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강의가 끝나자 버두스 교수는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이한에게 다가왔다.
“이제 배울 시간 있지?”
“...교수님. 지금 제가 기말고사 과제를 고민하느라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한은 방패를 가리키며 말했다.
버두스 교수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이 방패에 고쳐야 할 점이 얼마나 많은데!?”
“물론 그렇겠지만 전 제 수준에서 고쳐야 하거든요.”
“아!”
이한의 말에 버두스 교수는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탄성을 내뱉었다.
이한은 버두스 교수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어렵네!”
“그렇죠?”
“음... 음... 으으음... 네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게...”
버두스 교수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있어!”
“앗. 뭡니까?”
“공격 반사 마법을 추가하는 게 어때?”
“...그게 대체 어떻게 제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이한이 아직 부여 마법에 대해 잘 모르지만, 부여 마법에서 ‘반사’란 속성이 절대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짐작이 갔다.
들어오는 공격의 방향을 그대로 돌려보내는 개념이 절대 쉬울 리가 없지 않겠는가.
부유, 자동, 방어 등의 속성과 비교해보면 답이 나왔다.
“그게 그나마 쉬운 건데?”
“그렇습니까...”
이한은 진지하게 반사 속성 공부를 시작해야 할지 아니면 방패를 색칠한 다음 업그레이드했다고 우겨볼지 고민에 들어갔다.
‘기말고사 성적이 망할 경우 전체 점수에 어느 정도 타격이 가더라...’
고민하는 이한 옆에서 버두스 교수가 다시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어쨌든 골라졌으니까 이제 배울 시간 있지?”
“아니요?”
“?!?!??!”
버두스 교수는 모아놓은 나무껍질이 전부 불타버렸을 때나 지을 법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 * *
‘뿌듯하군.’
자리에 앉은 이한은 버두스 교수의 표정을 떠올리며 흐뭇해했다.
사실 이건 이한의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버두스 교수한테 ‘그래 배우겠습니다’하는 순간 버두스 교수는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이한을 붙잡고 놔주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버티고 또 버텨야했다.
‘가능하면 졸업 때까지 버틸 수 있으면 좋겠군.’
이한은 졸업식 전날에 버두스 교수에게 ‘내일 배우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졸업하는 상상을 했다.
물론 그렇게까지 버티기는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 과제 한 사람?”
“그걸 벌써 다 한 사람이 어딨어? ...워다나즈?”
푸른 용의 탑 학생 한 명이 말하다가 문득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나도 다 못했다. 아니. 지금 내 앞에 쌓인 과제가 안 보이나?”
친구들이 마법 학파 한두개씩을 골라서 들을 때 이한은 지금 흑마법소환마법환상마법부여마법예지마법변환마법치유마법등등을 추가로 듣고 있었다.
몇 배는 두꺼운 책 더미에 친구들은 조용히 눈을 깔았다.
괜히 이한하고 시선을 마주쳤다가 같이 추가로 공부하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 과제도 슬슬 생각하긴 해야 하는데.’
토요일.
다들 늘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주말이었지만 기말고사가 한 주 가까이 남은 만큼 탑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다음 주까지는 지옥의 기말고사 전 과제, 다다음 주까지는 지옥의 기말고사...
심지어 과제와 기말고사가 연계되어 있거나 합쳐진 강의들도 있었다.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 과제가 바로 그런 부류에 속했다.
-간단한 마법 구조물의 시안을 작성해서 제출하게. 제출 후 확인받는 대로 제작에 들어가고. 효율과 절약이 평가 기준이 될 걸세.
-혹... 혹시 재료도 저희가 구해 와야 하나요?
-아쉽지만 정해진 재료 외의 재료들은 허락하지 않겠네. 제공하는 재료들만 사용하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
부여 마법처럼 말도 안 되는 난이도를 가진 과제는 아니었다.
다만 이것도 만만찮게 시간을 잡아먹는 과제였다.
구조물 고르고, 구조물에 들어갈 적당한 마법 고르고, 그 마법에 필요한 재료 고르고, 최대한 타이트하게 견적 내고, 통과하면 직접 만들고...
‘...내가 처음에 생각한 마법사는 조금 더 신비스러운 거였는데.’
