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학교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292화 (292/687)

292화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한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괜히 선량한 노기사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한 님께서는 방학 때 무얼 하실 예정이십니까? 만약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이 알라르롱이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일단... 공부를 해야겠지.”

이한은 폰리그가 잔뜩 짊어진 책들을 보며 말했다.

방학을 준다고 ‘아, 안심하고 푹 휴식을 취하란 소리구나’하면 안 됐다.

방학을 준다는 건 ‘쉬는 건 네 자유지만 알아서 공부해와라 안 해오면 버리고 간다’에 가까웠다.

특히 에인로가드처럼 가혹한 학교의 경우 교수가 ‘여기까지는 공부해왔겠지? 그럼 알고 있다고 치고 넘어가겠다’라고 할 가능성이 높았다.

강의를 적게 들었어도 놀기 조심스러운데, 이한처럼 강의를 많이 듣는 학생은 공부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훌륭하십니다.”

이한의 절박한 속마음을 모르는 알라르롱은 깊게 감명 받았다.

제국 대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가 이한처럼 성실하고 근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방탕하거나 게으른 자들이 더 많았다. 가문이란 환경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한은 단 한 번의 느슨한 모습도 없이 성실히 마법에 전념하고 있으니...

‘역시 이한 님은 워다나즈 가문의 핏줄에 어울리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한 님. 젊은 동도들끼리 한 곳에 모여서 절차탁마하는 것은 단순히 공부뿐만 아니라 서로 알고 사교하기 위해서기도 합니다. 공부도 좋지만, 방학을 공부로 다 보내기에는 아깝지 않겠습니까?”

“물론 다 생각이 있지.”

이한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알라르롱의 얼굴이 또 한 번 밝아졌다.

“금화를 모을 생각이다. 그랑덴 시라면 단기라도 일할 자리가 제법 있겠지.”

“...?”

알라르롱은 이한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

전혀 예상 밖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알라르롱은 부하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부하 기사들은 훨씬 젊은 만큼 이한의 말뜻을 더 잘 이해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저희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마법사만이 쓰는 비유 아닐까요?

-정말로 금화를 모으시려는 것 아닙니까?

-알라르롱 님 앞에서 허튼 소리 하지 마. 이한 님께서 왜 그런 짓을 하시겠나?

“그... 렇군요. 훌륭하십니다.”

“고맙군. 경.”

알라르롱은 요즘 젊은 마법사들의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는 눈치 없는 노기사가 되고 싶지 않아서 일단 응원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다른 것도 예정에 있지 않으십... 니까?”

“다른 예정?”

이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부와 금화 말고는 딱히 생각해놓은 게 없었던 것이다.

“그, 친우 분들과 사교 활동을...”

“아.”

그 말에 이한은 뒤늦게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들도 만나야지.”

알라르롱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만약 모임이나 연회를 열고 싶으시다면 언제든지 말해주십시오. 워다나즈 가문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준비해놓겠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알라르롱의 말에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한이 친구들을 만나려는 이유는 빌려준 돈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         *         *

그랑덴 시의 자택에 도착한 이한은(푸른 용의 탑 학생들의 화려한 마차 행렬로 성문 앞에 구경꾼들이 몰리자 이한은 먼저 빠져나왔다) 일단 휴식부터 취했다.

부드럽고 푹신한 침대 위에서 숙면을 취하고 일어나니 갑자기 마법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이 긴 악몽처럼 느껴졌다.

물론 꿈은 아니었다.

이한은 일어나서 장부에 적힌 은화의 액수를 눈으로 어림했다.

대충 계산해 봐도 제국 금화 스무 닢은 충분히 될 것 같았다.

스스로의 장사 능력에 대해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액수였다.

‘...아니. 정신 차리자.’

순간 제국 관료가 아닌 제국 상인을 목표로 해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이한은 바로 정신을 차렸다.

