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해결하면서 머뭇거리거나 지친 기색을 보였으면 사람들도 ‘이제 여기까지 합시다’라고 말을 꺼냈을 텐데, 저 신입생들이 워낙 잘하니 다들 잔뜩 신나서 계속 부추겨대고 있었다.
덕분에 도인만 죽을 맛이었다.
슬슬 마력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데...
“저희 준비됐습니다.”
이한의 말이 지금은 무섭게 들릴 정도였다.
도인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이한에게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뭐지?’
그 시선을 이한이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이한은 생각에 잠겼다.
상대 마법사가 왜 저러는 것일까?
“도인 경. 혹시 몸이 편찮으신 겁니까? 식은땀을 흘리시는데...”
“아, 아닙니다. 괜찮아요. 괜찮아.”
도인은 지팡이를 붙잡고 한숨을 참았다.
이제는 무슨 시험을 내야할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슨... 마법을...’
털썩!
비틀거리던 도인은 결국 주저앉았다. 마력 고갈로 인한 어지럼증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이한이 바로 달려왔다.
아까부터 어디 아픈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반응이 빨랐다. 이한은 도인을 부축하면서 말했다.
“몸이 편찮으신 것 같은데, 미리 말을 해주시지 그랬습니까.”
“으윽...”
도인은 울컥해서 ‘당신이 눈치 없이 너무 잘 해내서 그런 거 아니냐’라고 할 뻔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상대는 워다나즈 가문에 달카드 가문 아닌가.
“저런. 도인 경이 몸도 좋지 않은데 너무 무리한 모양이군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게 됐습니다.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손님들은 걱정 섞인 인사를 하며 훈훈하게 일어섰다.
몇몇 손님들은 이한 일행에게 따로 찾아와서 칭찬을 늘어놓았다.
“훌륭했습니다. 곧 달카드 가문에서 대마법사가 나왔다는 소문이 들리겠군요.”
“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워다나즈 가문의 명성은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실로 감동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졸업한 뒤에 생각이 있으시다면 개인적으로 후원을...”
그 중에는 랫포드에게 개인적인 후원을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걸 본 이한은 살짝 억울해졌다.
‘아니 왜 랫포드한테만?’
물론 이해는 갔다.
저런 후원은 이제 재산 넉넉한 부자들이 재능 넘치지만 가난한 인재들에게 베푸는 것이었다.
부자나 귀족들은 훗날 뛰어난 대마법사가 될 수도 있는 인재에게 미리 빚이나 은혜를 베풀어 줄 수 있었고, 대신 마법사는 당장 금화를 받을 수 있으니 서로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걸 이제 대귀족 가문 출신의 자제한테 제안하면 ‘너희 가문 돈 없지?’라는 무례한 시비가 됐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괜, 괜찮습니다.”
“꼭 지금 결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중에 생각이 달라지면 한 번 찾아와주시죠.”
랫포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노인 한 명이 이한에게 다가왔다. 이한은 상대가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반지 두 개. 목걸이 하나. 팔찌 하나. 모두 다 아티팩트군.’
이한처럼 마력의 흐름을 예리하게 잡아낼 수 있는 사람은 겉모습만으로도 이런 파악이 가능했다.
저 정도 되는 아티팩트들을 갖고 다니는 사람은 제국의 부자들 중에서도 드문 편이었다.
“아티팩트를 알아본 겁니까?”
상대는 흥미로워하며 물었다.
“예. 무례하게 느껴지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능력이 있다면 알아보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린벨 가문의 알아드네입니다.”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입니다.”
거미 수인, 알아드네는 친절한 할머니 같은 인상을 갖고 있었지만 동작 하나하나에 군더더기가 없었고 자세는 흔들림 없이 꼿꼿했다.
“도인 경이 그렇게 실력이 나쁜 마법사는 아닌데, 오늘 일은 놀랐습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제가 마법사는 아니지만... 행운만큼 마법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도 없습니다. 실력만 존재할 뿐. 도인 경의 마법을 그렇게 쉽게 해제한 것도 놀라웠지만... 마력까지 전부 소모시키다니.”
