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이상하다?’
가이난도가 희생이라니.
아무리 고난이 사람을 바꾼다지만 이렇게 바꿀 수가 있나?
요네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한은 친구가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빨리 움직여야 해. 요네르! 시간이 없어!”
“아... 맞아. 그랬지. 응!”
가이난도의 돌진은 생각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저주 마법이 유독 효과적이었는지, 아니면 건방진 질주가 심기를 거슬렀는지, 모래문어는 반환점을 단단히 지키고 있던 몸을 일으켜 가이난도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래문어를 공격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라고 했던 번개걸음 교수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 모래문어를 어떻게든 끌어낸 것이다!
“도발하는 것도 실력이지. 훌륭하다!”
가이난도의 말은 쫓아오는 모래문어의 다리를 피해 신들린 것처럼 달려 나갔다.
“살려줘!!”
“가이난도가 뭐라고 하는 거지?”
“안 들려! 나중에 묻고 달려!”
“지금이 기회다, 친구들!!”
이한 일행은 물론이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다른 탑 학생들도 전력을 다해 말을 몰아댔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이한은 친구들의 말에게 마법을 시전했다.
“충만해져라!”
오고닌의 충만한 만족감 마법을 당한 말들은 사방에서 모래 섞인 바람이 날아드는 상황에도 침착함을 유지했다.
푸흐흥!
폰리그는 왜 자신은 안 해주냐는 듯이 투덜댔다.
“달려! 놈이 돌아오면 위험하다!”
다그닥다그닥!
사방에서 벌어지는 데드 히트.
반환점을 가장 먼저 찍은 학생이 점수를 높게 받을 테니, 경쟁은 살벌할 정도로 치열했다.
쿵!
이한은 옆에서 달려드는 검은 거북이 탑 학생과 충돌했다. 폰리그가 분노에 찬 으르렁소리를 냈다.
“참아라. 폰리그.”
“워다나즈. 비겁하다고 하진 않겠지. 경쟁인 만큼 물러서지 않겠다!”
“알겠다.”
이한은 바로 지팡이를 휘둘러 물 구슬을 날려버렸다.
설마 이렇게 전력질주를 하면서 마법까지 시전할 수 있을 줄은 몰랐던 검은 거북이 탑 학생은 그대로 탈락해버렸다.
푸히힝...?!
폰리그는 전력으로 달리는 와중에도 황당해했다.
나는 공격하면 안 되는데 주인은 된단 말인가?
* * *
늦게 돌아온 가이난도는 모래투성이가 된 옷을 털어대며 외쳤다.
“야 이 비겁한 배ㅅ...”
“감탄했다. 친구들을 위해서 몬스터를 혼자 유인하다니.”
번개걸음 교수는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가이난도는 즉시 대답했다.
“...힘들었지만 황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존귀한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건 확실히 이한한테 배운 것 같은데.’
요네르는 가이난도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저렇게 순발력이 좋지는 않았었다.
주변에 보고 배울 사람이 누가 있나 생각해봤더니 한 명 뿐이었다.
“고맙다. 가이난도.”
“덕분에 통과했어!”
“네가 그렇게 희생할 줄은 몰랐는데!”
다른 탑 학생들도 우르르 몰려와서 고마워했다.
혼자서 모래문어를 끌어냈으니 안 고마울 수가 없었다. 평소에 재수없다고 싫어하던 학생들도 와서 감사인사를 할 정도였다.
가이난도는 가슴 벅찬 표정으로 친구들을 한 번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쉬운 선택은 아니었지.”
“근데 아까 뭐라고 했던 거야?”
“뒷일을 잘 부탁한다고 했지.”
“그렇게 긴 말이었나...?”
뒤에서 가이난도가 떠드는 사이 이한은 번개걸음 교수에게 성적을 확인했다.
“만점이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이 다 잘 했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아까 왜 모래문어를 히드라로 착각한 거냐?”
이한은 멈칫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우레걸음 교수님이 히드라를 데리고 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뭐? 그래?”
번개걸음 교수는 정말로 놀란 것 같았다.
교수도 알지 못했다는 사실에 이한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뭐지?’
“그게 정말이라면 용케 데리고 왔군. 원래도 그랬지만 요즘은 더 구하기 힘들 텐데. 한 번 보여 달라고 해볼까?”