한 학기 동안 금화 스무 닢을 벌었다는 건 어마어마한 수입이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마법학교 특유의 폐쇄적인 상황 덕분이었다.

당장 2학년만 되어도 이런 장사는 하기 힘들어질 터.

‘겸손해야 한다. 건방지게 나섰다가는 패가망신할 수 있어.’

그렇다 하더라도 제국 금화 스무 닢이라는 액수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작지 않은 땅덩어리를 가진 농부가 일 년 내내 열심히 일해야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금화 한 닢인데...

“아침 식사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이한 님.”

하인이 밖에서 말했다. 이한은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간단하게 요기할 정도면 된다. 랫포드는 혹시 일어났나?”

“예. 이한 님께서 기침하시면 말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미안하군. 불러주겠나? 아. 잠깐.”

이한은 나가려는 하인을 붙잡고 물었다.

“어제 그랑덴 시의 백양문으로 들어왔는데, 혹시 성문 근처에 있던 작은 잡화점을 아나? 제법 북적거리던데...”

“예.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만약에 그 잡화점을 사려고 한다면 얼마 정도가 필요할 것 같나?”

하인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답했다.

“못해도 제국 금화 이백 닢은 들지 않겠습니까?”

이한은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 몸에 힘을 줘야 했다.

손꼽히는 대도시인 만큼 쌀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겨우 그 정도 되는 크기의 잡화점이...

‘내가 건방졌군.’

기껏해야 저만큼 벌고서 스스로 상인을 해도 되겠다고 자부하다니.

부끄러울 뿐이었다.

“이한 님?”

“...그렇군. 답해줘서 고맙다.”

하인이 돌아가고 나서 머지않아 랫포드가 들어왔다.

저택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영 어색했는지 랫포드는 이한을 보자 반색하며 쪼르르 달려왔다.

“워다나즈 님!”

“잘 쉬었나?”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좀...”

“곧 익숙해질 거야. 일단 아침부터 먹자고.”

간단하게 차려달라고 했지만 하인들이 갖고 온 식사는 생각보다 푸짐했다.

살짝 매콤하게 양념이 된 달걀을 잘라서 입에 넣은 뒤 이한은 한숨을 푹 쉬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별 거 아니다. 나중에 작은 가게라도 하나 사놓으면 어떨까 싶었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더군.”

이한의 말에 병에 든 찬 우유를 마시던 랫포드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뭘?”

“제게 금화를 확보해오란 게 아니었습니까?”

“...랫포드. 마법학교 밖에서 절도는 범죄다.”

사실 안에서도 범죄였지만 이한은 그 정도는 정상참작이 된다고 생각했다.

같은 도적이라 하더라도 동기와 목적에 따라 의적이라고 불릴 때가 있지 않던가.

해골 교장을 상대로 하는 도둑질은 이한 생각에 의적이 맞았다.

이한의 말에 랫포드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게... 하지 말라는 겁니까? 아니면 들키지 않게 잘 하라는 겁니까?”

“하지 말라는 거다. 랫포드. 내가 무슨 일을 부탁한다면 비유를 쓰지 않고 아주 구체적으로 부탁할 테니, 절대 섣불리 나서지 말도록.”

“예.”

랫포드는 살짝 시무룩해졌다.

도둑질을 할 기회를 보여주지 못하다니.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한은 밥이 담긴 그릇을 깔끔하게 비웠다.

에인로가드에 있을 때는 동부풍 식사를 차리기 힘들었는데, 덕분에 꽤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지 유난히 맛있었다.

랫포드는 버터 바른 토스트 한 조각을 끝내고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에 안 맞나?”

“아,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정말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군.”

“그... 워다나즈 님이 차려주셨던 게 더 맛있었던 같은...”

랫포드의 말에 이한은 웃었다.

친구의 칭찬이 기뻤던 것이다.

“고맙다. 하지만 그건 에인로가드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그런 거다. 그 상황에서는 뭘 먹어도 더 맛있을 수밖에 없지.”

