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뭐지? 함정인가?’
이한은 아산 대신 가문의 다른 연장자가 나오자 멈칫했다.
설마 아산이 빌린 은화를 갚기 싫어서 이런 수를 쓰는 것일까?
‘아니. 아산이 그렇게 악한 녀석은 아니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아산은 그렇지 않더라도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비겁한 수를 쓸 수 있었으니까.
귀족이라고 모두 다 정정당당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명예를 진심으로 숭배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한처럼 명예는 적당히 체면치레 정도로만 여기는 이들도 있는 법.
귀족의 명예를 지키면서도 돈을 갚지 않는 방법은 제법 많았다.
예를 들어 이한의 태도를 트집삼아서 ‘손님으로 오신 분이 이런 무례를 저지르시다니. 이만 돌아가십시오!’하고 축객령을 내리면 이한은 빌린 돈을 내놓으란 말을 하기도 전에 밀려나게 됐다.
그렇게 되면 일이 상당히 귀찮아졌다.
이한도 워다나즈 가문 출신인 만큼 저택 앞에서 ‘달카드 가문은 빌린 은화를 갚아라!’라고 시위할 수 없는 것이다.
귀족적인 방식은 이제 거액일 경우 직접적이고 거칠게, 이한처럼 소액일 경우는 상대의 체면을 깎고 명예에 망신을 주는 식으로 소문을 퍼뜨리는 것인데...
‘달카드 가문이 망신을 당하든 말든 나한테는 은화 한 닢 안 돌아오는 게 문제다.’
서로가 불행한 결말.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상대한테 책잡힐 일 자체를 피하는 것.
“안녕하십니까.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이라고 합니다.”
이한은 최대한 공손하게, 격식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본 다이할과 하이단의 엄격한 얼굴이 아주 살짝 부드러워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너무 짧은 사이라 주변에 있던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지만 이한은 달랐다.
해골 교장도 인정한, 괴팍한 에인로가드의 교수들의 감정까지 파악 가능한 눈치의 천재!
‘일단 첫인상은 통과했나보군.’
상대방이 만족한 것 같았지만 이한은 방심을 풀지 않았다.
아직 상대의 속셈을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워다나즈 가문의 마법사를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달카드 가문의 다이할입니다.”
“달카드 가문의 하이단입니다.”
이한은 두 쌍둥이와 악수를 나눴다. 둘의 손은 건조했고 차가웠다.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신 만큼 에인로가드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시고 계시겠군요.”
“아닙니다. 가문의 핏줄이 꼭 능력을 보장해주는 건 아닐 뿐더러, 에인로가드에는 워낙 뛰어난 학생들이 많으니까요.”
두 쌍둥이의 얼굴이 다시 조금 굳었다.
워다나즈 가문이라는 제국 명문가 출신이면서 저런 약한 말을 하다니.
혹시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닌가 의심이 갔다.
“그렇습니까? 실례지만 워다나즈 가문의 마법사보다 뛰어난 학생이 누군지 궁금하군요. 어떤 학생들입니까?”
“어.”
이한은 말문이 막혔다.
그야 학년수석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지나친 겸손의 폐해!
‘젠장. 실수했나.’
“?”
이한이 대답이 없자 두 쌍둥이의 미간에 가벼운 주름이 잡혔다.
그러자 아산이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형님. 누님. 워다나즈는 학년수석입니다.”
“그게 정말이야?”
“아주 훌륭한 친구를 사귀었구나.”
다이할과 하이단은 오늘 처음으로 ‘부드럽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표정이 풀렸다.
엄격한 두 사람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아산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워다나즈가 수석을 한 게 그렇게 기뻐하실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평소에는 안 그러시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네가 괜찮은 친구를 사귀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건데.”
“평소에 매번 실수를 하니 기뻐할 일이 없는 거야. 네가 평소에 제대로 했으면 되잖아.”
옆에서 듣고 있던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음. 상당히 미친 사람들이군.’
약간 실례일 수도 있었지만 동생을 저렇게 쪼아대는 걸 보니 제정신 같아보이진 않았다.
