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어제 주방을 털다가 갇힐 뻔한 사건은 이한에게 교훈이 되었다.
에인로가드에서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
‘물대포가 날아올 줄은 몰랐군.’
설치된 장애물만 얌전히 뛰어넘으면 된다니.
너무 쉽지 않은가.
이한은 당연히 추가적인 함정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덕분에 에인로가드에서 감히 방심하고 달려나간 학생들만 호된 맛을 보고 있었다.
“워다나즈! 너무하...”
“워다나즈가 쏜 게 아니야!”
“아. 그래?”
“......”
“교수님! 정령이 잘못 소환됐나봐요!”
“내가 설치한 거니까 잘 피해보도록.”
“예? 그게 무슨...”
“떠들 시간에 집중하는 게 좋을 텐데. 떨어지면 감점이다.”
기세 좋게 출발했던 학생들은 우왕좌왕하며 속도를 줄이고 흩어졌다.
무작정 빨리 달리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괜히 속도를 올렸다가 기습이라도 받아서 낙마하면 손해가 더 컸다.
“이쪽으로 모여! 이쪽 길로 가자!”
“함정 없는 거 맞아?”
“방금 이쪽은 괜찮았어! 여럿이 모여서 한 번에...”
화르르륵!
“외우려고 하지 마라. 그렇게 쉽게 배치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교수님!!”
머리끝이 타버린 학생은 황당하다는 듯이 번개걸음 교수를 쳐다보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장애물에 진심이란 말인가.
그냥 뛰어넘을 수 있는 허들을 세워놓으면 안 된단 말인가?
“다들 이쪽으로.”
이한은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탈 것 훈련 강의는 기본적으로 집단을 만들어서 통과하는 게 유리했다.
덩치가 커지면 밖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버티기 쉬워지는 것은 물론이고, 마법사의 손이 늘어나는 건 쓸 수 있는 마법도 늘어난다는 것.
“서두르지 말고, 속보(速步) 정도로만 가자고. 아산. 왼쪽은 네가 맡아. 요네르. 오른쪽을 부탁할게. 닐리아. 뒤를 부탁해.”
“나는 앞이야?”
가이난도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아니. 넌 그냥 내 옆에 있다가 말하면 마법 써라.”
“과연. 만약을 대비한 비장의 카드 같은 거구나. 맞지?”
“......”
“...으, 으응.”
친구들은 가이난도의 긍정적인 자세에 감탄했다.
“가자. 한 번 늦어지면 따라잡기 힘들어.”
이한과 친구들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출발했다.
그걸 본 번개걸음 교수는 속으로 높게 평가했다.
‘짧은 시간에 잘 짰군.’
말을 타고 다른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는 건 평지에서 맨몸으로 호흡을 맞추는 것과 전혀 달랐다.
거친 말을 다루면서 서로서로 속도를 맞춰야 하는 만큼 말을 잘 다루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간의 이해도 중요했다.
같은 탑 학생들도 아닌데 저렇게 순식간에 합을 맞추다니.
“오른쪽!”
마력의 흐름을 느낀 이한이 먼저 말하자 요네르는 바로 물약을 꺼냈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마법을 시전했다가는 실패할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는 미리 만들어놓은 물약이 더 안전했다.
쨍그랑!
물약병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날아오던 매직 미사일이 흩어졌다.
‘<하급 마법 무효의 물약>이군.’
“왼쪽!”
아산은 기다렸다는 듯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아까부터 준비했던 만큼 마법은 무사히 시전되었다.
강한 바람과 함께 날아오던 진흙 덩어리가 궤도를 틀었다.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은 이한이 굳이 말해줄 필요도 없었다. 먼저 눈치 챈 닐리아가 바로 화살을 날려 떨어뜨렸다.
‘시작이 좋다!’
‘이대로라면...!’
친구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완벽한 호흡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일체감!
촤아아악!
그러나 위기는 이제 막 시작일 뿐이었다.
뒤에서 녹색 안개가 퍼지면서 날아들었다.
활로 쏘아서 떨어뜨리거나 갖고 있는 마법으로 막을 수 없는 장애물이었다. 닐리아의 손이 순간 멈췄다.
“증발하라!”
닐리아가 대응하지 못하는 것 같자 이한은 즉시 지팡이를 휘둘렀다. 녹색 안개가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걸 본 번개걸음 교수는 깜짝 놀랐다.
‘증발을?!’
물 원소 속성의 심화 영역인 증발 속성.
