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그래도 별로 대단한 건 아니었습니다.”
“관찰력은 중요하다.”
볼라디 교수는 감정 인지 계열 마법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다.
마법사들의 결투는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충돌.
그 충돌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상대의 세계를 먼저 읽어내는 눈썰미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감정 조절 계열 마법도 익혔겠지.”
“......”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건 상당히 씁쓸했다.
“마법사들한테는 잘 통하지 않겠지만, 마력을 다룰 줄 모르는 이들에게는 유용한 마법이다.”
“?”
이한은 멈칫했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다 통했는데?’
이한은 친구들에게 혀를 찼다.
얼마나 평소에 느슨하게 방심하고 지내면 마법사가 저런 마법에 당한단 말인가.
“계속해서 익히도록. 변환 마법은 여전히 강철이겠지.”
“예.”
볼라디 교수는 변환 마법을 듣는 학생보다 더 변환 마법의 교육과정에 자세한 것 같았다.
지금 변환 마법 강의는 가장 기초적인, 그러니까 마법사가 평소 입고 있는 옷붙이를 강철로 바꾸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몸에 걸치고 다니는 물건들은 친숙한 만큼 변화시키기 쉬웠고, 강철은 마법사들이 가장 접하기 쉽고 흔한 물질 중 하나였던 것이다.
쉭!
거센 소리와 함께 볼라디 교수가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손수건을 휘둘렀다. 손수건은 강철로 변하더니 마치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볼라디 교수를 보는 순간 무조건 긴장의 끈을 붙잡고 있던 이한은 즉시 반응했다. 외투를 던지며 외쳤다.
“강철로, 망토여!”
다행히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손수건이 외투에 막혀서 떨어졌다.
볼라디 교수는 제자의 턱을 후려갈길 뻔했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속도를 더 늘리도록.”
“예...”
이한은 ‘기습 좀 그만하시죠’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푸른 용의 탑 벽에 대고 말하는 것과 별 차이 없을 테니까.
“예지 마법과 치유 마법은 너무 욕심내지 말도록.”
“예... 예?”
이한은 가만히 듣다가 멈칫했다.
‘천 년 후의 미래를 예지해라’나 ‘몸에 바람구멍 몇 개 뚫려도 바로 회복할 수 있도록 대비해라’가 아니라 ‘욕심내지 말도록’이라니?
‘누가 들으면 내가 욕심내는 줄 알겠...’
“욕심내지 말라는 게 어떤 의미십니까?”
“말 그대로다. 예지 마법은 불안정하고 변덕스럽지. 억지로 시전했다가는 커다란 대가를 치를 수 있다.”
“......”
이미 몇 번 예지 마법을 써왔던 이한은 떨떠름할 수밖에 없었다.
‘예지 마법이 위험하긴 정말로 위험한가보군.’
물론 만나는 사람마다 예지 마법이 위험하다고 하긴 했지만, 볼라디 교수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건 그 격이 달랐다.
정말 진짜 미친듯이 위험한 마법이구나!
“어라? 그러면 치유 마법도 불안정하고 변덕스럽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이한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다르다.”
치유 마법을 너무 욕심내지 말라는 이유는 예지 마법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치유 마법은 기본적으로 경험이 쌓여서 한 사람 몫을 하기 전까지는 멋대로 써봤자 역효과만 나는 마법인 것이다.
괜히 다친 걸 자기가 치료한다고 나서봤자 더 크게 다치는 수만 생겼다.
“아하.”
이한은 비밀을 지켜준 가르시아 교수에게 감사해했다.
이미 사람 상대로 치유 마법을 성공시켰다는 건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숨겨야 할 것 같았다.
* * *
볼라디 교수는 따로 과제를 내주진 않았지만, 다른 마법들에 대해 여러 조언들을 해주었다.
-스켈레톤을 움직일 수 있게 만들고, 독과 저주를 결합해서 강화하도록.
-오고닌 님의 환상 마법은 익혀두면 도움이 될 거다. 가능한 4서클까지 빠르게 익히도록.
-강철 방패를 완성했다고 들었다. 이제 마법진의 도움 없이도 시전해보도록.
‘차라리 그냥 과제를 내주시죠.’
물론 이한은 속으로 생각만 했다. 말로 꺼냈다가는 정말 과제를 내줄 사람이었으니까.
