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아차. 내가 무슨 생각을.’
이한은 바로 정신을 차렸다.
물론 발드로가드의 교육 환경이 에인로가드보다 아주 조금 더 편안하긴 했지만, 그게 꼭 마법 실력과 상관이 있는 건 아니었다.
발드로가드를 졸업한 마법사들도 뛰어난 마법사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졸업생.
고작 1학년인 이한이 얕잡아 볼 상대는 절대 아니었다.
“워다나즈. 난 준비됐어.”
아산은 잔뜩 각오한 얼굴로 속삭였다.
“워다나즈 님. 소매치기가 필요할 때 말해주십시오.”
랫포드도 각오한 얼굴로 속삭였다.
뒤쪽은 사람들이 테이블을 치우고 의자를 밀어내는 등 마법을 볼 준비를 하고 있는 탓에 상당히 분주했다.
“랫포드. 미안하지만 이건 그냥 마법을 시험해보는 거다. 결투가 아니라.”
“하지만 상대의 지팡이가 사라진다면 조금 더 수월할지도 모르잖습니까?”
그 말에 아산이 솔깃해했다. 이한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이상한 방향으로 소란이 흘러갈 거다. 그냥 마법만 쓰면 돼.”
“하지만 워다나즈. 상대가 무슨 마법을 쓸지 알 수 없잖아.”
결투가 아닌, 마법사의 실력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럴 경우에는 서로 전력으로 마법을 날리며 부딪치기보다는 한쪽에서 난제를 내면 다른 한쪽이 마법으로 해결하는 식으로 흘러갔다.
이번에는 저 발드로가드 출신 마법사인 도인이 시험을 내고 이한과 친구들이 해결하는 식이 되리라.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우린 1학년이니까. 상대방도 그걸 감안해서 내겠지. 지나치게 난해한 시험을 내면 스스로의 체면을 깎는 일이 될 거다.”
달카드 가문의 저택에 찾아와서 달카드 가문의 마법사에게 억지로 망신을 줄 리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당장 역풍이 불 테니까.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괜한 실수나 하지 않게 집중하고 있도록. 알겠지?”
아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랫포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안 훔친다니까.”
“옙.”
* * *
이한과 친구들이 발드로가드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진 것에 비해 도인은 에인로가드에 별다른 반감이 없었다.
물론 언제나 제국 제일의 마법학교라는 명성을 차지하고 있는 에인로가드가 조금도 부럽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도인은 그 이상으로 자신이 다닌 발드로가드를 사랑하고 믿었다.
-제국의 사람들이 타성에 젖어 있어서 그렇지, 정말로 제대로 볼 줄 안다면 발드로가드가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마법학교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한이나 다른 에인로가드 마법사들이 듣는다면 바로 결투 신청할 생각이었지만, 적어도 도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만큼 도인은 에인로가드에 별다른 반감이 없었다.
지금 고민하는 것도 저 에인로가드 학생들을 어떻게 망신줄까가 아닌, 어떻게 체면을 살려줄까였다.
‘달카드 가문의 아산은 평판이 꽤 좋은 소년이고, 저쪽은 워다나즈 가문이니 말도 안 되는 실수 같은 건 하지 않겠지?’
이런 자리에서의 마법 실력 확인은 일종의 연극에 가까웠다.
시험을 내는 쪽도 상대방이 통과할 수 있게 잘 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까다롭거나 상대가 낯설어하는 학파의 마법이라도 시험으로 낸다면?
그 때는 바로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싸늘해질 터.
그리고 시험을 낸 마법사는 한동안 달카드 가문과 그 가문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천대받을 게 분명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악몽이었다.
‘어떤 시험이 좋을까...’
도인은 어떤 시험을 내야 저 학생들이 손쉽게 통과하고,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알기 쉽게 감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세 분은 어떤 마법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요?”
“저는 예지 마법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환상 마법이요.”
“저는... 음... 아직 못 정했습니다.”
