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무슨 소리야?”
“얼굴을 봐.”
“연기 때문에 안 보이는데?”
“...너 1학년이야?”
그 말에 코홀티는 품속에서 보석 렌즈가 달린 단안경을 꺼냈다. 연기도 관통해서 볼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아!”
코홀티는 후배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탄성을 내뱉었다.
저번에 그...
“무제 교수한테 잘못 붙잡힌 불쌍한 신입생!”
“네가 저지른 사고를 대신 수습한 고마운 후배겠지. 쓰레기 새끼야.”
디레트는 경멸 섞인 시선으로 코홀티를 쳐다보았다.
1학년한테 도움 받았으면 몇 년은 고개를 숙이고 다녀야 하는데, 기껏 한다는 소리가!
코홀티도 그걸 깨달았는지 민망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물론 고맙지.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다고. 다만 그 무제 교수하고 같이 다니던 게 너무 인상 깊어서...”
‘확실히 그건 그랬지.’
디레트는 그것까지 부정하진 못했다.
배그렉 교수가 서리거인의 왕과 붙어보라고 1학년 신입생의 등을 떠민 일은 절대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진지하게 며칠 동안 황제 폐하에게 익명의 투서를 보내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였으니까.
일단 당사자는 멀쩡하게 잘 지내는 것 같긴 했는데...
“어쨌든 쟤가 특이한 거니까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악마만 잘 제압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흑마법도 되게 잘하는데? 모르툼 교수님께서 기뻐하시겠다.”
코홀티는 새로 들어온 후배의 재능에 감탄했다.
1학년인데 벌써 저렇게 흑마법에 능숙하다니.
배우려는 제자들이 없어 슬퍼하던 모르툼 교수도 매우 기뻐할 게 분명했다.
원래 범재 백 명보다 천재 한 명이 더 귀한 법.
“글쎄...”
“??”
디레트가 말끝을 흐리자 코홀티는 의아해했다.
“흑마법을 계속 안 들을지도...”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말이야?”
코홀티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흑마법이 다른 마법에 비해 인기가 없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저 정도로 재능이 있으면 아무리 인기가 없더라도 마법사 본인이 배우지 않기가 힘들었다.
마도서를 읽고 주문을 연습하는 것만으로도 성취가 쉼 없이 늘어나는데 어느 마법사가 그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것도 그렇긴 한데...”
디레트는 착잡한 시선으로 후배를 쳐다보았다.
흑마법만 재능이 있으면 모를까 다른 마법들도 너무 잘 해서 문제였다.
‘저러다가 2학기 때는 안 돌아오는 거 아니야?’
* * *
마지막으로 흑마법 시험을 끝낸 가이난도는 이미르그와 라파드엘에게 말을 걸었다.
“어땠어? 어땠어?? 잘 봤어 다들? 잘 봤냐니까?”
“......”
라파드엘의 인상이 찡그려지자 가이난도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가이난도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못 봤구나!”
‘저게 저렇게까지 기뻐하면서 할 말인가?’
“그렇지? 못 봤지?!”
“닥쳐! 황자 놈아!”
라파드엘은 벌컥 화를 냈다.
저 황자는 다른 강의는 몰라도 흑마법에 한해서는 상당히 뛰어난 능력을 보여줬다.
흑마법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라파드엘과 비교했을 때 잘 보는 게 당연한 것이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자기 잘 봤다고 저렇게 신나서 달려오는 건 얄밉기 그지없었다.
다른 강의 시험 보고 나서는 세상이 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 숙이고 있던 놈이!
“그, 그렇게 잘 보진 못했어. 시험이 어려워서.”
“하하. 이해해. 흑마법 시험이 좀 어렵긴 했어.”
가이난도는 너그러운 웃음을 터뜨리며 이미르그의 말에 대답했다.
“저, 저주하고 독은 한 번에 성공했는데 뼈 마법은 세 번이나 걸려서...”
“...어? 한 번에 성공했어?”
가이난도는 멈칫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미르그가 잘 봤던 것이다.
“으, 으응.”
“나... 나도 뼈 마법은 한 번에 성공했지.”
듣고 있던 라파드엘이 별 생각 없이 물었다.
“저주하고 독은?”
“넌 네가 어떻게 봤는지는 대답 안 해주면서 뻔뻔하게 묻기나 하고! 네가 그러고도 기사냐!”
