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고... 고맙다.”
살코는 일단 감사의 뜻을 표했다.
“워다나즈. 고맙다.”
뒤에 있던 살코의 다른 패거리도 감사의 뜻을 표했다. 몇몇은 울먹일 정도였다.
방금 전만 해도 이대로 꼼짝없이 갇히게 될 줄 알고 절망에 빠져 있었는데 갑자기 이한이 찾아와 구해줬으니 감동받을 만도 했다.
놀랍고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얼떨떨해하면서 감사 인사를 하고 나자 살코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런데 왜 워다나즈가 여기에 있지?
“그런데 워다나즈. 여기에는 무슨 일로...?”
“지금 여기서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니다. 빨리 움직여야 해! 추격자가 언제 쫓아올지 모른다!”
“맞, 맞는 말이군.”
이한이 다급하게 속삭이자 살코는 바로 납득했다.
함정이 발동한 이상,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교장의 하수인들이 언제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탈출해야 했다.
“이쪽으로!”
“중앙 계단보다는 좌측 계단으로 내려가자! 중앙 계단에는 숨을 곳이 없어!”
“알겠다! 모두 다 빨리...”
다행히 1학년 학생들은 한 치의 막힘도 없이 발빠르게 움직였다.
모두 다 밤에 돌아다녀 본 적 있는 학생들인 만큼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워, 워다나즈! 앞에서 소리! 누군가 온다!”
“옆의 강의실로 들어가라! 투명화 마법을 시전하겠다!”
1층까지 내려왔을 때 복도 앞쪽에서 말소리와 함께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이한은 곧바로 방향을 틀어 옆의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강의실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이한은 방심하지 않았다.
“망토여, 나를 삼켜라!”
투명화 마법이 증폭되자 이한은 모두 바짝 붙게 만들었다.
살코는 자기 머리 위에 팔꿈치를 올리는 이한의 모습에 인상을 찡그렸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지? 주방인가?
-2층이군.
-누가 건드린 건가?
-아마 신입생들이겠지. 안타까운 일이야. 에인로가드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거늘...
데스 나이트들은 안타깝다는 듯이 대화를 나누며 발걸음을 옮겼다.
비교적 가기 쉬운 본관 2층에, 별다른 경비나 방어 장치가 없는 주방과 식료품 창고라니.
에인로가드에서는 오히려 더 의심을 해야 했다.
-그래도 징벌방에 몇 번 가면 배우겠지.
-맞는 말일세. 다 그러면서 성장하는 것 아니겠는가.
“......”
“......”
강의실 안에 숨어 있던 학생들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방금 저승 문턱을 밟고 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정말로 고맙다. 워다나즈.”
“됐다. 감사를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니까. 이만 가도 되겠지? 지금 서로 뭉쳐 있어서 좋을 게 없을 것 같군.”
이한은 배낭을 묵직하게 채운 식료품들을 들키지 않기 위해 표정을 관리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살코와 패거리들이 지금은 감사하고 있어도, 이한 일행이 먼저 털었다는 걸 알고 난 뒤에도 그럴지는 알 수 없었다.
‘일단 갈라지고 나면 나중에 의심 가더라도 어쩌겠어.’
“워다나즈...”
“정말 다른 푸른 용의 탑 놈들하고는 차원이 다르군.”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그렇게 도와주고 나서도 생색을 내지 않는 이한의 모습에 모두 깊게 감명 받았다.
만약 다른 푸른 용의 탑 학생이었다면 가문이니 핏줄이니 명예니 들먹이면서 한 삼십 분은 잘난 척을 했을 것이다.
‘명예로운 사람은 선행을 할 때 자신의 명예를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일이 선하기 때문에 한다고 했지. 과연 그 말이 틀리지 않는구나!’
검은 거북이 탑에서 가장 거칠고 괄괄한 학생도 워다나즈의 명예는 부정하지 못했다.
“워다나즈. 보답으로 알려줄 게 있다.”
“꼭 지금 해야 하나?”
이한은 그냥 빨리 나가고 싶어서 문을 힐끗거렸다.
이 자식들이 부담스럽게...
‘설마 눈치 챈 건 아니겠지.’
“지금 해야 한다.”
“알겠다. 말해봐라. 대신 빠르게 말해라.”
“우레걸음 교수님을 알고 있겠지?”