어렵고 난해한 영역인 만큼 당연히 1학년 학생이 다룰 만한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말 위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거리가 있는 안개를 한 번에 날리다니.
새삼스러웠지만 정말 볼 때마다 놀라웠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조금도 쉬지 않고 마법을 탐구하는 저 학구열은 정말...
파파파파파팍!
“!!!”
이번에는 아산 쪽에서 위기가 닥쳤다.
열 개가 넘는 마력의 구(球)가 동시에 날아들자 긴장해버린 것이다.
“흙이여... 콜록, 콜록!”
고도의 집중을 필요로 하는 만큼 전투에서 마법 사용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노련한 마법사라도 마법 전투를 전문적으로 훈련 받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실수를 저지를 수 있었다.
지금이 전투 상황은 아니었지만 1학년 학생을 실수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방패여, 펼쳐져라!”
이한은 빠르게 물을 불러내 길쭉한 방패 형태로 변환시켰다. 그 위로 마력의 구체가 내리꽂히면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물약 다 썼어!”
가이난도가 다급하게 외쳤다. 다른 쪽을 막고 있는 사이 요네르 방향에서도 공격이 날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번쩍여라!”
번개까지 날려서 공격을 막아내자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잠시 숨 돌릴 시간이 찾아오자 이한은 친구들에게 말했다.
“다들 고생했다. 모두 힘을 합친 덕분에 돌파할 수 있었군.”
“......”
“......”
“......”
“다들 왜 그러지?”
“아, 아무것도 아니야.”
친구들은 손을 흔들었다.
...그냥 워다나즈 혼자 달렸어도 뚫었을 것 같은데...
* * *
시간이 지나자 곳곳에서 돌파에 성공한 학생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장애물들이 많다 하더라도 계속 들이받다 보면 막는 실력이 늘 수밖에 없었다.
“속도를 더 올려!”
리치몬드 가문의 샤일스는 팔을 크게 휘둘러 신호를 보냈다.
본인도 뛰어난 기수(騎手)인데다가 샤일스와 같이 움직이는 친구들도 탑 내에서 승마 실력으로는 손꼽히는 친구들.
쉴 때는 말을 타고 격구를 즐길 정도로 말에 자신 있는 학생들인 만큼 두각을 드러내는 것도 당연했다.
이한 일행이 단단하게 진형을 갖추고 정공법을 선택했다면 샤일스 일행은 속도를 빠르게 올려 돌파를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운 없는 한둘은 이탈하겠지만, 그 정도는 감안할 생각이었다.
‘이번 강의에서 최고 성적을 받겠다!’
말발굽이 빠르게 지축을 연타하는 소리와 함께 샤일스는 달려 나갔다.
곳곳에 장애물이 널려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속도를 올리는 건 보통 실력과 배짱으로는 불가능했다. 확실히 샤일스는 뛰어난 기수였다.
“반환점이다!”
‘드디어!’
샤일스는 멀리서 보이는 반환점을 찍고 돌아갈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그 순간 땅속에서 묵직한 진동과 함께 거대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
먼지가 사라지기도 전에 뒤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히드라다!”
“뭐?! 히드라?!”
학생들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먼지가 사라지고 나자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히드라가 아니었다.
그건 그냥 평범한 모래문어였다.
“다, 다행이다. 히드라가 아니었어.”
“다행은 아니지!”
거대한 덩치를 가진 모래문어는 절대로 만만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물론 히드라와 비교하면 맹독도 없는데다가 훨씬 덜 사나운 몬스터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콱!
모래문어의 긴 다리가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모래가 풀썩 피어오르며 시야를 가렸다.
“내가 아끼는 몬스터니까 공격하지 마라!”
뒤에서 번개걸음 교수가 흐뭇해하며 말했다.
비싼 사료 먹여가며 키운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교수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으어억악!”
따지려던 학생 한 명이 문어의 다리에 휘감겨서 그대로 끌려갔다.
“따질 시간에 빨리 반환점이나 찍고 빠져나올 생각부터 해라.”
“히드라가 아니었군.”
뒤늦게 도착한 이한은 반환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덩치 커다란 몬스터가 아래에서 튀어나오길래, 저번에 들었던 히드라 생각부터 했던 것이다.
“워다나즈! 히드라가 아니잖아! 이런 속임수를 쓰다니!”
다른 쪽에서 들려오는 항의에 이한은 실수라고 대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산과 가이난도가 먼저 대답했다.