“!”
이한은 놀랐다.
‘아차. 그렇군.’
생각해보니 도인의 상태가 좀 이상하긴 했었다.
그렇게 몸이 좋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징조가 드러났을 것 아닌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기준으로 생각하다 보니 상대 마법사가 마력이 고갈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미안한 짓을 했군.’
그러나 알아드네는 이한의 놀라움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놀랄 것 없습니다. 책망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니까요. 뛰어난 마법사는 자존심이 강해야지요. 감히 자신의 실력을 시험하려고 한 상대라면 더더욱. 그렇게 품위 있게 끝내준 것만으로도 도인 경은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아니, 그게...”
이한은 오해라고 해명하고 싶었지만 알아드네는 이미 스스로 납득을 끝낸 상태였다.
아무리 모임의 여흥이라지만, 실력도 안 되면서 자신에게 도전한 마법사는 용서할 수 없다고.
워다나즈 가문의 자존심으로 짓밟아버린 것이라고!
“정말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신다면 그런 걸로 하지요. 어쨌든 놀랐습니다. 에인로가드 출신 마법사들이 뛰어난 건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1학년 학생이 이 정도로 뛰어난 건 처음 보는 일이니까요. 아무리 워다나즈 가문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학생들인 만큼 방학 도중에는 그랑덴 시에서 머무르겠죠. 만약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그린벨 가문을 찾아오세요. 저택의 문은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
이한은 다시 놀랐다.
그 놀라움을 알아드네는 다른 뜻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맞춰보도록 할까요. 아마 지금 도움이 필요한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고 있겠죠?”
“아니... 아닌데요.”
“가끔 대귀족 가문의 힘으로도 해결하기 힘들거나, 대귀족 가문의 이름으로 해결하기 꺼려지는 일들도 있는 법입니다. 그럴 때가 분명히 있어요. 그러면...”
알아드네는 목례한 다음 자리에서 물러났다.
형님과 누님한테 잔뜩 칭찬받고 돌아온 아산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워다나즈! 들었어? 칭찬 받았어! 칭찬을 받았다고!”
“아산... 칭찬 한 마디에 너무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한은 친구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그냥 무시하고 살면 편할 것 같은데 왜 굳이 저러는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래. 무슨 칭찬을 들었지?”
이한은 친구가 저렇게 좋아하니 예의상 질문을 던졌다.
아산은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잘 했다고, 좋은 친구를 잘 사귀었다고, 앞으로 그 친구를 따라갈 수 있도록 열심히 정진하라고 하셨어.”
“?”
“??”
이한과 랫포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랫포드는 아산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였다.
“워다나즈 님. 제가 귀족들은 잘 모르지만, 귀족들 사이에서는 저게 칭찬인가요?”
“아니. 저건 칭찬이 아니다. 랫포드.”
둘이 그러거나 말거나 아산은 행복해했다. 이한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아산. 방학 도중에 심심하면 워다나즈 가문의 저택에 와라. 아니. 심심하지 않아도 자주 놀러 와라.”
“고맙... 다?”
아산은 뭔가 위화감을 느꼈는지 갸웃거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보다 워다나즈. 날 이렇게 도와줬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지. 혹시 필요한 거라도 있나? 만약 있다면 말해다오. 달카드 가문의 이름으로 보답할 테니.”
괜찮다고 하려던 이한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필요한 게 하나 있었던 것이다.
“필요한 게 있긴 했지.”
“오. 뭐지?”
“빌린 은화 좀 갚아라.”
“...아, 아니. 그건 당연한 거고. 다른 거는?”
“딱히 생각해놓은 거 없는데.”
아산은 당황해했다.
빌린 은화를 갚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설마 그것 때문에 직접 온 건 아니지?”
“물론이지. 그냥 친구를 만나러 온 거다.”
“그렇지? 그렇겠지...?”
아산은 납득하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왠지 떨떠름했다.
* * *
그랑덴 시에 위치한 메이킨 가문의 저택은 고풍스러운 귀족 저택보다는 분주하고 번영한 연금술사 공방을 연상시켰다.
