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바이샤다는 헛다리를 짚는 잉걸델 교수의 모습에 어이없어했다.
아니...
“진짜 아무런 조언도 안 했습니다...”
“아닙니다. 바이샤다 씨의 가르침은 저희에게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이한의 말에 바이샤다는 눈을 크게 떴다.
고맙긴 했지만 당황스러움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너희 내가 가르치기도 전에 거인의 머리털 잘라 놓은 상태였잖아!’
물론 바이샤다가 조언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저번에 이한 일행과 같이 사냥에 나가서 이런저런 가르침을 줬던 것이다.
근데 그건 사냥에 필요한 가르침이었지 거인의 머리털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누가 들으면 바이샤다가 조언해준 덕분에 거인의 머리털을 잘라온 줄 알 것 아닌가.
“너무 겸손하실 필요 없습니다. 바이샤다 씨.”
“맞습니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잉걸델 교수는 물론이고 그엣세까지 존경의 시선을 보냈다.
거인의 신발을 몰래 훔쳐오는 것과, 거인의 머리털을 잘라오는 건 전혀 이야기가 달랐다.
후자는 거인을 상대해서 이기지 않으면 절대로 쉽게 가지고 올 수 없었다.
그런데 그걸 신입생들이 해내다니.
잉걸델과 그엣세가 존경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당연했다.
“......”
그엣세에게 존경의 시선을 받아보고 싶긴 했었다.
하지만 절대 이렇게는 아니었다!
‘기분이 복잡하군...’
바이샤다는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 *
과제를 제출하고 평가까지 마친 이한은 부츠의 끈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는 강화 마법을 스스로에게 걸었다.
“???”
더르규는 친구의 갑작스러운 마법 시전에 당황했다.
“왜 그러나? 이한?”
“더르규. 그럼 다음에 보자.”
이한은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하도 빨리 달려 나가서 더르규와 지젤은 튀어나간 뒤에도 상황 파악이 늦었다.
“대체 뭔...”
“더르규! 어떻게 우리한테도 말을 안 할 수가 있어!”
‘아차.’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배신감 가득한 얼굴로 찾아오자 더르규는 그제야 이한이 왜 달려 나갔는지 깨달았다.
이한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과 같은 탑도 아닌 이상 자리를 피하면 만날 일이 없었다.
굳이 남아서 상대하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저런 개새끼...”
“나, 나쁜 뜻은 없었을 거다.”
* * *
기말고사 주간도 어느새 절반이 지났다.
‘조금만 더 지나면 다들 언데드하고 구분이 안 되겠군.’
이한은 친구들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친구들의 상태는 살가죽만 없었다면 스켈레톤 전사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한. 커피가 끝났어.”
요네르는 ‘제국이 멸망했고 지옥의 대악마가 관문 앞에 도착했어’같은 말을 하듯이 비장하게 속삭였다.
물론 빈 커피 깡통을 들고서 그런 말을 해봤자 비장하게 들리진 않았다.
“그렇군.”
“설탕도 떨어졌고... 지금 생각보다 떨어진 게 많아.”
“으음.”
이한도 같이 푸른 용의 탑 식료품 창고를 관리하는 만큼 알고 있었다.
물론 식사에 쓸 식재료, 고기가 든 통조림이나 각종 양념과 야채들은 아직 넉넉했다.
이한도 끼니를 학교에서 나오는 식사로 때우고 싶지 않았던 만큼 우선적으로 관리했던 것이다.
하지만 커피나 차(茶) 같은 기호식품, 혹은 간식류는 이야기가 달랐다.
다른 식량보다 양이 넉넉하지도 않은데다가 시험 기간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이 무지막지하게 먹어댔으니...
최근에 나가서 과자 가게를 반쯤 털어왔는데도 거덜날 정도로 그 소모가 빨랐다.
‘하긴 네 탑 학생들이 동시에 먹었으니 거덜나는 게 이상하진 않군.’
“이한. 이렇게 된 이상 학기 종료를 기념하는 케이크를 지금 꺼내자. 산 사람은 살아야지. 굶어 죽을 수는 없잖아.”
가이난도가 옆에서 비장하게 말하는 걸 무시하고 이한은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냥 참는 수밖에 없지 않나? 아침, 점심, 저녁만 먹으면...”
이한은 그렇게까지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반쯤 공황 상태에 빠졌다.
“세상에!!”
“신이시여! 어떻게 이런 일이!!”
“이건 교장 선생님의 음모가 분명해!”