“교수님께서도 모르셨습니까?”
“못 들었다. 아마 나한테 조언을 듣기 귀찮아서 그랬겠지.”
제국에서 이름 높은 탐험가인 만큼 번개걸음 교수는 온갖 몬스터와 동물을 다루는 데에 능했다.
당연히 우레걸음 교수가 히드라를 데리고 왔다면 키우는 방법에 대해서 온갖 조언을 할 생각이었다.
“혹시 우레걸음 교수님께서 왜 데리고 오셨는지 짐작 가십니까?”
“글쎄? 내가 녀석의 모든 걸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고. 물약 연구에 필요해서 아닐까?”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연구 외에는 크게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우레걸음 교수가 몰래 히드라를 데리고 왔어도 그건 우레걸음 교수의 일이지, 번개걸음 교수의 일은 아닌 것이다.
물론 히드라를 잘 키우는지 못 키우는지 그게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혹시 기말고사에 히드라와 관련된 문제가 나올 수도 있을까요?”
이한은 물으면서도 번개걸음 교수가 ‘그럴 리가 있겠냐?’ ‘그건 말도 안 된다’라고 대답해주길 바랬다.
“오! 그 생각은 못 해봤는데.”
그러나 번개걸음 교수는 좋은 생각을 했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럴 수도 있겠군.”
“......”
이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히드라 데리고 오는 날에 대기하고 있다가 기습을 했어야 했는데.’
방심한 대가를 이렇게 치르게 될 줄이야!
* * *
우레걸음 교수는 팔짱을 끼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학생들을 기다렸다.
“왔냐?”
“안녕하세요. 교수님.”
“오늘 네가 볼 시험은 네 영혼을 파괴할지도 모른다.”
“......”
“힘내라!”
들어온 학생이 째려보고 들어갔지만, 우레걸음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만큼 만든 시험이 스스로를 도취시켰던 것이다.
해골 교장이 ‘이건 좀 심하지 않나?’하기 바로 전 수준으로 아슬아슬하게 맞춘, 심혈을 기울인 기말고사 시험문제.
이거라면 중간고사나 기말 전 과제를 끝내고 ‘나, 이제 연금술이 뭔지 좀 알 것 같아’하는 건방진 신입생들의 영혼을 산산조각 낼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이한이 굳은 얼굴로 들어왔다. 우레걸음 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만점 받지 말라고 낸 과제를 만점 받은 탓에 시험 난이도를 올려버린 제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과연 그 제자도 스스로의 운명을 직감했는지 얼굴이 굳어 있었다.
“저번보다 시험이 꽤 어려워졌을 거다.”
“짐작하고 있습니다.”
이한은 한숨을 참으며 말했다.
대체 교수들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학생들이 시험을 잘 보면 좋은 일 아닌가?
‘교수가 잘 가르쳐서 잘 본 건데, 대체 왜 자존심이 상하는 걸까?’
“그래. 바로 그렇다. 크크크...”
“......”
우레걸음 교수는 너무나도 즐거운 탓에 졸업 후에 제자가 암살하러 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잊어버리고 웃어댔다.
이한은 우레걸음 교수를 빤히 쳐다보며 다음에는 밤에 복면을 두르고 기습해보겠다고 다짐했다.
‘대체 히드라를 어떻게 쓰시려는 걸까?’
오기 전에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고 오면서도 이야기를 나눴지만 정말로 짐작이 가지 않았다.
-히드라를 사냥해서 그 독을 물약의 재료로 써야 하는 거 아닐까?
-미쳤냐?!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 히드라를 제압하거나 설득해서 독을 빌리는 걸 거야.
-그것도 충분히 미친 소리거든.
-시, 시험은 사실 히드라하고 아무 상관없는 거 아닐까? 그럴 수도 있잖아.
-너 에인로가드 마법사 맞아? 어떻게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해?
-히드라에게 재료 얻어내야 하는 건 확실할 것 같은데.
-히드라가 재료를 지키고 있을지도...
“각오하고 있으니 알려나 주십시오.”
“그래. 시작해볼까.”
우레걸음 교수는 앞으로 걸어갔다.