쓸데없는 장식이 없는 실용적인 디자인, 쉴 새 없이 저택의 문을 들어왔다 나가는 일꾼들과 연금술사들, 저택 안에서 풍겨오는 각종 약초와 물약의 향기...
“약초 냄새가 대단합니다.”
“그래. 돈 냄새가 대단하군.”
“예? 약초 냄새요.”
“아. 미안. 다른 생각을 하느라.”
이한은 랫포드에게 사과했다.
수많은 일꾼들이 재료를 들여보내고 연금술사들이 들어갔다 나가고 하는 걸 보니, 메이킨 가문이 왜 부유한지 알 것 같았다.
게다가 이게 본가도 아니라 별장인 셈 아닌가.
“앞으로 요네르하고 친하게 지내야겠군.”
“지금도 친하시지 않습니까?”
이한은 저택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은 너무 바빠서 이한의 모습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외쳤다.
“줄 서서 기다리십시오! 지금 안에 마차 다섯 대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밀고 들어가려고 해도 기다리셔야 합니다!”
“음. 사실 저희가...”
“안 된다니까요! 어느 상단이나 공방이든 간에 줄 서서 기다리셔야 합니다! 규칙입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시면 여기 기다리고 계시는 분들이 뭐가 되겠어요!”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이한은 문지기에게 설득됐다.
정문 앞에서 길게 대기하고 있는 마차들과 일꾼들.
길드, 상단, 공방 등 여러 곳에서 찾아와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었다.
물론 이한은 일로 온 게 아니라 친구를 보러 온 거였지만 그게 새치기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가서 기다리자.”
“어... 저희는 그냥 따로 통과해도 될 것 같은데...”
“랫포드.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괜히 요네르 가문한테 피해 끼칠 수도 있으니 기다리자고.”
랫포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한의 뒤를 따라갔다.
귀족 저택에 방문하는 건 원래 이런가?
‘아닌 것 같은데...’
“두 분은 무엇 때문에 오셨소?”
먼저 서있던 연금술사가 둘에게 말을 걸었다.
긴 로브에 치렁치렁 각종 물약과 시약을 매달고 다니는 꼴이, <저 연금술사입니다>라고 글자를 새기는 것보다 더 자신을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메이킨 가문의 사람을 만나러 왔는데.”
“그렇겠지. 나도 그래서 기다리고 있소.”
연금술사는 같은 목적을 가진 동료를 발견하자 친근하게 웃었다.
먼저 서있던 연금술사의 말에 따르면, 여기 메이킨 가문의 저택에 찾아오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메이킨 가문과 정식으로 계약하고 약속한 물건을 납품하러 온 이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메이킨 가문의 눈에 들어 후원을 받거나 계약을 하려는 이들.
메이킨 가문은 든든한 후원자였다. 상단이든 길드든 공방이든 한 번 눈에 든다면 파격적인 금화를 지원받으며 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저 수많은 사람들이 캐온 약초나 시약, 혹은 직접 만든 연금술 물약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데 두 분은... 여기서 기다리실 필요가 있소?”
연금술사는 이한과 랫포드의 복장을 보고 의아해했다.
도시에서 오래 지내다보면 사람의 옷만 봐도 신분을 짐작할 수 있기 마련.
둘은 딱 봐도 귀족 가문 출신 같았다.
“아쉬우면 기다려야지.”
“하긴 맞는 말이오. 쓸데없는 말을 했군.”
연금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 가문 출신이어도 아쉬운 일이 있다면 기다려야 하는 법.
물론 ‘귀족 가문 출신이면 하인을 보내서 약속을 잡아도 되지 않나’하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무언가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넘겼다.
앞에 수상쩍은 알을 우리에 넣어서 갖고 온 사람이 들어가고, 그 다음에 설산의 시약을 구해 온 상단의 직원이 들어가고 나자 마침내 차례가 찾아왔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십시오! 무슨 목적으로 오셨습니까!”
“우린 연금술사요. 만든 물약을 평가받으러 왔소.”
“알겠습니다! 서관으로 가주십시오! 서관에 새로 온 연금술사 셋! 연금술사 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