“뭐 이런 미친 놈이...”
“워, 워다나즈는 어떻게 봤대?”
이미르그의 질문에 가이난도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런 건 물어보면 실례지.”
“......”
“......”
자기보다 잘 본 게 확실한 친구한테는 절대 성적을 묻지 않는 비열한 모습에, 두 학생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황족이구나!
* * *
“지금 강의실에는 계약을 일시적으로 무효화시키는 마법이 깔려 있습니다.”
밀레이 교수는 평소와 같은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험을 앞둔 학생들은 긴장한 얼굴로 밀레이 교수를 쳐다보았다.
“다들 저번에 다른 계(界)에서 계약을 했던 걸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정령계에서.
이한 같은 학생들은 언데드계에서.
기말고사 전 과제로 다들 계약을 시도했었다.
“한 명씩 차례대로 계약한 존재들을 불러내보십시오.”
“...?”
듣고 있던 학생 중 한 명이 이해를 하지 못하고 다시 되물었다.
“교수님? 지금 강의실 안에는 계약이 무효화된 상태 아닌가요?”
이계의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변덕스럽고 위험한 존재였다.
이런 존재들은 무작정 불러낼 수 없었다.
엄격한 계약으로 묶어놔도 사고가 일어나는데 계약이 없다면 얼마나 자기 멋대로 날뛰겠는가.
물론 1학년 학생들이 계약한 존재들은 기껏해야 모닥불에 불이나 붙이고 텅 빈 가죽물통만 다시 채울 정도의 존재긴 했지만...
1학년 학생들도 거기에 걸맞게 충분히 약했으니 절대 방심할 수는 없었다.
“잘 지적했습니다. 이번 시험의 목적은 마법사의 몸을 지켜주는 계약이 없을 때도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을 체득하는 겁니다.”
“......”
말은 그럴듯했지만 학생들은 벌써 불안해하고 있었다.
“밀레이 교수님 너무하신 거 아니야? 저게 그냥 몬스터 던져놓고 싸우라는 소리와 뭐가 달라?”
“검, 검술 강의에서 비슷한 걸 한 적이 있긴 한데. 소환 마법도 이럴 줄은 몰랐군.”
친구들이 수군거리는 동안 이한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뼛조각을 꺼냈다.
그리고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뭐해? 다들 준비 안 하고?”
“...하긴 할 건데, 그래도 불평 조금 할 수 있잖아!”
“알겠으니 다들 움직여라. 준비 덜 하면 너희들만 손해지.”
피도 눈물도 없는 이한의 모습에 친구들은 투덜거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시험을 보면서도 불평하지 않다니.
정말 워다나즈는 마법에 관해서는 한 점의 타협도 없는 사람이 분명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시험이겠군.’
친구들의 생각과 달리 이한은 살짝 기뻤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험 난이도가 쉬웠던 것이다.
* * *
“바람의 정령이여. 나는 너를 믿는다.”
아산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ㄷ... 컥!”
퍽!
형체 없이 일렁거리는 바람의 정령은 아산의 복부를 정확하게 타격했다.
‘저런.’
이한이 보기에 바람의 정령은 딱히 적대감이나 악의가 있어서 저러는 게 아니었다.
적대감과 악의를 가진 수많은 몬스터와 싸워본 입장에서, 만약 가졌다면 공격이 훨씬 더 날카로웠어야 했다.
저건 장난에 가까웠다.
바람의 정령도 그리 강하지 않은 하급 정령인 만큼 마법사의 명령에 분노했다기보다는 그냥 장난기를 보여주는 것 같았는데...
“크악! 그만! 그만!”
지팡이를 놓친 아산은 옆으로 구르면서 공격을 피했다.
바람의 정령은 끈질기게 쫓아오면서 박치기를 시도했다.
보다 못한 밀레이 교수는 지팡이를 휘둘러 둘을 갈라놓았다.
“아무리 친하다고 하더라도 계약이 없는 상황에서 계속 말로 설득을 시도하는 건 어리석은 선택. 말을 듣지 않을 때는 단호한 경고도 필요하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아산의 실패는 다른 학생들에게 교훈이 되었다.
다음에 나선 학생은 바로 지팡이를 들고 정령이 명령을 거부할 경우 공격할 준비를 했다.
