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끄으으...”
도이그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분명 동시에 움직였는데 그와 형제가 저 마법사보다 늦다니.
말이 동시지 마법사가 집중해서 지팡이 휘두르고 주문 외울 동안 둘은 암기만 발사하면 끝이었는데...
툭!
두 모험가는 그대로 쓰러졌다.
이한은 그것도 모르고 볼라디 교수에게 다시 물었다.
“방어용 장비를 갖춰 입었을 텐데 좀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충분하다.”
사실, 모험가들 중에서 제대로 된 대(對) 마법 장비를 갖춰 입은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성 하나와 가격이 맞먹는 비싼 아티팩트가 있으면 그냥 팔아서 은퇴를 하면 되지 뭐하러 목숨을 걸고 위험한 일을 한단 말인가.
저번에 이한이 만난 <단풍나무의 뱀>이 지나치게 특이한 경우였고 원래는 그런 장비를 갖춰 입은 모험가를 만나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도이그와 그이도 모두 속도를 위해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고 다녔으니...
‘뭐지? 그냥 이상한 놈들이었나?’
물론 이한 입장에서는 방금 덤벼든 모험가들의 사정을 모르는 만큼 많이 당황스러웠다.
대체 뭐하는 놈들인데 마법사한테 덤비면서 이렇게 대충 왔지?
* * *
“둘 다 현상금이 걸려 있던 자들이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마을에서 싸움이 일어났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한과 볼라디 교수는 필로네 마을을 담당하는 제국 행정관을 찾아갔다.
행정관은 딱히 두 마법사를 의심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애초에 에인로가드 소속 마법사들과 현상금 걸린 모험가들은 신분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현상금까지 걸려 있었습니까?”
이한은 깜짝 놀랐다.
제국은 까마득하게 넓었고 그만큼 한 번 사고를 친 자들이 멀리 도망치면 잡기 쉽지 않았다.
이런 자들에게 제국은 현상금을 걸었는데, 당연히 아무나 걸리는 게 아니었다.
‘현상금 걸린 놈들치고 너무 멍청한 것 아닌가? 어떻게 아직까지 안 잡혔지?’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답군.’
행정관은 놀라움을 감추며 담담한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이 전부 제국에서 손꼽히는 천재들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아보였는데 도이그와 그이도 형제를 잡고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아하다니.
저렇게 약한 놈에게 현상금이 왜 걸렸냐는 질문은 순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대답이었다.
“그렇습니다. 역시 에인로가드의 학생이시군요. 앞으로도 많은 활약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한은 일단 대답하고 나서 멈칫했다.
‘뭔 활약을 기대한다는 거야?’
칭찬은 칭찬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칭찬이었다.
또 범죄자 만나라고 저주하나?
하지만 은화가 두둑이 든 주머니를 받자 기분은 다시 좋아졌다.
이한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행정관은 다시 놀랐다.
방금 보여준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는 정반대되는 겸손함이었던 것이다.
‘역시 대귀족 출신인가...’
어느 가문 출신인진 몰라도 유서 깊은 대귀족 가문 출신이 분명했다.
행정관은 자신도 모르게 깊게 감명을 받았다.
일반인으로서는 엄두도 내기 힘든 마법이란 난해한 학문.
자신의 재능에 대해 오만할 정도로 확신하면서도 예의범절을 잃지 않는 저런 소년이야말로 그런 학문의 길을 걸어야 할 사람일지도 몰랐다.
‘힘내라.’
행정관은 이한을 응원했다.
저 소년 같은 학생이 마법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행정관의 일이었다.
제국의 관리 같은 귀찮고 지루한 일은 행정관 같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 * *
“...나누시겠습니까?”
“아니.”
은화 주머니의 무게를 가늠하던 이한은 볼라디 교수가 옆에 있는 걸 깨닫고 물었다.
다행히 볼라디 교수는 제자의 돈주머니에 별 관심이 없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으신 것 같은데.’
굳이 오고닌의 마법까지 쓰지 않아도 이한은 교수들의 감정이라면 얼추 읽어낼 수 있는 비범한 감각이 있었다.
‘은화 때문은 아니겠고...’