“속은 놈이 어리석은 거다!”
“경쟁에서 남을 믿는 놈들이 어딨어! 그런 안일한 마음이니까 지는 거지!”
“크윽...! 이 자식들!”
“......”
이한은 둘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오해를 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반환점을 찍고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최대한 빨리 해야 한다.’
시간을 끌수록 옆에서 시선을 끌어주는 다른 학생들이 줄어들어서 난이도가 올라갔다.
“아지랑이여!”
검은 거북이 탑 학생 중 한 명이 환상 마법에 재능이 있었는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용케 환상을 불러냈다.
상태가 썩 좋은 환상은 아니었다. 형태가 뭉개져있고 선명하지도 않아서 자세히 보면 누가 봐도 환상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난장판인 상황에서는 얼핏 속기 쉬웠다. 하물며 상대는 몬스터 아닌가.
촤아아악!
그러나 모래문어는 환상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그대로 다리를 뻗어 학생 한 명을 붙잡아 가버렸다.
“!”
그 모습에 이한은 깨달았다.
‘시각으로 감지하는 게 아니다!’
환상 마법에 대해서 꽤나 혹독하게 배운 만큼 이한은 환상 마법도 여러 계열로 나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방금 같은 환상은 시각을 이용하는 환상 마법.
열로 주변 공기를 일그러뜨리거나 냉기로 공기를 얼려서 환상을 만들어내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었다. 실제로 모래문어는 몸을 절반 정도 땅에 파묻고 있는 상태였다.
‘지나치게 시야가 좋다 했더니 역시...’
땅 위에 울리는 진동으로 적의 접근을 눈치 채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런 계열의 환상은 의미가 없었다.
‘파하이트의 환상 마법은 통하지 않는다. 방법은...’
이한은 <고나달테스의 투명 망토>와 투명화 목걸이를 사용할 준비를 했다.
열로 환상을 만드는 파하이트의 환상 마법과 달리, 고나달테스의 투명 망토나 투명화 목걸이는 인식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계열의 환상 마법이었다.
“망토여, 나를 삼켜라!”
“워다나즈. 말 위에서 보조를 맞추는 건 무리야!”
“알고 있다. 한 명씩 돌파하자. 다른 사람들은 시선을 끌어!”
여럿이서 한 번에 돌파하는 대신 이한은 나눠서 돌파하는 걸 선택했다.
시간이야 좀 더 걸리겠지만 그게 안전했다. 투명화 마법의 영역은 말을 탄 친구들까지 전부 포함시킬 정도로 넓지 않았다.
“가자!”
이한은 요네르와 함께 출발했다. 다른 친구들은 혹시라도 모래문어가 의심하지 않도록 흩어져서 시선을 끌었다.
후우우욱!
“!”
모래문어가 갑자기 몸을 부풀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한과 요네르는 긴장했다.
쉬이이이이이익!
무언가 심상찮음을 느꼈는지 모래문어가 거센 바람을 내뿜기 시작했다.
모래가 섞인 바람이 폭풍처럼 학생들을 휘감았다. 갑작스러운 돌풍에 시야를 확보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큰일났다!’
이한 본인은 버티더라도 요네르가 탄 말은 갑작스러운 모래폭풍에 당황해서 허둥대고 있었다.
투명화에서 벗어나는 순간 모래문어가 접근을 눈치 챌 터.
이한이 힘으로라도 요네르의 말을 묶어놓으려는 순간, 뒤에서 도움이 찾아왔다.
가이난도였다.
“가려워져라!!!”
기세 좋게 저주 마법을 날린 가이난도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폭주했다.
미친듯이 달려나오는 가이난도의 모습에, 모래문어는 다른 학생들에게 관심을 끊고 가이난도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건방진 저주 마법이 모래문어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다.
“가이난도...!”
이한은 정말로 놀랐다.
가이난도가 흑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이렇게 활약할 줄이야.
“이한!”
“알겠다! 네가 시선을 끄는 사이 빠르게 통과...”
“살려줘!!! 이 말 자식이 말을 안 들어!!!”
가이난도는 그 말을 남기고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아니 끌려가버렸다.
“......”
간신히 말을 진정시키고 돌아온 요네르가 이한에게 물었다.
“가이난도가 뭐라고 외치지 않았어?!”
“내가 시선을 끌 테니까 빨리 돌파하라고 하더군.”
“!?”
요네르는 깜짝 놀랐다.
그럴 리가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