‘이 자식들은 다른 탑 학생들이 어떻게 사는지 경험해봐야 할 것 같은데.’
“워, 워다나즈. 커피는? 커피도 없어? 뜨겁게 끓인 다음 설탕을 듬뿍 넣은 커피가 없으면 내 시험은 파멸하고 말 거야.”
“치커리나 민들레 뿌리를 써서 대체해보는 건?”
다른 식물의 뿌리를 볶은 다음에 물에 넣고 끓이면 커피 비슷한 맛이 나는 음료가 됐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실제로 그렇게 해서 즐기곤 했고.
그러나 이한의 말에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 그런 걸 먹을 수가 있나?”
“농담 아니지?”
“......”
옆에서 가이난도가 물었다.
“앞으로 다른 탑 학생들한테는 안 나눠주면 안 돼?”
“하지만 (돈을 낸다는데) 안 줄 수는 없잖나.”
이한의 말에 가이난도는 살짝 감동받은 표정을 지었다.
많이 양보해서 검은 거북이 탑까지는 그렇다 쳐도 재수 없는 흰 호랑이 탑 놈들은 왜 식료품을 나눠주나 싶었는데, 확실히 이한은 그릇이 넓었다.
저런 재수 없는 놈들한테도 저렇게 선뜻 손을 내밀다니.
가이난도는 코밑을 쓱 훔쳤다.
‘나도 본받아야지.’
“그래. 네 말이 맞아. 이한.”
“오.”
이한은 놀란 듯 가이난도를 쳐다보았다.
가이난도 성격이라면 ‘아무리 돈을 내도 그렇지 그딴 놈들한테는 주지 마!’라고 떼를 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면 어떡하지 이한?”
“아까 말했잖아. 참고 하라고.”
“응? 뭘 참고해?”
“그냥 참고 공부하라고.”
“...으응...”
* * *
“워다나즈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버두스 교수의 기말고사 시험을 위해 방패를 만지작거리던 이한은 랫포드의 방문에 의아해했다.
“혹시 물어볼 부분이라도 있나? 어떤 강의에서 막혔지?”
“아. 그건 괜찮습니다.”
“벌써 공부를 다 한 건가?”
“아뇨. 하지만 세상에는 시험보다 중요한 게 많잖습니까.”
“?”
이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게 있나?
“그보다 이걸 봐주십시오.”
랫포드는 품속에서 지도를 꺼냈다. 본관 2층의 어딘가로 향하는 지도였다.
“이건... 주방인가?”
“예. 식료품 창고와 연결된 주방입니다.”
랫포드는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이걸 같이 터시죠. 워다나즈 님.”
“랫포드...”
방금까지는 ‘공부 하기 싫어서 별 짓을 다 하는군’하고 생각했던 이한이었지만, 랫포드의 이런 배려에는 솔직히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푸른 용의 탑에서 기호식품이 떨어졌다는 걸 알고 이렇게 학교 내의 주방을 찾아와주다니.
“고맙다. 우리 탑의 기호식품이 바닥난 걸 알고 이렇게 배려해주다니.”
“예? 식량이 바닥나셨습니까?”
랫포드는 놀란 눈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도 놀랐다.
“몰랐나? 잠깐. 그러면 이건 왜 갖고 온 거지?”
“예? 그야... 위치를 알았으니 남이 가져가기 전에 털어야지요?”
“......”
이한은 다른 의미로 감탄했다.
진짜 등산가는 그저 산이 거기에 있기에 오르는 것처럼, 진짜 도둑은 그저 훔칠 만한 게 거기에 있기에 일단 훔치는 것이다.
그게 시험 기간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손가락이 근질거리면 행동에 나선다!
“2층이면... 나쁘지 않긴 하군.”
3층이나 4층이면 이한도 조금 고민을 했을 것이다.
마법학교의 3층부터는 방문할 때마다 온갖 변화가 일어나 순진무구한 학생들을 엿먹였던 것이다.
하지만 2층은 그런 변화가 비교적 드물었다.
가는 방법만 안다면 밤에 빠르게 들어가서 털고 나올 수 있었다.
“좋아. 기분 전환 할 겸 오늘 밤에 갔다 올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져갈 수도 있으니까요.”
“다른 사람들? 누가 알고 있지?”
“아. 투탄타와 친구들이 알고 있습니다. 아마 그 녀석들도 노리고 있을 겁니다.”
“그래? 같이 찾은 건가? 공교롭게 됐군.”
“그건 아닙니다. 투탄타가 찾은 걸 제가 훔쳐서 갖고 나온 겁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지.”