십 년 넘게 마법을 수련한 마법사도 필요에 따라 학파를 바꾸는데, 마법을 배운지 얼마 안 된 마법사가 학파를 정하지 못한 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도인은 두 학생이 이한을 당황하며 쳐다보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환상 마법과 예지 마법 중에 최대한 쉬운 마법을 골라봐야겠군.’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도인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환상이여, 원소의 사슬로 변하라.”
환상 마법의 장점 중 하나는 그 외관이 화려하다는 점이었다.
농담 같이 들릴 수 있었지만 이건 생각보다 중요한 장점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법을 볼 때 그 안에 담긴 신묘한 마력의 흐름이나 깊은 철학을 보지 않았다. 그냥 겉으로 보이는 걸 봤다.
덕분에 흑마법사가 투자자를 찾지 못해 무덤을 뒤질 때, 환상 마법사는 몇몇 귀족들에게 후원을 받아가며 편하게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장점이 오늘 이 자리에서도 드러났다. 널찍한 홀 공간에 환상 마법이 반짝거리며 모습을 드러내자 곳곳에서 박수와 탄성이 나왔다.
‘너무 느리지 않나?’
그러나 이한은 속으로 의아해했다.
마법학교의 교수들과 비해서 도인의 시전 속도가 너무 느렸던 것이다.
물론 도인 입장에서는 ‘내가 에인로가드 교수들보다 더 빠르게 시전할 수 있다면 교수를 하지’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느리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촤르르륵!
“이 환상으로 된 사슬이 보이십니까? 제 손목을 묶은 수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입니다. 도인 경!”
마법사, 도인은 손목을 들어 올려 연결된 환상 수갑과 환상 사슬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바닥으로 늘어진 환상 사슬은 네 군데에 연결되어 있었고, 그 끝에는 환상 기둥이 자리 잡은 상태였다.
“기둥에 알맞은 원소를 시전하면 하나씩 사슬이 풀릴 겁니다. 과연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께서 저를 구출해낼 수 있을지! 여러분,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다시 박수와 갈채.
도인은 마법 실력보다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화술과 쇼맨십이 더 뛰어났다.
살롱이나 모임에서 다른 이들에게 인기가 좋을 수밖에 없는 마법사였다. 이한도 살짝 감탄했다.
‘마법사가 모임에 나가면 저런 식으로 해야 인기를 얻나.’
확실히 여러모로 교훈이 됐다.
이한이 나중에 필요할 때 따라해봐야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아산이 걱정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워다나즈. 한 번에 성공할 수 있을까?”
“꼭 한 번에 성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도인이 시전한 환상 마법은 일종의 퍼즐이었다.
네 개의 사슬과 연결된 네 개의 기둥.
거기에 이제 알맞은 원소를 시전하면 하나씩 기둥이 풀리고 사슬이 사라졌다.
즉 틀린 원소 마법을 시전해도 다시 다른 마법을 시전하면 된다는 건데...
“하지만 형님하고 누님께서 보고 계시다고.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뭐라고 하실 거야.”
“그러면 네가 해보라고 하면 안 되나?”
아산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한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몇 년 좀 먼저 태어났다고 저렇게까지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다니.’
원래 이런 건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푸는 거였는데 저렇게 눈치를 보다니.
이한은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대귀족 가문으로서의 장점이 있다면 단점도 있는 법. 타인이 뭐라고 할 일이 아니었다.
“한 번에 푸는 방법이 있긴 한데.”
“어떻게?”
“힘으로 부수는 거지.”
이한은 뛰어난 환상 마법사 발도르오른에게 배웠던 파훼법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환상 마법의 구조를 파악하고 그 허점을 찾아 해제하는 게 아닌, 그냥 마력을 강하게 휘둘러 환상 마법 자체를 날려버리는 파훼법.
“그게 가능해?”
“물론 안 될 수도 있어. 구조가 튼튼한 마법은 제법 잘 버티거든.”
“아니. 워다나즈. 내가 말한 건 그럴 만한 마력을 방출할 수 있냐는 거였는데.”
