 속으로 욕했다.
‘워다나즈 저 자식. 저런 걸 완성했으면 마지막에 내라고.’
‘양심이 없나!’
“오...”
학생들이 자기 눈앞에서 잠을 자든 춤을 추든 언제나 무관심했던 버두스 교수였지만, 처음으로 흥미로운 눈빛을 보여줬다.
“이게 그 무식하고 조잡한 방패란 말이지?”
“언제나 교수님의 칭찬은 절 기쁘게 하는군요.”
버두스 교수는 이한이 옆에서 툴툴대든 말든 방패를 훑어보았다.
데스 나이트들이 소문을 냈을 때부터 보고 싶었는데, 악독하고 성격 배배 꼬여서 학생들 괴롭히는 취미밖에 없는 고나달테스가 훼방을 놓은 탓에 이제야 보게 된 것이다.
“이야...”
버두스 교수는 혼자서 방패를 쓰다듬고 탕탕 두드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법진이나 구조 자체는 버두스 교수가 보기에 아직 서투르고 어설펐지만...
마력량으로 이런 단점들을 그냥 무시해버렸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버두스 교수의 머릿속에 수십 개의 아티팩트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식으로 마력을 과충전시킬 수 있다면 이제까지 미뤄뒀던 아티팩트들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너 몇 학년이었지?”
“1학년입니다.”
“아, 왜!?”
“......”
이한은 당황하지 않았다.
상대가 미친 사람이라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에 비해 이한 뒤에 있던 학생들은 공포와 경악 섞인 시선으로 버두스 교수를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학년이 낮아서... 그러면 정령검도 못 만들겠고... 렌즈 아티팩트도 아직... 직접 가르쳐주면 되려나?”
중얼거리는 버두스 교수의 모습에 이한은 불길함을 느꼈다.
“그래! 정말 하기 싫지만, 내가 직접 가르쳐주겠... 어? 어디갔어?”
“워다나즈요? 탑에 두고 온 물건 갖고 온다고 나갔는데요?”
* * *
잠시 시간을 두면 버두스 교수가 다른 학생들의 과제에 흥미가 쏠려서 잊어버릴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지만, 버두스 교수의 집중력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다른 학생들의 과제를 하나씩 채점해주다가 이한이 강의실로 돌아오자 바로 외쳤다.
“80점.”
“앗. 잘 만들었습니까?”
“응? 아니. 개같이 못 만들었네.”
“...백점 만점에 80점이면 잘 만든 편 아니에요?”
“아냐. 그냥 다른 놈들은 더 못 만들어서 그런 거지. 앗! 워다나즈!”
‘젠장.’
이한은 고개를 들었다.
“아까 들었어?”
“잘 못 들었습니다.”
“필요한 기초 부여 마법 몇 개 가르쳐줄게.”
버두스 교수는 기본적으로 학생들을 붙잡고 일대일로 뭘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목동이 양떼들을 목초지에 풀어놓고 기다리듯이, 학생들을 강의실에 풀어놓고 알아서 배울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
기본적으로 자신한테 재미없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인만큼, 학생을 붙잡고 일대일로 가르치는 건 당연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한한테 아티팩트 제작 보조에 관한 일들을 간단하게라도 시키려면, 최소한 자주 쓰이는 기초 마법(버두스 교수 기준에) 몇 개는 알아야 했다.
버두스 교수 기억에, 제자들이 한 3학년쯤 되어야 그 기초 마법들을 썼던 것 같으니 2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강의 시간에 말입니까?”
“아냐. 강의 시간에는 다른 거 배워야 해. 따로 시간을 내야지.”
“기초라고 하셨잖습니까?”
“응. 기초.”
“기초면 강의 시간에 배워도 되지 않습니까?”
“아하.”
버두스 교수는 이한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뒤늦게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기초긴 한데 원래 지금 배울 마법은 아니야.”
“......”
‘그럼 기초가 아니잖아...’
이한은 욕을 하려다가 참았다.
혹시 기초의 뜻을 모르시나?
“교수님.”
“왜?”
“죄송합니다. 제가 다른 강의도 듣고 있는 게 많아서. 여기서 시간을 더 내는 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뭐!??!?”
버두스 교수는 ‘곧 1분 후에 세상이 멸망합니다’라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놀랐다.
“왜?!??!”
‘내가 설명을 이상하게 했나?’
이한은 자신이 한 말을 다시 돌아보았다.
다른 강의들을 많이 듣고 있어서 더 이상 추가로 시간을 내기 힘들다는 말이 그렇게 어려운 말이었나?
“부여 마법이 더 재밌지 않아?!”
“글쎄요?”
“부여 마법이 더 재밌을 거야!”
“글쎄요...”
“부여 마법이 더 재밌는데...”
버두스 교수는 큰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이한이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치도 못한 표정이었다.
“워다나즈는 왜 저러는 거지?”
버두스 교수는 옆에서 재료 상자 들고 지나가던 애꿎은 더르규를 붙잡고 물었다.
“네?”
“가르쳐준다고 하는데 다른 강의 때문에 시간을 내는 게 무리라고 하잖아.”