모습을 보아하니 왜 둘이 나온 건지도 짐작이 갔다. 동생의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가이난도보다 먼저 와서 정말 다행이군.’
이한은 아산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
“여기 이 분은...”
다이할은 랫포드를 보며 물었다.
분위기에 압도된 랫포드가 쭈뼛거리며 입을 열려고 하자 이한이 먼저 선수를 쳤다.
“이쪽은 랫포드. 탑에서 제일가는 학생입니다.”
“!”
다시 한 번 다이할과 하이단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훌륭한 친구를 사귀었구나.”
“많이 배우고 정진하도록 해.”
“제 1 응접실이 지금 비어있을 텐데, 거길 쓰도록 해.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부르고.”
두 쌍둥이는 다시 한 번 이한과 랫포드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만족스러워하며 물러났다.
랫포드가 당황하며 물었다.
“전 탑 수석이 아닌데요?”
“제일가는 도둑이란 뜻이었어. 가자.”
“......”
랫포드와 아산은 이한을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이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 * *
“...그러니까 저러시는 거다.”
“저런.”
아산의 자세한 설명을 추가로 듣고 나자 이한은 안타까워했다.
‘잠깐. 분위기가 돈 언제 받나 물어볼 분위기가 아닌데.’
아무리 이한이 빨리 돈 받고 다음 저택으로 가고 싶어도 ‘너무 잘난 형님과 누님 때문에 내 인생이 고통스럽다’라고 말하는 친구 앞에서 용건을 꺼낼 정도는 아니었다.
“미안하다. 워다나즈. 사실 이런 고민은 나만 겪는 게 아닐 텐데. 워다나즈 너도 비슷하지?”
대귀족 가문이라고 모두가 다 행복하고 편안한 건 아니었다.
가문의 역사만큼 무거운 명예와 책임이 태어날 때부터 두 어깨에 올라가 있는 만큼, 가문의 자제들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한이 보기에는 상당히 배부른 소리였다.
가문 내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게 낫지 가문 없이 치열하게 경쟁하지도 않는 놈들이 무슨...
그리고 무엇보다 이한은 아산과 사정이 달랐다.
“아니. 우리 가문은 서로에게 별 관심이 없어서.”
“그래? 하긴 워다나즈 가문은 좀 특이한 편이니.”
대귀족 가문들 중에서 워다나즈 가문처럼 제국의 정치나 사교에 무관심한 가문도 드물었다.
오로지 마법에만 모든 관심을 쏟아 붓고 있는 외골수 가문.
“그런데 아산. 빌린...”
“아! 난 어떡해야 하지? 워다나즈? 형님과 누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도와줘. 워다나즈. 너라면 분명 100% 확실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거야.”
“......”
이한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말을 돌렸다.
“오늘 저택 살롱에서 모임이 있다고 했잖나. 거기에서 네 능력을 보여주면 되겠지.”
다른 마법학교 학생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한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절대로 에인로가드 학생들보다 뛰어나지는 못할 거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무리다.’
아산의 마법 실력이라면 모임에 찾아온 손님들을 감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면 아산의 형과 누나도 동생의 실력에 만족할 것이고...
...이한도 빌린 돈을 받아 떠날 수 있으리라.
“과연. 모임에서. 좋은 생각이야.”
“사실 그보다 더 좋은 건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치는 거지.”
“농담 고맙다. 워다나즈. 덕분에 자신감이 생겼어.”
‘농담 아니었는데.’
* * *
도시의 유명인사들이 살롱에서 모인다고 해서 딱히 기상천외한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사실, 나오는 다과와 음료만 제외한다면 탑의 휴게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주자들이 실내악을 연주하고(탑의 휴게실에서는 학생들이 배가 고프다며 노래를 불렀다), 잘 차려입은 귀족들은 자리에 앉아 체스를 두거나 카드게임을 하고(탑의 휴게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도시에서 있었던 흥미로운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이번에 새로 구한 보석 지팡이입니다. 저 말고도 세 명이나 더 달려든 물건이라 꽤나 애를 먹었지만, 그럴 보람이 있었지요.”