“혹시 거래 때문이십니까?”
볼라디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꽤 많이 편지를 받았는데 전부 다 사기꾼들이었다니.
한 명 정도는 쓸만한 걸 갖고 오지 않을까 기대했던 볼라디 교수 입장에서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한은 표정을 관리하려 애썼다.
‘웃으면 안 된다. 웃으면 죽는다.’
볼라디 교수가 해골 교장처럼 감정적인 보복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교수가 실패했는데 제자가 옆에서 웃고 있으면 좋을 게 없었다.
더군다나 볼라디 교수는 근접전에도 고수 아니었던가.
“괜찮습니다.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었다면 희귀한 몬스터겠습니까. 저는 없어도 괜찮습니다.”
이한은 선량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말에 볼라디 교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제자가 저렇게 사양을 하니 마음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감정이 샘솟았다.
그건 바로 분함이었다.
스승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해내지 못했을 때 느끼는 분함.
볼라디 교수는 처음 느끼는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더욱 얼굴을 찌푸려야했다.
‘...이거 괜찮은 거 맞나?’
볼라디 교수의 인상이 더 찡그려지자 이한은 불길해졌다.
설마 저러다가 ‘몬스터가 없다니 어쩔 수 없군 내가 몬스터를 대신하겠다’같은 개소리를 하진 않겠지?
“교수님?”
“그래.”
볼라디 교수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이한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기말고사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더 구해보겠다.”
‘젠장.’
이한은 볼라디 교수를 욕했다.
대체 왜 저렇게 쓸데없는 일에만 열정적이란 말인가?
그 시간에 ‘왜 내 강의실에는 학생이 한 명밖에 없을까’로 고민해보면 안 되나?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이신가?”
“!”
이한은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상당히 신분이 높은 귀족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억양과 행동거지부터 시작해서 복장, 장신구, 주변에 서있는 호위들까지.
‘누구지?’
“맞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귀족 대신 옆에 있는 호위가 대답했다.
“이 분은 이칼도렌 공작 전하십니다. 신분을 밝혀주십시오.”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배그렉 가문의 볼라디.”
배그렉 가문과 달리 워다나즈 가문은 제국 공작가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대귀족 가문이었다. 호위의 태도가 한층 더 조심스러워졌다.
‘이칼도렌 공작이면...’
이한이 제국의 모든 귀족들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유명한 가문들은 알음알음 귀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칼도렌 공작은 이한도 소문을 몇 번 들어본 적 있고, 제국 신문에서도 본 적 있는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별로 좋은 소문은 아니었는데.’
귀족들 중에 교활하거나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없는 사람은 적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칼도렌 공작의 소문은 좀 심한 편이었다.
교활하고 속셈 많은 자인 만큼 이한은 살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 볼라디 교수가 있다고 해서 덜 긴장되진 않았다. 사실, 볼라디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는 더 걱정스러운 요소였다.
‘볼라디 교수가 이칼도렌 공작을 모욕하더라도 해골 교장이 나서주겠지? 그래도 마법학교의 일원인데?’
해골 교장이 들으면 욕할 생각을 하며 이한은 고개를 숙였다.
“이거. 만나게 되어 영광이군.”
이칼도렌 공작은 고작 사십대 정도로 보였다.
실제 나이는 2배 정도 될 테니, 인간 종족치고는 매우 젊은 얼굴이었다. 온갖 연금술 비약 덕분이 분명했다.
“며칠 전에 마법사가 귀한 만남이 있을 거라고 예언했는데, 그 만남이 이 만남 아닌가 싶군. 에인로가드의 뛰어난 마법사들을 마을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공작의 호위 중 한 명이 이한을 쏘아보더니 공작에게 소곤거렸다.
“공작 전하. 제가 알기로 마법학교의 학생들은 외출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수상하지 않으십니까?”
귀족의 호위들은 기본적으로 편집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주인 주변에 접근하는 자들은 전부 다 변장한 암살자로 가정하고 보는 것이다.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교수와 함께 나오는 것 정도는 당연히 허락되겠지. 더 이상 무례한 소리는 허용하지 않겠다. 썩 뒤로 물러나도록.”