“화염 마법을 조심하도록.”
“예?”
이한은 고개를 들었다.
뜬금없는 조언이었던 것이다.
화염 마법만큼 널리 알려진 원소 마법도 없었지만, 이한에게는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화염 원소의 특성 때문에 이한처럼 마력량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마법사는 아차 싶으면 바로 방화범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한은 화염 마법을 쓸 때면 각종 저주받은, 아니, 화염을 줄여주는 아티팩트를 몇 겹씩 착용하고 마법 자체도 규모를 늘리지 않는 식으로 최대한 안전하게 사용해왔다.
볼라디 교수도 그걸 알고 있을 텐데 왜?
“언제나 주의하고 있습니다?”
“더 주의하는 게 좋겠군.”
볼라디 교수의 말에 따르면, 학교 내의 마력 흐름에서 조금씩 화염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다고 했다.
원래 자연에 존재하는 마력은 환경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마련.
뜨거운 여름에는 화염의 기운이.
차가운 겨울에는 냉기의 기운이.
제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마력이 강한 에인로가드라면 계절의 영향도 더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 여름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위험할 정도입니까?”
“축제 때문이겠군.”
“예?”
“불사조 축제. 학생들이 기념하고 있을 텐데.”
마법사들은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바꾸는 이들.
당연히 마법사들이 진행하는 의례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주변에 영향을 끼쳤다.
초여름이 제대로 찾아오도록 불사조를 기념하는 축제는 당연히 화염의 힘을 강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안 그래도 축제 때문에 분위기가 산만하고 어수선했는데 이런 식의 피해까지 입어야 한다니!
벌써 축제가 싫어지고 있었다.
* * *
검술 강의.
...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
이한은 들고 있는 나뭇가지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등짝을 가차 없이 때렸다.
“그걸 계산이라고 하는 거냐? 다시! 그대로 물약 섞었다가는 솥이 녹아서 구멍 뚫리겠군!”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공부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만큼, 이한은 검술 강의가 시작되기 전 친구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물론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죽을 맛이었다.
“잠깐 휴식. 5분만 쉬었다가 다시 한다. 자리에서 멀어지지 마라!”
“워다나즈 저 자식 왜 저래?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지독해!”
“누가 워다나즈한테 시비 걸었냐?”
“워다나즈 욕한 거 들킨 거 아니야?”
“빌어먹을, 내가 그러니까 욕하지 말자고 했잖아!”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충격과 공포로 소곤거렸다.
옆에서 ‘네 물약은 너무 맹물 같아서 돈 주고 팔았다가는 감옥에 가게 될 거다!’ 같은 식으로 괴롭히는데 환장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이한이 폭력을 휘두를 때가 더 낫게 느껴질 정도였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자리에 앉아 오랫동안 공부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워다나즈. 너는 모르겠지만 우린 기사 출신이라서 체질적으로 공부와는 그리 잘 맞지 않...”
“닥치고 앉겠나, 맞고 앉겠나?”
“......”
평소 이한이 하는 행동이라면 뭐든지 아니꼬웠던 지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더 욕해. 워다나즈. 더 욕하라고.’
지젤은 흰 호랑이 탑에 들어온 걸 후회하진 않았지만, 가끔 아쉬울 때가 있었다.
같은 탑 학생들인 만큼 세게 때릴 수가 없다는 게 그 중 하나였다.
평소에 지지리도 공부를 피하던 놈들이 워다나즈 하나 던져 놓으니 정신차리고 퍼덕이는 게...
“다들 뭐하고 있는 겁니까?”
엘프 교수, 잉걸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신성한 검술 강의 장소에서 학생들이 탁자를 깔아놓고 끙끙 앓고 있었던 것이다.
“교수님!!”
학생들은 30분 일찍 온 교수의 모습에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기뻐했다.
“워다나즈가... 저를 강제로 공부시키려고...”
“아하.”
잉걸델 교수는 이한을 보고 말했다.
“친구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군요. 같은 탑도 아닌데. 감동했습니다.”
“아닙니다. 교수님. 같이 검술을 단련하는 사이 아닙니까.”
가식적인 이한의 말에 잉걸델 교수는 감동했다. 옆에 있던 흰 호랑이 탑 학생은 불길함을 느꼈는지 급히 말했다.