“요즘 아마드의 시세가 좀 많이 올라가서 걱정입니다. 공방에 의뢰를 맡겨놨는데 더 높은 값을 부르면...”
‘친숙하군.’
얻은 물건 자랑하고 최근 걱정거리 이야기하는 것까지 탑의 학생들과 똑같았다.
“앗. 혹시 에인로가드의 학생분들이십니까?”
이한과 아산, 랫포드가 모습을 드러내자 손님 중 몇몇이 시선을 던졌다.
마침 방학 기간인데다가 달카드 가문의 핏줄이 에인로가드에 입학했다는 말을 들었던 만큼 호기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맞습니다.”
“이거 영광입니다! 저는 구운이라고 합니다. 조촐하지만 주단(紬緞)과 포목(布木) 장사를 하고 있지요.”
엘프, 구운의 말은 겸손에 가까웠다. 작게 옷감 장사를 하는 사람은 절대 구운처럼 차려입을 수 없었다.
문양이 새겨진 비단과 손목에 찬 장신구.
얼마나 부유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부자로군.’
그리고 이한은 부자를 좋아했다.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이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한은 아까처럼 호감을 사기 위해 가식적인 미소를 던지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한은 볼 수 있었다.
상대의 눈동자에서 불꽃처럼 번쩍이는 두려움을.
“워... 워다나즈 가문...! 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이한은 속으로 한탄했다.
그저 친해지고 싶었던 것뿐인데 워다나즈 가문의 이름만으로 이런 결과라니!
그래도 이한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아직 미약하지만, 혹시 마법과 관련해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사실 이건 크게 의미가 없는 제안이었다.
물론 에인로가드의 1학년 학생 정도만 되어도 밖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떠돌이 마법사들보다는 훨씬 실력이 탄탄했다.
마법사는 극히 귀한 직종이었고, 덕분에 불꽃 하나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자기가 마법사라고 으스대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여기 모임에 참가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그런 떠돌이가 아닌 제대로 된 마법사를 부를 능력이 있었다.
즉 이한의 제안은 정말로 마법의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달란 게 아니라, 그걸 핑계로 서로 친하게 지내자는 뜻에 가까웠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젠장. 텄군.’
물론 상대의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이한은 씁쓸해했다.
“에인로가드 학생이라고요?”
이한과 친구들은 고개를 돌렸다.
한눈에 봐도 상대가 마법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상대 주변의 마력 흐름이 다른 곳과는 달랐던 것이다.
“맞습니다.”
“신입생이라고 들었는데, 실력을 한 번 확인해 봐도 될까요?”
만약 다른 자리였다면 이한은 가문을 내세우든 뭘 내세우든 해서 ‘네가 뭔데 건방지게 날 시험하려고 하나 나한테 금화라도 준 적 있나 네가 교수냐’하며 밟아버렸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안 그래도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 앞에서 마법 실력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고맙군.’
원래 이런 것도 그냥 할 수 없었다.
이한이 먼저 ‘신사숙녀 여러분 이쪽을 보십시오 에인로가드 출신들이 뭔가 보여 드리겠습니다’같은 방식으로 하면 체면과 명예가 깎였으니까.
이렇게 상대방이 먼저 ‘이름을 들었습니다, 실력 한 번 보고 싶습니다’이렇게 해줘야 못 이기는 척 ‘그럼 한 번’하고 나서는 것이 정답!
“아직 미력한 실력이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무슨 일이지?”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이 마법을 보여준다더군.”
“오늘 커다란 행운이 따랐군. 이런 걸 보게 될 줄이야.”
주변에 있던 손님들도 하던 대화나 놀이를 멈추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준비된 상황.
‘그런데 상대는 누구지?’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밸러 가문의 도인이라고 합니다. 저는 발드로가드에서 마법의 진전을 전수받았습니다.”
“아.”
“음.”
옆에서 손님 중 한 명이 감탄사를 뱉었다.
“발드로가드! 제국 최고의 마법학교 중 하나 아닌가!”
‘이래서 애교심이 생기나?’
순간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발끈해서 반박할 뻔했다.
마음대로 외출도 가능한 마법학교가 무슨 마법학교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