“어... 그 말 그대로라서 아니겠습니까...?”
더르규는 대체 왜 저 말을 이해 못하나 싶었다.
“다른 강의를 빠지면 안 되나?”
“그러면 그 강의 교수님들이 싫어하시지 않겠습니까?”
“교수들이 싫어하면 안 되나?”
“...그러면 그 강의 교수님들이 이한을 습격할 수도 있잖습니까?”
상대가 자꾸 개소리를 해대자 더르규도 슬슬 개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실 개소리도 아니었다.
교장 선생님도 학생들을 습격하는데 교수들이라고 못하란 법은...
“너무하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어떻게 시간을 더 만들 수는 없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더르규는 이한에게 도와달라고 눈빛을 보냈다.
빨리 재료 갖고 가서 마법 공부해야 하는데 웬 미친 교수가 자길 붙잡고 놔주질 않고 있는 것이다.
이한은 버두스 교수에게 말했다.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교수님.”
“앗. 들을 생각이 생겼나?”
“아니... 제 뜻과는 상관없이 시간이 부족한 거잖습니까. 그러면 시간을 만들어야죠.”
“어떻게?”
“지금 재료를 모으기 위해서는 상인들한테 구해야 하잖습니까.”
부여 마법을 연습하기 위해서는 온갖 재료들이 필요했다.
그 재료들은 공짜로 나오지 않았다. 학생들이 다 스스로 노동해서 상인들에게 구해야 했다.
“그걸 교수님께서 내주시면 시간이 남겠군요.”
“어? 내가?”
이한의 말에 버두스 교수는 잠깐 고민했다.
공부란 학생들이 스스로를 위해서 하는 일.
그런 만큼 재료도 학생들이 스스로 구해야 한다는 게 버두스 교수의 철학이었지만...
“그러지 뭐.”
그건 그거고 자기 필요한 일 있으면 얼마든지 손바닥 뒤집을 수 있는 게 버두스 교수였다.
“그러면 시간이 만들어졌지?”
“아직 부족합니다. 교수님.”
“아직?!”
“예. 지금 저희들은 시행착오가 좀 많은 편입니다. 그게 왜겠습니까?”
“너희들이 마법을 지지리도 못해서?”
“......”
“......”
옆에서 상자 들고 지나가던 학생들이 버두스 교수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것도 있지만 교수님께서 몇 마디 조언만 해주셔도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뭐.”
버두스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간 만들어졌지?”
이한은 생각보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버두스 교수의 모습에 놀랐다.
어라?
‘이 정도면 더 요구할 수도 있겠는데?’
이한은 버두스 교수한테 머리로 공을 받으면서 묘기를 부려보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그러다가 문득 의문이 들어서 물었다.
“그런데 교수님. 자거나 쉬는 시간을 줄이라는 소리는 용케 안 하십니다?”
“어? 아. 고나달테스가 금지시켰어. 진짜 너무하지 않아?”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 * *
재료도 자기 돈으로 내주고, 강의도 자기가 직접 하자, 학생들은 모두 잠깐 행복해졌다.
“교수님. 여기 마력회로 증폭 부분이 막혔는데...”
“여기 선 그어.”
“...????”
막힌 회로에 선 하나 쓱 그어버리고 가는 버두스 교수의 모습에 질문을 던진 학생은 눈을 끔뻑끔뻑거렸다.
어... 어어?
“이 선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뭐?”
버두스 교수는 ‘이 간단한 걸 어떻게 더 설명하지’같은 눈빛을 보내며 당황스러워했다.
당황하던 교수는 이 일의 원흉을 불렀다.
“안 되겠다. 이건 네가 설명해봐.”
“아니. 교수님. 쟤가 막힌 거면 저도 모르는... 아. 이건 위쪽에만 너무 마력이 집중되서 분산시키는 거야. 이대로 내버려두면 마법진의 선이 과부하로 끊어질 테니까.”
“오... 그렇구나!”
친구가 이해하자 흐뭇해하던 이한은 멈칫했다.
‘아차.’
모르는 척을 했어야 했는데...
버두스 교수는 어쨌든 학생이 이해를 한 것 같자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막힐 때마다 이한을 불렀다.
“워다나즈.”
“워다나즈?”
“워다나즈!”
“......”
이한은 그냥 버두스 교수가 다시 학생들에게 관심을 끊게 할까 고민했다.
* * *
“참. 기말고사 알려줘야겠군.”
열심히 강의를 하던 버두스 교수는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일주일도 넘게 남았는데요?”
“아티팩트는 시간이 걸리잖아. 너희들은 너무 못해서 이렇게 시간을 줘도 못 해오는 애들이 많을걸.”
교수의 훈훈한 말에 모두 감동했다.
“기말고사 과제도 간단해. 오늘 제출한 과제들 있지? 그걸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갖고 와. 그걸로 평가할 거야.”
“흐음...”
“으음.”
학생들은 버두스 교수의 말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
그리고 이한은 오랜만에 깊이 좌절했다.
‘젠장.’
여기서 뭘 더 업그레이드를 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