아산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론이야 이해가 갔다. 그 정도 되는 마력으로 치면 마법이 흔들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 마력을 정말 뽑아낼 수가 있나?
“그렇게까지 안 필요해. 이 정도면...”
이한은 아산한테 시범을 보여주기 위해 지팡이를 들고 가볍게 마력을 방출했다.
콰직!
직격하지도 않았는데, 살짝 스친 환상의 사슬이 으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붕괴했다.
그리고 환상의 사슬과 이어진 다른 사슬들도 붕괴했고, 수갑도 같이...
파지지직!
“......”
“......”
시범을 보여주려던 이한도 당황했고 보고 있던 아산도 당황했다.
그리고 도인도 당연히 당황했다.
‘무슨...!?’
환상 퍼즐을 풀라고 했더니 갑자기 지팡이 한 번으로 박살을 내버린 것이다. 사람인 이상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뭘 어떻게 한 거야? 별다른 마법을 시전하는 것 같진 않았는데? 설마 힘으로 무식하게 부수지는 않았을 테고. 내가 모르는 마법을 에인로가드에서 가르쳐 준 건가?’
머리가 복잡했지만 도인은 일단 반응부터 했다.
“훌륭해요! 훌륭하군요! 여러분들도 보셨을 겁니다!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이 한 번에 마법을 해제했습니다!”
구경하고 있던 손님들은 놀라워하며 박수를 쳤다.
그 중에 마법을 조금 아는 사람들은 뭔가 예상과 다른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똑같이 박수를 쳤다.
잘 해결되긴 했으니까!
‘깜짝 놀랐네.’
도인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이 예상 밖의 행동을 해서 반응이 늦어질 뻔했다.
실수라도 했을 경우 분위기가 어떻게 싸늘해졌을지...
“도인 경! 하나만 더 보여주십시오!”
“!”
“!!”
이한도, 도인도 놀랐다.
이미 술을 한 잔 했는지, 살짝 취한 얼굴을 한 사람이 잔뜩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이런 마법을 또 언제 어디서 보겠습니까!”
“맞습니다!”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들이 보여주는 마법을 보니,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입니다!”
흥분한 사람들은 뭐든지 더 보고 싶어하기 마련.
도인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다들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좋... 좋습니다. 그러면 다음 마법으로...”
도인은 다시 한 번 긴장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야 자기 일이 아니니 저렇게 잔을 들어올리며 ‘한 번 더!’를 외쳐댔지만, 시험을 내는 도인은 입안이 바짝 말랐다.
아까보다 똑같거나 더 쉬운 시험을 낼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어려워야 했다.
그리고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어야 했고, 또 아직 어린 학생들이 실수를 하더라도 수습이 될 분위기의 시험이어야 했다.
게다가 학생들이 지금 마력을 많이 소모했을 수도 있으니 도중에 마력 고갈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했고...
“혹시 피곤하거나 어지럽진 않으시죠?”
“예. 괜찮습니다.”
“저도 괜찮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다음 마법을...”
* * *
펑!
네 번째로 소환된 환영 괴수를 이한이 눈 감고 피한 다음 해제시키자 사람들은 다시 환호성을 터뜨렸다.
짝짝짝짝짝짝짝-
‘아, 아니.’
도인은 놀랐다.
솔직히 방금 마법은 하면서도 ‘큰일났다! 너무 어렵게 냈다!’하고 후회가 들었던 마법이었다.
그런데 그냥 저렇게 쉽게 해결해버리다니.
가까이 앉아 있던 귀족 한 명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도인 경. 아무리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라지만 아직 1학년 학생인데 너무 어려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렇게 잘 해결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음 마법! 다음 마법을 보여주세요!”
그러거나 말거나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이한과 친구들이 너무 잘 해결하자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도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너무 잘해서 이 난리가 나고 있잖아! 적당히 잘하라고!’
언제까지 계속 마법을 써야 할지 막막할 정도였다.
도중에 끊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