“당연히.”
쉴 때마다 텃밭에 가서 잡일까지 하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이한의 대답에 살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어제 우리 탑 학생 한 명이 목격한 일이다. 한밤중에 우레걸음 교수님이 히드라를 데리고 들어오시더군.”
“...내가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피곤해진 모양이군. 잘못 들은 것 같아. 뭘 데리고 들어왔다고?”
“히드라.”
“......”
이한은 인상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히드라.
아홉 개의 머리와 강력한 재생능력, 지독한 맹독 등을 가진 몬스터.
온갖 사납고 위험한 몬스터들이 널려있는 제국에서도 히드라는 상위권에 들어가는 놈이었다.
그런데 그걸 우레걸음 교수가 데리고 들어왔다고??
‘말이 되나?’
원래라면 잘못 본 거라고 했겠지만 이한은 그러지 않았다.
너무 말이 안 되니 오히려 믿음이 갔던 것이다.
에인로가드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다 자란 놈은 아니었다고 한다. 아마 새끼인 모양이던데.”
“새끼라니 정말 다행이군! 다 자란 놈이었으면 상대할 자신이 없었는데, 새끼라면 상대할 자신이 샘솟는데?”
“그게 정말인가?”
“...당연히 농담이지.”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빈정거렸는데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살코도 자신이 어이없는 소리를 한 걸 알았는지 얼굴을 붉혔다.
“진지하게 말해서 착각했군. 어쨌든 워다나즈 네가 연금술 강의를 듣고 있는 걸 안다.”
“그렇지.”
“흑마법, 소환 마법, 환상 마법, 부여 마법, 예지 마법, 변환 마법, 치유 마법도.”
“...그걸 굳이 다 말할 필요는 없지 않나?”
“어쨌든 미리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다. 다른 강의 시험도 준비하고 있을 테니, 하나라도 미리 알고 있으면 좋겠지.”
옆에서 듣고 있던 요네르가 중얼거렸다.
“알아도 딱히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 * *
“히드라... 히드라와 관련 있는 시험이 대체 뭘까.”
돌아오는 길.
원하는 걸 다 챙긴 만큼 마음도 기뻐야 했는데, 묵직한 배낭처럼 무겁기만 했다.
요네르나 랫포드도 심각한 표정이었다.
“히드라를 잠재우는 물약일수도 있어.”
“히드라를 광폭하게 만드는 물약일지도 모릅니다.”
“전자는 그렇다 쳐도 후자는... 아니겠지 설마.”
아무리 에인로가드가 에인로가드여도 그렇지 학생들 모인 시험 장소에서 히드라를 미치게 만드는 물약을 먹일 리 없지 않은가.
...아마!
“히드라 재생 억제의 물약? 히드라 맹독 해독의 물약?”
“그렇게까지 하진 않으시겠지 설마...”
요네르는 이한의 살벌한 예측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보다 재료로 쓰시려고 갖고 온 거 아닐까? 목표로 하는 물약 재료에 히드라의 생피 같은 게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과연. 그럴듯합니다.”
랫포드도 그럴듯하다는 듯이 동의했다.
그러나 이한은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우레걸음 교수님이 시험 난이도 올린다고 하셨는데 너무 쉽지 않나?”
“쉽진 않지.”
“안 쉽습니다.”
“아니야. 저건 좀 쉬운 것 같군.”
“......”
“......”
요네르와 랫포드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네가 잘 말해봐.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잠깐.”
강화 마법으로 예민해진 청각 덕분에 이한은 멀리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를 알아차렸다.
바로 옆의 강의실로 들어가서 숨을 죽이자, 데스 나이트들이 다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를 지나갔다.
-누군진 몰라도 용케 빠져나갔군. 절반으로 나눠서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번 신입생들은 아주 영리한 모양이야.
-내가 보기엔 신입생들이 아닌 것 같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어도 그렇지, 봉인문에 손을 대는 순간 마력이 전부 빨려나갔을 텐데.
-하긴. 봉인문이 풀릴 때까지 마력을 부어버린 걸 보니 신입생이 할 일이 아니긴 하지. 고학년들이 뭐하고 있는지 보러가야겠군.
“......”
이한은 속으로 다짐했다.
앞으로는 정말 그럴듯한 먹이가 눈앞에 나타나도, 돌다리를 수십 번 정도는 두드려보고 건너겠다고.