에인로가드에 들어오고 나서 마법사에 대한 신비만 나날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한은 힐끗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벌써 해가 머리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폰리그를 데리고 첨탑 마구간으로 나가는 순간 주말은 모두 날아간다고 봐야 했다.
최대한 과제를 많이 끝내놔야 하는데...
“요네르. 가장 간단한 구조물이 뭐가 있을까?”
“응?”
옆에서 간이 물약 보관함을 그리고 있던 요네르가 고개를 들었다.
“마법등이나 상자? 간단한 함정?”
“흐음.”
이한은 하나씩 메모해가며 생각에 잠겼다.
간단하고, 완성하기 좋고, 재료비도 적게 들고, 그러면서 평가도 좋게 받을 수 있는 게 있나?
“...그런 게 있으면 내가 먼저 했겠지?”
요네르는 친구가 너무 공부를 많이 한 탓에 어떻게 된 것 아닌가 싶어서 걱정이 됐다.
그러나 이한은 진지하게 몰두했다.
무언가 떠오를 것 같았던 것이다.
“...요네르. 찾았어!”
“뭐?”
요네르는 놀라서 깃펜을 부러뜨릴 뻔했다.
방금 말한 조건에 맞는 걸 찾았단 말인가?
그런 게 있나??
“이거 봐.”
이한은 길쭉한 장대 형태의 마법등을 그렸다.
도시나 성, 요새나 마을 대로에 설치하곤 하는, 마법으로 발광(發光)하는 구조물이었다.
어두컴컴한 길거리를 밝혀주는 만큼 어디든 설치 안 되는 곳이 없었고 덕분에 많은 수련 마법사들의 밥줄이 되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그만큼 많은 연구가 있었다는 뜻도 됐다.
더 밝게, 더 싸게, 더 오래, 더 효율적으로, 더 찬란하게, 추가 기능까지 등 온갖 방식의 개선된 마법등이 존재했다.
알펜 나이튼 교수는 효율과 절약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말했지만, 기존의 설계들과 너무 겹치면 당연히 감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한은 그런 기존의 설계들과 차별화되는 설계를 만들어내기라도 한 걸까?
“...?!”
요네르는 이한이 가리킨 마법등을 보고 놀랐다.
길쭉한 장대 형태만 있고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설마?’
요네르는 친구가 불러낸 빛의 구체가 가진 지속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부유 방패의 지속시간도.
“설마... 모든 설계를 다 빼버리고 마법만으로 해결 보려는 거야?!”
이한만이 할 수 있는 비책.
그건 마력 설계고 분산이고 뭐고 다 때려치운 다음 자기가 직접 마법을 걸어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그게 무슨 설계야’라고 하겠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마법이 며칠 넘게 유지되는 이상, 아무리 설계가 없어도 저건 마법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나이튼 교수가 그 억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발한 발상이라는 건 확실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요네르. 아직 안 그린 거야.”
이한은 황당하다는 듯이 요네르를 쳐다보았다. 요네르는 민망해져서 볼을 살짝 붉혔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억지를 교수님이 인정해주실 리가 없잖아.”
“인정해주실 수도 있지 않나...”
요네르는 자신 없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내가 생각한 건 이거였어. 요네르. 이쪽에 증폭 마법진을 겹쳐 넣어서 효율을 올리는 거지. 시행착오는 있겠지만 훨씬 재료값이 덜 들 거야.”
이한의 설명은 확실히 타당했다.
제작 난이도는 올라가겠지만 실력만 있다면 재료값을 아낄 수 있는 시안이었다.
하지만 요네르는 살짝 미련이 남아서 물었다.
“...아까 그건 진짜 할 생각 없어?”
“없다니까.”
* * *
파아앗!
이한은 투명화 아티팩트를 폰리그에게 채웠다.
“폰리그. 착하다. 갈 때까지 조용히 해야 해. 알겠지?”
-푸흐흥...?
폰리그는 이한이 대체 왜 이러나 싶어서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봤을 때, 폰리그의 주인은 좀 많이 특이한 편이었던 것이다.
“그래그래. 기특하다.”
폰리그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한의 뒤를 따라갔다.
데스 나이트들이 본관 정문으로 걸어가는 이한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너무 늦게 돌아다니지 말게. 워다나즈 군.
“예. 명심하겠습니다.”