이칼도렌 공작은 강하게 호위를 탓했다. 호위는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이한은 속으로 찔려했다.
‘저 호위. 예리하군. 어떻게 알았지?’
“무례가 될 수 있다면 용서해주게. 하지만 아까 들어보니, 두 마법사께서 찾는 게 있는 것 같던데? 내가 도움을 주고 싶네.”
“!”
이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역시 소문이 틀린 게 없구나!’
교활하고 꿍꿍이 많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아무 죄 없는 학생 한 명을 골로 보내려고 하다니.
“희귀한 몬스터를 찾고 있습니다.”
“조건이 있는가?”
“화염, 물, 번개 속성에 면역을 가지고 있고, 강한 마법 저항력을 가졌으며, 시속 60km 이상의 속력을...”
볼라디 교수의 개소리를 듣고서도 이칼도렌 공작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옆의 호위를 불러 물었다.
“구할 수 있겠나?”
“찾아보겠습니다.”
“부탁하지. 기다리는 동안 내가 마실 걸 대접해도 되겠나?”
일이 틀렸음을 깨달은 이한은 한숨을 참으며 대답했다.
“가능하면 차로 부탁드리겠습니다.”
“훌륭한 취향이군.”
* * *
“공작 전하. 아무리 워다나즈 가문 출신에, 에인로가드의 교수라지만 지나친 투자가 아니신가...”
이칼도렌 공작은 가볍게 손가락을 두드렸다. 그러자 부하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저 경고를 받고서도 입을 놀리는 부하는 없었다.
공작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는 안다.”
마법사가 구해달란 몬스터는 생각보다 희귀하고 까다로웠다.
그에 비해 저 두 마법사가 에인로가드 내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 명은 교수겠지만 어느 정도 위치의 교수인지는 모르겠고, 다른 한 명은 저학년 학생 같은데...
저 정도면 친해져도 크게 이득을 못 볼 가능성이 높았다.
교수나 학생이 교장과 친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칼도렌 공작은 그걸 감안하고서도 투자를 마음먹었다.
지금은 효율을 가리지 않고 마법학교 안에 촉수를 여럿 뻗어야 했다.
‘에인로가드 안의 상황을 어떻게든 알아내야 한다.’
공작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그 속은 복잡했다. 최근 공작의 심복 중 한 명이 에인로가드 안으로 들어갔다가 연락이 두절된 것이다.
만약 심복이 고나달테스한테 붙잡혔다면 상황을 빠르게 파악해야했다.
그 성질에 진상을 알아차린다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두 마법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조금씩 늘려나가야 했다.
“차는 마음에 드는가?”
이칼도렌 공작은 응접실로 발을 디디며 물었다. 이한과 볼라디 교수는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아주 훌륭합니다. 감사합니다. 공작 전하.”
예의바르게 대답하는 이한과 목만 까닥거리는 볼라디 교수는 상당히 대비가 되었다.
공작이 아쉬운 상황이라 넘어간다지만 괘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여간 마법사란 잡놈들은.’
외골수에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에만 몰두하는 멍청이들이었다.
그에 비해 이한의 모습은 상당히 신선했다.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라 무례함은 기본으로 달고 다닐 줄 알았는데...
“한창 마법에 집중해야 할 학생한테 너무 싸구려만 마시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마음 같아서는 갈 때 좀 포장해서 갖고 가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하하... 말해놓겠네.”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워다나즈 가문이... 맞나?’
이칼도렌 공작은 사람 불쾌하지 않게 대화할 줄 아는 워다나즈 가문 출신을 처음 보았다.
게다가 저런 농담까지.
정말로 놀라웠다.
“그러고 보니, 에인로가드에서 배우고 있다면 고나달테스 공(公)도 만나본 적 있겠군.”
“예. 뵌 적 있습니다.”
“혹시 친분이 있는 사이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한은 질색하고 대답했다.
그게 무슨 친분이 있는 사이인가.
증오나 고통이 있는 사이면 모를까.
‘아쉽군.’
이칼도렌 공작은 속으로 깊이 아쉬워했다. 예상하긴 했지만 영 쓰라린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