“매직...”
촥!
마법이 시전되기 전에 땅의 정령이 모래를 흩뿌렸다.
마법사의 적의를 정령이 먼저 눈치를 챈 것이다.
“푸헙, 풉! 푸푸풉!”
땅의 정령은 계속해서 모래를 던졌다.
평소에 각종 공격을 받으면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마법을 시전할 수 있도록 훈련 받은 학생이 아니라면, 저런 상황에서 신입생이 침착하게 마법을 시전하는 건 불가능했다.
모래 때문에 주문에 실패한 학생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탈출했다.
“믿, 믿었는데...! 믿었는데!”
“너 바로 공격하려고 했잖아.”
처음에는 나름 자신만만하게 덤벼든 학생들이었지만, 생각보다 실패하는 사람이 많았다.
밀레이 교수는 실패한 학생들은 뒤에서 기다리게 했다.
어차피 첫 시도에 성공하는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작정 당근을 내미는 것도 좋지 않지만, 무작정 채찍을 휘두르는 것도 마찬가지지.’
서로를 묶어 놓는 계약이 없을 때 마법사가 정령을 설득하는 방법.
그 핵심은 결국 이해였다.
나는 얼마나 정령을 이해하고 있는가?
어떻게든 정령과 계약을 맺었지만 평소에 별다른 교감 없이 무작정 명령만 내린 마법사는 이럴 때 바닥이 드러났다.
이 정령이 어떤 습관이 있는지 모르고 어떤 성격이 있는지 모르니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당근이든 채찍이든 그 전에 상대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었다.
지금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한 학생들은 계속 반복하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소환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리라.
“...나 공격하지 마. 알았지? 정말 공격하지 마. 나 정말 잘 해줬잖아. 내 말 한 번만 들어줘. 응? 불만이 있으면 다음에 들어줄 테니까...”
닐리아가 소환한 물의 정령은 이한도 낯이 익은 정령이었다.
저번에 섬에서 이한을 피해서 닐리아와 계약한 그 정령 아니었던가.
닐리아 앞에서는 ‘흥 나도 정령 별로 안 좋아해’라고 말했지만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무 구질구질한 방법 아니야?”
옆에서 보고 있던 가이난도가 의아해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건 너무 추한 것 같...
“!!!”
“됐, 됐다!”
학생들은 탄성을 내뱉었다.
계약이 없는데도 물의 정령은 닐리아의 말을 거부하지 않고 착실하게 따라준 것이다.
‘확실히 친하군.’
다른 학생들과 달리 이한은 닐리아의 정령이 보여주는 마력의 감정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마력에 대한 타고난 감응능력.
거기에 환상 마법으로 감정 인지까지 수련했으니, 느끼지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닐리아가 소환해낸 물의 정령은 다른 정령들보다 훨씬 더 친근하게 닐리아를 대했다.
“과연. 그렇군.”
“뭐가?”
“닐리아는 평소에도 심심하면 물의 정령을 소환해서 대화를 나눴을 테니, 더 친할 수밖에 없겠지.”
“...왜, 왜 그런 쓸쓸한 짓을 해?”
가이난도는 믿기 힘들다는 듯이 반응했지만, 사실 이한이 제대로 짚은 게 맞았다.
밀레이 교수는 닐리아의 방식을 높게 평가했다.
‘평소부터 친밀감을 쌓았군.’
태도는 좀 자신감이 부족했지만, 저 정도로 친해진 정령은 명령을 거절하지 않았다.
훌륭한 방법이었다.
“위대하신 정령 님! 저는... 켁!”
“제발 한 번만 도와주시면... 큭!”
닐리아가 쌓은 정령과의 친밀감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공손하게 넙죽 엎드리면 된다고 생각한 학생들이 우르르 발생했다가 쫓겨났다.
밀레이 교수는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저런...’
“이한. 네 차례야.”
“아. 그래.”
이한은 각종 강화 마법을 걸고 허공에 물 구슬을 띄우기 시작했다.
담담히 작업하는 그 모습에, 먼저 소환되어 있던 다른 정령들이 벌벌 떨며 주인 뒤로 숨어들었다.
밀레이 교수는 아까와는 다른 답답함을 느꼈다.
물론 저것도 방법 중 하나긴 했지만, 이번 시험은 저런 걸 원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