* * *
“난 널 믿어. 마로니에.”
<기초 탈 것 훈련> 기말고사.
요네르는 밤색 털을 가진 말의 목을 껴안고 속삭였다.
“힘내자. 그랑엠페니얼가이난도임페라토르.”
“연습한 대로만 하면 돼. 알겠지?”
다른 학생들도 하나둘씩 자기가 한 학기 동안 돌봐온 말에게 말을 걸었다.
시험을 앞둔 만큼 목소리에는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폰리그.”
푸흐흥!
이한이 말을 걸자 폰리그는 기대했다는 듯이 눈빛을 반짝거렸다.
칭찬에 인색한 주인이지만 이번에는 분명...
“다른 말 공격하지 마라.”
...푸히히히히힝!!
폰리그는 화를 버럭 내며 발굽으로 흙은 날리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가이난도가 흙을 한 움큼 먹고 퉤퉤 뱉어냈다.
“봐라. 이렇게 성질을 부리니까 내가 걱정하는 거잖나.”
푸힝! 푸히힝! 푸히히힝!
폰리그는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울어댔다.
애초에 그리폰은 고고한 야수였다.
고고한 야수가 저주를 받아서 말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이 의심하는데 당연히 화내지!
“그래그래. 내가 잘못했다. 어쨌든 내가 말하기 전에는 다른 말들 공격하지 마. 알겠지?”
‘말하기 전에는?’
요네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의 털을 빗질해줬다.
그러는 사이 드넓은 부지 공터에 작업을 끝낸 번개걸음 교수가 손을 탁탁 털며 나타났다.
“다들 한 학기 동안 고생 많았다. 말과 친해지면서 많은 걸 배웠길 빈다. 말처럼 마법사를 도와주는 동물은 흔치 않다. 한 번 친해지면 배신하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도와주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친우지. 강의가 끝나고 데리고 다니면서 함께하도록.”
“!!”
“감사합니다!”
친해진 말을 선물 받은 학생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한은 폰리그를 쳐다보았다. 폰리그는 왜 그러느냐는 듯이 순한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얘는 말이 아니지 않나?’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하던 도중 번개걸음 교수가 이한을 보며 물었다.
“방학 도중에도 마구간에 나오는 건 어떠냐?”
이한은 기겁했다.
“예???????!!?”
“농담한 거니까 그렇게 정색하지 마라.”
‘아차.’
이한은 반성했다.
하도 터무니없는 말에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방학 때 마구간으로 나오라는 건 당연히 농담이었지만, 폰리그를 돌보는 이상 방학 때도 손이 좀 갈 거다. 그리폰은 꽤 성가신 동물이거든.”
폰리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푸흥댔다. 이한은 그 모습에서 좀 다른 게 걱정됐다.
“방학 도중에 저주 풀리는 건 아니죠?”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아마. 어쨌든 도움이 필요하거나 폰리그가 놀 만한 널찍한 곳이 필요하면 에인로가드 마구간으로 와라. 이번 방학에는 학교에 있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물론 이한은 방학 도중에는 절대로 에인로가드에 얼씬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예 에인로가드 방향 쪽으로는 숨도 쉬지 않으리라.
“자. 그러면 슬슬 시작해볼까.”
번개걸음 교수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공터를 승마용 채찍으로 가리켰다.
곳곳에 설치된 장애물들.
중간고사가 그냥 질주였다면 기말고사는 이 장애물들까지 같이 뛰어넘어야 했다.
난이도가 제법 높아보였지만 학생들은 의외로 침착했다.
한 주 내내 다른 기말고사를 보다 보니 이제 이 정도 시험은 가소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정도면 기분 전환이지.”
“맞는 말이다.”
게다가 다른 강의는 몰라도 <기초 탈 것 훈련> 강의에는 자신감이 넘치는 학생들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말을 타온 만큼 다들 마음속에 ‘다른 놈들보단 내가 낫지’하는 자부심이 있었다.
“요네르. 출발 신호 나와도 앞서서 달려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왜?”
이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번개걸음 교수가 출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출발선에서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이 번개처럼 말을 몰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다그닥다그닥-
퍽!
가장 앞에서 달려 나가던 학생 한 명이 옆에서 날아온 물줄기를 맞고 나가떨어졌다.
“......”
“이럴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