원래 굶고 먹으면 뭐든지 더 맛있기 마련.

그렇지 않다면 이한이 한 요리가 저택의 요리사들이 한 요리보다 맛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습니까?”

“그런 거지.”

이한의 말에 랫포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완전히 납득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정말 더 맛있었던 것 같은데...’

“난 식사하고 잠깐 나갈 것 같은데. 오늘 일정이 있나?”

“어디 가십니까?”

“은화를 받아낼 생각인데.”

랫포드가 살짝 기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훔치러 가는 게 아니라 받으러 가는 거야.”

“예. 그래도 같이 가겠습니다.”

랫포드는 아쉬워했다.

*         *         *

달카드 가문의 아산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긴장하고 있었다.

“가문의 자제분이 에인로가드에 입학했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랑덴 시에 위치한 달카드 가문의 저택은 꽤 역사가 길었고, 그만큼 저택에서 지내는 가문의 사람들과 손님들도 많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오늘 모임이 있어 그랑덴 시의 신분 높은 사람들이 손님으로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상황상 어제 에인로가드에서 나온 가문의 학생이 화제에 올라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인로가드 출신이라니. 달카드 가문의 이름이 한층 더 빛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느 학파의 마법을 전공하는지 궁금하군요. 오늘 연주를 듣고 나서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도록 하시죠.”

‘살려줘.’

아산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여기 모인 그랑덴 시의 유명인사들 앞에서 실수라도 한다면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집중해.”

아산의 형, 다이할이 다가왔다.

주름 하나 없는 정장을 차려입은 다이할은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한여름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사람이었다.

“넌 여전히 실수가 많아. 아까 인사할 때 한 박자 늦었지. 그리고 대답할 때는...”

아산의 누나이자 다이할의 쌍둥이인 하이단도 다가왔다.

다이할과 마찬가지로 용이 도시 위에 나타나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커프스 단추에 먼지가 붙어있는데 모르다니. 네가 그러니까 실수가 많은 거야. 열일곱달하고도 나흘 전에 네가 했던 실수를 생각해봐.”

“네가 계산을 실수한 탓에 망신거리가 됐지.”

“정말 끝자리 하나 틀린 건ㄷ...”

“조용히 해.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이니까 자꾸 실수를 하는 거야.”

아산은 형과 누나의 질책에 입을 다물었다.

저 둘이 실수라도 하면서 저러면 반박이라도 하겠는데, 본인들부터가 워낙 완벽한 사람들이니 아산은 그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다이할은 제국 관료로 발탁되어서 빠르게 출세하고 있었고 하이단은 동부의 청동 드워프 은행에 취직해서 까다로운 드워프들을 감탄시키고 있었으니...

“그러니까 탑에서 수석도 차석도 차지하지 못하지.”

“제가 못한 게 아니라 수석과 차석이 너무 잘한...”

“조용히 해. 자꾸 변명하지 말고.”

“아산 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두들겨 맞던 아산을 구해준 건 가문의 하인이었다.

손님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아산은 일단 기뻐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날 핑계가 생긴 것이다.

“형님! 누님! 친구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왜 기뻐하는 거 같지?”

“그... 그야 친구가 찾아왔는데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

“......”

다이할과 하이단은 미덥지 못한 동생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동생의 친구가 찾아왔다니 내가 나가서 맞이해야겠군.”

“나도 같이.”

“예?! 제가 해도 됩...”

“조용히 해. 저택에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는 건 네 의무가 아닌 내 의무다.”

아산은 울상이 되어서 둘의 뒤를 따라갔다.

‘제발 가이난도 말고. 제발 가이난도 말고.’

둘의 성격상 찾아온 친구가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 아산을 미친듯이 쪼아댈 가능성이 높았다.

아산은 제발 가이난도 말고 다른 친구들이 먼저 찾아왔기를 빌었다.

“안녕하십니까.”

“!!!”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에 아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가장 믿음직스러운 친구가 먼저 방문해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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