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이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사이 황족들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황자, 보가준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알의 무게가 묵직한 걸 보니 저건 날아다니는 생물 같지 않습니다.”
황녀, 주드란타스가 바로 반박에 나섰다.
“꼭 그렇게 생각할 수만은 없는 문제입니다. 날아다니는 생물 중에서도 무거운 놈이 있으니까요.”
“저도 압니다. 하지만 추측을 위해서는 높은 확률의 선택지를...”
“그게 틀렸다는 겁니다.”
“틀린 건 호위기사가 뇌물 사건에 연루된 게 틀린... 크흠.”
“...하긴 클드란 마을의 역병을 해결하지도 못했으니 이런 당연한 것도 맞히지 못하는 게... 으흠.”
‘아니. 생각보다 재밌군.’
옆에서 듣고 있던 이한은 왜 귀족들이 황족들을 따라다니며 모임에 참가하는지 알 것 같았다.
황족들이 서로 아슬아슬하게 간을 보며 싸우는 게 생각보다 재밌었던 것이다.
물론 귀족들은 그런 못된 생각으로 따라다니는 게 아니었지만...
툭툭-
“?”
이한은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보니 같은 탑 소속인 황녀, 아덴아르트가 서있었다.
아덴아르트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이한에게 잘 포장된 주머니를 건넸다.
그걸 본 이한은 크게 감동받았다.
‘황족답게 은혜를 아는구나!’
저번에 황녀가 추종자들 때문에 강제로 난이도 있는 과제를 하게 된 걸 말려준 은혜.
그걸 잊지 않고 이렇게 은화로 갚으려고 하다니.
‘제국의 미래가 밝군.’
“감사합니다.”
이한은 대답하고서 포장된 끈을 풀었다.
그러자 안에서 반짝이는 은화가...
...나오지는 않고 반짝이는 메달이 나왔다.
“????”
은화 대신 메달이 나오자 이한은 순간 당황했다.
뭐지?
‘아하. 은화는 무게와 부피에 한계가 있으니, 환금성 높은 장신구를 대신 준 건가.’
이한은 황녀의 배려에 다시 감탄했다.
과연 학년 수석... 아니, 차석에 걸맞은 뛰어난 지능이었다.
바로 갖다 팔 수 있는 장신구를 주다니.
“워다나즈 님. 그건 보은패(報恩牌)입니다.”
“......”
추종자의 친절한 설명에 이한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보은패.
가문의 일원이 신세를 졌을 때, 그 가문이 감사의 뜻으로 주는 선물이었다.
만약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길 때 이 패를 내놓는다면 언제 어디서든 간에 그 가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아덴아르트 또한 외가가 강력한 편이었으니 이 보은패의 가치 또한 대단했...
‘...그냥 은화로 주지.’
그러나 이한에게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이한이 무슨 황족들 지지 얻어서 정치에 나설 것도 아니고, 제국 사교계에 나설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이런 보은패는 은화로 바꾸기도 애매했다. 재수 없게 잘못 걸렸다가는 상대 가문의 성의를 무시한 꼴이 됐다.
이한은 속으로 한숨을 참으며 가식적으로 대답했다.
“이런 걸 받다니... 너무 과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하. 아닙니다. 황녀님께서는 워다나즈 님의 헌신에 크게 감사하고 계십니다.”
“과연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될까요?”
“예! 물론입니다.”
황녀도 받아달라는 듯이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다른 걸로 대신 받아보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이한은 씁쓸함을 참으며 메달을 집어넣었다.
“고맙습니다.”
“잠깐. 뭘 멋대로 주는 건가?”
보가준은 아덴아르트의 추종자에게 정색하며 말했다.
보가준과 주드란타스 둘이 말다툼을 하는 사이 아덴아르트가 멋대로 인재를 데리고 가려 하다니.
주드란타스도 언쟁을 멈추고 끼어들었다.
“억지로 보은패를 주려고 하다니. 호의도 억지로 베풀면 폐가 되는 걸 모른단 말이냐?”
‘의외로 맞는 말도 할 줄 아는군.’
그러나 아덴아르트의 추종자들은 만만치 않았다.
“멋대로 주는 거라뇨? 보가준 님. 이건 아덴아르트 님께서 친구에게 감사의 뜻으로 주신 겁니다. 두 분은 에인로가드에서 같이 수학하고 계십니다.”
“큭...”
“크윽.”
보가준과 주드란타스는 동시에 침음성을 흘리며 분해했다.
같은 학교에서 배우고 있다는 사실만큼 친분을 만들기 좋은 핑계도 없었다.