“일찍 오셨으니 강의 시작하시죠!”
“아닙니다. 아직 시간 남았으니 조금 더 공부해보세요. 옆에서 기다리겠습니다.”
“......”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슬픔과 고통으로 젖어들었다. 잉걸델 교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예전부터 검술을 배우는 사람들은 공부를 좀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러지 마십시오.”
“네...”
* * *
기어코 30분을 꼬박 채워서 추가로 공부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마나 앉아 있었다고 온몸이 돌로 변한 기분이었다.
잉걸델 교수는 검을 든 채로 웃으며 학생들을 기다렸다.
“공부하느라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기말고사는 잘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맞습니다. 이제 산맥이 정원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양심 없는 놈들.’
‘저런 말도 안 되는 허세를.’
이한과 지젤은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의 발언에 경악했다.
저번에 쿠라레 도마뱀 나왔을 때 저승에 한쪽 발을 디뎠던 놈들이 뻔뻔하기가 얼굴에 철판을 깐 수준이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오늘은 도와주실 분을 불렀습니다.”
“!”
“혹시 백양목 기사단인가요?”
학생들은 저번에 온 백양목 기사단의 기사들이 또 왔나 싶었다.
“걔네들이 도움이 되나? 산에 대해 아는 게 없을 것 같은데?”
“저번에 쿠라레 도마뱀 나온 곳으로 끌고 가자.”
‘이 자식들 기사 맞아?’
자기들이 졌다고 암계를 꾸미는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의 모습에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백양목 기사단은 아닙니다. 이쪽입니다.”
잉걸델 교수가 외치자 처음 보는 두 이방인이 앞으로 걸어왔다.
어제 마을에서 여러 모험가들을 구경했지만, 눈앞의 손님들은 그 모험가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장비가 좋아보였다.
장비의 겉모습은 투박하고 낡았지만 그 안에서는 복잡한 마력들이 느껴졌다. 아티팩트가 틀림없었다.
허리띠에 차고 있는 물약병과 도구들,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와 자세...
‘유명한 모험가들인가?’
“여기 이 분은 <그림자 순찰대> 소속인 바이샤다 씨. 그리고 여기 이 분은 <황무지 별잡이> 소속인 그엣세 씨.”
“!”
이한은 놀랐다.
그림자 순찰대야 닐리아와 이야기 할 때마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으니 북부 산맥의 순찰자들이란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황무지 별잡이는 제국 서부의 황야지대를 순찰하는 이들.
둘 다 뛰어난 집단이었지만 인지도는 좀 차이가 심하게 났다.
멋진 이름과 제국에서 비교적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는 서부라는 활동위치, 제국의 유명인사들을 배출해낸 전적까지.
덕분에 종종 동화나 제국 신문에 이름을 올리는 황무지 별잡이는 인지도 면에서는 그림자 순찰대와 비교할 수도 없었다.
-진짜 황무지 별잡이 자식들 치사하다니까! 진짜 진짜 치사한 자식들이야! 제국 신문을 매수한 게 분명해! 우리는 산맥에서 내려가지도 않고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데! 그 자식들은 그냥 황야 돌아다니다가 마을 들려서 푹 쉰다구! 그러면서 멋진 척은 제국에서 제일이지!
‘으음. 닐리아한테는 말하지 말아야겠다.’
안 그래도 기말고사 때문에 스트레스 받은 상태인데 황무지 별잡이가 여기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쓰러질지도 몰랐다.
“이 두 분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몬스터를 발견하고, 어떻게 몬스터를 공략해야 하는지 조언해주실 겁니다.”
잉걸델 교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슬금슬금 이동했다.
당연히 황무지 별잡이 소속인 그엣세 앞이었다.
그에 비해 그림자 순찰대 소속인 바이샤다는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가만히 서있었다.
“...!”
바이샤다는 깜짝 놀랐다.
웬 학생 세 명이 바이샤다 앞에 모인 것이다.
“모라디. 다수결로 정한 거니까 불평하지 말자고.”
“더르규가 네 편인데 이게 어떻게 다수결이야...!”
“억울하면 너도 더르규를 매수해.”
“나, 나는 매수 안 당했다. 그냥 그림자 순찰대에 소속되신 분에게 배워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