-자네는 왜 그런 잔소리를 하고 그러나. 늦게 돌아다닐 수도 있지. 누가 들으면 자네는 밤산책 안 한 줄 알겠어!
-쉿, 쉿! 워다나즈 군이 듣잖나!
‘훈훈하시군.’
정문 주변의 데스 나이트들과 이미 이야기를 해놓은 덕분에 이한은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첨탑 마구간으로 가는 샛길도 다행히 남아있었다.
‘너무 순조로워서 불안해질 정도인데.’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첨탑 마구간 근처까지 도착하자 이한은 괜히 찜찜해졌다.
에인로가드에 오래 있다 보니 일이 잘 풀려도 쓸데없이 불안해지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망토로 얼굴을 가리고...’
이한은 대충 외출 나가는 사람처럼 망토를 푹 뒤집어썼다.
아무르가 밖에서 방문하면, 아무르와 친구인 척하며 같이 나가면 됐다.
‘승산이 있다.’
처음에는 좀 걱정했는데 마구간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니 제법 승산이 있어보였다.
의외로 손님이 많아서 분주했던 것이다.
교수들부터 시작해서 밖에서 들어온 상단 직원들, 상인들, 심부름꾼들까지.
사람들은 북적거리는 탓에 서로 어깨를 부딪쳐가며 움직여댔다.
아무도 이한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법사들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화령조의 알을 일주일 안에 갖고 와달라니요! 그걸 어떻게 일주일 안에 갖고 옵니까!?”
“어이! 거기 상자 조심해서 내려놔! 그거 깨지면 우리 전부 죽을 수도 있어!”
“안, 안에 악마라도 들었습니까?”
“아니. 교장 선생님이 시키신 유리 조각상이야.”
“......”
훈훈한 대화를 듣고 있는 사이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날아왔다.
‘아무르!’
아무르는 능숙하게 착지한 뒤 출입명부를 작성했다.
그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깁니다.”
“...드디어!”
아무르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가 이한이 있는 걸 보고 뛸듯이 기뻐했다.
“정말 대단하군.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해낼 줄은 몰랐소.”
“아직 기뻐하기엔 이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여기까지 온 이상 성공이나 마찬가지니까. 저기 상인들이 출발하면 같이 나가는 거요.”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침착하게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한의 심장도 두근거리고 있었다.
만약 성공만 하면, 이한은 주기적으로 학교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르가 갖고 온 화물을 내려놓는 사이 이한은 폰리그에게 <저주 마법 해제의 물약>을 먹였다.
펑!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폰리그가 바닥을 박박 긁으며 기뻐했다.
“...농담인가 싶었는데 정말이었을 줄이야.”
아무르는 첩탑 마구간 구석에서 기분 좋게 하품하는 그리폰을 보며 다시 한 번 놀랐다.
아무리 봐도 1학년 학생이 길들일 만한 몬스터는 아닌 것이다.
“그리폰이 특이해서 들키진 않겠죠?”
“그건 걱정할 것 없소. 그리폰보다 특이한 짐승들이 여기에는 투성이니.”
아무르의 말대로 근처 짐승들은 개성이 넘쳐도 너무 넘쳤다.
이한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인면조(人面鳥)의 시선을 피하려고 애썼다.
“슬슬 우리 차례가 오고 있소. 준비하시오.”
“예.”
첨탑 마구간은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지만, 덩치 큰 탈것들이 서로 나가고 들어오려고 부딪칠 때는 그런 게 무색해졌다.
당연히 이럴 때는 순서가 정해졌다.
들어오는 입구 쪽으로 밖에서 날며 기다리는 사람들과, 나가는 출구 쪽에서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들.
이한은 주변을 눈짓했다. 추운 상공의 날씨 때문인지 망토를 푹 뒤집어쓴 사람들이 많았다.
-다음 조, 출발! 출발!
마구간지기는 이한을 잡지 않았다. 이한은 그리폰을 데리고 천천히 걸어갔다.
팍!
그리폰이 벽돌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한은 커다란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폰을 길들였군.”
“...?!?!?!?!?!?!?!?”
옆에서 들려오는 볼라디 교수의 담담한 목소리에, 이한은 그리폰의 고삐를 놓치고 땅으로 떨어질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