학생들은 긴장 섞인 시선으로 교수의 다음 동작을 기다렸다.
대체 무슨 시험일까?
기욜라의 단사(丹沙) 물약
이르준덴의 밤안개 물약
아우룸의 영혼 증폭 물약
도브룩의 유홍(硫汞) 물약
...
...
칠판을 가득 채운 물약들의 이름.
그 중에는 처음 들어본 물약들도 많았다.
우레걸음 교수는 압도된 학생들의 반응을 즐기며 말했다.
“이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게 아니다. 오늘 강의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여기 물약들을 가능한 전부 제출해라.”
하나같이 손이 많이 가고 까다로운 물약들.
그 중에는 다른 물약들을 조합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물약도 있었다.
한마디로 절대 다 만들 수 없으리라고 생각해서 늘어놓은 물약 리스트!
정말 작정하고 낸 시험이었다.
우레걸음 교수는 빙글거리며 이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 당황했는지 뛰어난 제자도 머뭇거리고 있었다.
“교수님?”
“왜 그러지?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라.”
“히드라는 안 나옵니까?”
“히드라? 무슨... 아니, 잠깐! 네가 그걸 어떻게?!”
우레걸음 교수는 깜짝 놀랐다.
다른 교수들, 특히 번개걸음 교수가 보지 못하도록 밤에 몰래 데리고 왔는데 어떻게 안단 말인가?
“우연히 목격했습니다.”
“이런 바보 금 같은... 그래. 봤다면 어쩔 수 없지. 큰 마음 먹고 탈탈 털어서 샀다. 나중에 돌볼 때 도움을 받을지도 모르겠군.”
히드라의 독을 꾸준히 뽑아내고 싶었지만, 다 큰 히드라는 너무 비싸고 관리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우레걸음 교수는 어쩔 수 없이 새끼 히드라를 샀다.
적당히 키우면 얼추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을 테니까.
“그게 다입니까?”
“뭐라고? 지금 설마 내가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몰래 들여왔다고 의심하는 거냐? 절대 아니다! 다 허가 받고 한 일이다.”
우레걸음 교수는 이한이 이상한 오해를 할까봐 단호하게 말했다.
밖에서 히드라를 데리고 오는데 해골 교장한테까지 숨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뜻이 아니라...”
“?”
“시험에 히드라가 나오는 게 아니었습니까?”
“히드라가 시험에 왜 나오냐?”
우레걸음 교수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1학년 연금술 시험에서 왜 히드라가 나오겠는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긴 그렇군요.”
“그렇지?”
이한은 납득한 얼굴로 자리에 돌아갔다.
우레걸음 교수는 히드라 이야기를 하느라 정작 시험에 대한 소감은 듣지 못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이런. 아쉽게 됐군.’
연금술의 심오함과 위대함 앞에 무릎 꿇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끼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
탁탁탁-
이한은 배낭에서 물약을 빠르게 꺼내서 늘어놓았다.
하나 같이 다 만들기 힘든 물약들이었다.
게다가 질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마치 연금술사 공방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처럼.
‘아니...?!’
우레걸음 교수는 경악했다.
이한이 무슨 수를 써서 밖에서 물약을 구해왔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고작해야 두세병 정도 더 남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다.
들여올 방법도 마땅치 않고 금화도 없는 학생이 어떻게 저렇게?
우레걸음 교수가 충격을 받아서 말도 못하는 사이, 이한은 차근차근 작업을 진행해나갔다.
가마솥 밑에 불을 지피고, 지금 갖고 있는 재료들로 만들 수 있는 물약들부터 만들고...
‘운이 좋군.’
대체 히드라가 어떤 식으로 나와서 난리를 칠지 걱정했는데, 아무 상관이 없었다니.
덕분에 시험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걸 대비해서 각종 물약을 쓸어 담아오지 않았던가.
완성된 물약들 세 개를 조합하고 지팡이를 휘두르자 이르준덴의 밤안개 물약이 완성됐다.
“정말 다행이지 않나? 히드라가 나오지 않다니. 걱정 많이 했는데 안심이군.”
“이한. 교수님이 노려보셔.”
요네르는 우레걸음 교수의 시선을 느끼고 속삭였다.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교수님은 수염 끝까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