이한은 밤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냥 출발하기로 했다.
괜히 밤에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과 마주치면 서로 오해만 쌓일 것 같았다.
* * *
요네르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더 데리고 와도 되지 않아?”
“일단 많이 갖고 올 필요가 없는데다가...”
어차피 학기가 끝나 가는데 많이 갖고 올 필요도 없었다.
“...밖으로 새어나가서 좋을 일이 아니거든.”
“??”
요네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쪽인가?”
“예.”
“잠깐. 랫포드. 보폭을 맞춰. 밖으로 나가면 투명화가 풀린다.”
지금 이한은 투명화 마법을 증폭시켜서 사용하고 있었다.
록 드레이크를 상대하면서 깨달은 방법.
첨탑지기의 목걸이와 함께 <고나달테스의 투명 망토>를 시전하면 투명화 마법의 범위가 늘어나는 것이다.
물론 만능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영역에서 벗어나면 바로 투명화가 풀렸다.
달칵!
랫포드는 순식간에 자물쇠를 따더니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 이한은 자신이 맞게 찾아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안에서 은은한 음식 냄새가 풍겨왔던 것이다.
‘운이 좋군.’
비교적 가까운 본관 2층에, 별다른 경비나 방어 장치도 없는 창고라니.
이 정도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수준의 행운이었다.
‘하긴.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이 정도는 받아도 괜찮지.’
“눈이여. 암흑을 꿰뚫어라.”
이한은 암흑 시야 마법을 걸고 주방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안쪽 구석에 옆 식료품 창고와 연결된 문이 있었다. 이한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빠르게 털기 시작했다.
커피가루가 든 깡통부터 시작해서 설탕, 연유, 꿀, 찻잎 등 지금 필요한 것들이 차곡차곡 배낭에 쌓였다.
배낭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자 이한은 랫포드의 심정이 이해가 갈 것 같았다.
‘확실히 돈 주고 사는 것보다 밤에 들어가서 훔치는 게 더 즐겁긴 하군.’
게다가 이 식료품들이 해골 교장이 돈주고 산 물건이라고 생각하자 즐거움이 두 배로 늘어났다.
“다 됐다.”
“나도 끝났어.”
“저도 끝났습니다.”
“가자!”
마법학교에서 배운 게 있다면, 목적을 이뤘으면 미적거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한은 망설이지 않고 돌아섰다.
“!!”
주방을 빠져나와서 복도로 걸어 나가려는데 반대쪽에서 익숙한 얼굴의 친구들이 나타났다.
살코 패거리를 본 이한은 아주 조금 미안해졌다.
‘그래도 아직 남은 게 많으니까 괜찮겠지.’
상당히 양심적으로 턴 덕분에 안에는 살코 패거리가 가져갈 식료품도 넉넉히 남아 있었다.
게다가 이한과 요네르는 랫포드의 지휘에 따라 프로처럼 쓸어담았다.
뒤늦게 도착한 살코는 누군가 먼저 왔다 갔다는 걸 눈치채지도 못할 것이다.
슥-
투명화 마법 덕분에 살코 패거리는 이한 일행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주방 안에 들어갔다.
그 순간 안에서 강렬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철커덕!
“!!”
“?!”
주방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히자 안에서도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황급히 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문은 소리만 요란하게 날 뿐 열리지 않았다.
‘함정이 있었구나!’
이한은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본관 2층에 별다른 감시나 마력이 없어서 안심했는데 이런 함정이 있었을 줄이야.
역시 에인로가드에서는 절대로 방심하면 안 됐다.
“왜 작동한 거지?”
“침입자의 숫자가 일정 이상이면 작동하는 함정 같군.”
실로 악의적인 함정이었다.
2, 3명이 들어올 때는 눈치를 못 채다가 친구들을 불러오는 순간 갇히게 되는 함정!
이한은 투명화 마법을 잠깐 멈추고 문에 가까이 접근했다. 랫포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와주실 겁니까?”
“아니. 확인만 하는 거다.”
미안하지만 지금 도와주려고 했다가는 같이 잡히는 수가 있었다.
이한은 도망치기 전에 어떤 식의 마법인지만 알아두려고 했다.
앞으로 언제 이런 마법을 만나게 되도 대응할 수 있도록.
‘흐름과 구성이 대충...’
철커덕!
손을 가까이 가져다 대는 순간 문이 열렸다.
덕분에 안에서 문을 열려고 시도하던 살코 패거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
“......”
이한은 단호하게 말했다.
“구하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