‘이런 비겁한...’
‘에인로가드에 재학 중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사용하다니.’
두 황족이 말문이 막히자 추종자는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아시겠습니까? 워다나즈 님은 황녀님의 절친한 친우란 말입니다.”
“?”
이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랬나?
‘그렇게까지 친한... 친한가?’
물론 식사를 차려주긴 했고, 같은 탑인 만큼 이것저것 같이 하긴 했지만 그게 절친한 친우인지는 조금 의아했다.
친구까지는 뭐 그렇다 쳐도...
“후후! 후후! 후후!”
가이난도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강하게 항의하려고 했다.
‘친한 거면 내가 더 친한데!’
물론 다른 말이 봉인된 상태라 별 효과는 없었다.
“조용히 해. 보는 눈이 많잖아.”
요네르는 가이난도의 옆구리를 찔렀다.
오늘 모임에 온 귀족들 앞에서 체면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한이 기껏 배려해줬는데 그걸 걷어차려고 하다니.
이 사촌은 좀 감사할 줄 알아야했다.
“흥. 학교에서의 우정은 장난 같은 것. 같이 배웠다고 해서 꼭 섬기리란 법은 없지.”
“드물게 맞는 말을 하는군. 맞아. 친분이 조금 있다고 해서 섬길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두 황족은 방향을 바꿔서 우정을 흔드는 식으로 틀었다.
물론 이한도 아덴아르트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덴아르트야 원래 무표정한 사람이었고, 이한은 딱히 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같은 학교 다녔다고 섬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논리면 가이난도는 벌써 추종자가...
“참. 한 번 저 알의 정체를 맞춰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보가준과 주드란타스는 이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수께끼를 권했다.
물론 그건 전혀 이한의 환심을 사는 행동이 아니었다.
‘하기 싫다니까 이 자식들이 왜 자꾸.’
그냥 자기들끼리 싸우면 서로 좋을 텐데 굳이 이한을 끼워 넣으려고 하니 귀찮기 그지없었다.
좋게 좋게 거절하려는 순간, 이한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
이상하게 낯이 익은 알.
어디서 본 느낌이 났었는데...
‘바실리스크의 알!!’
볼라디 교수가 받고서 실망한 기억이 생생했다. 왜 이제야 떠올렸나 싶을 정도였다.
“저거 바실리스크의 알 아닙니까?”
이한은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부화만 하지 않는다면 바실리스크의 알이든 드래곤의 알이든 크게 상관없긴 했지만...
조금 위험하지 않나?
‘원래 황족들이 모일 때 이 정도 수수께끼를 하는 건가? 에인로가드도 아닌데?’
알을 갖고 온 귀족, 브로돈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웃었다.
“바실리스크의 알 아닙니다. 워다나즈 님.”
“그렇... 습니까?”
상대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자 이한은 멈칫했다. 자기가 잘못 봤나 싶었던 것이다.
“예. 믿어주십시오. 그런 위험한 알을 여기 모임에 갖고 올 리 없잖습니까.”
“혹시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상인에게서 샀습니다만?”
“......”
믿어주려고 했던 이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기가 기르거나 구해 온 알이 아니라 상인에게서 산 알이라니.
갑자기 불길해졌다.
‘...괜찮겠지.’
생각해보니 바실리스크의 알이든 드래곤의 알이든 부화할 낌새가 없는 이상 뭐 그리 문제가 되겠나 싶었다.
모임 끝나면 알아서 다시 가져갈 거고...
쩌저적!
알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무언가 나오려고 하자 이한은 즉시 반응했다.
“모두 엎드려!”
에인로가드에서 혹독하게 훈련 받은 시간은 이한을 배신하지 않았다.
덕분에 누구보다도 빠르게 먼저 지팡이를 뽑아들고 주문을 시전할 수 있었다.
“샘솟아라. 펼쳐져라!”
거대한 물 덩어리가 허공에서 샘솟더니 그대로 장막의 형태로 변해 유리 케이스를 둘러쌌다.
바실리스크를 상대할 때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는 놈의 사안(邪眼).
마주치는 순간 석화의 저주가 시전되는 바실리스크의 눈은 갓 태어난 새끼라 하더라도 위험했다.
“내가 도... 으헉!”
“가만히 있으십시오!”
“아니, 내가...”
“당신도!”
끼어들려는 황자와 황녀의 뒷덜미를 잡고 테이블 뒤로 구겨 넣은 이한은 친구들에게 외쳤다.
“저번에 했던 거 기억나지? 그 때처럼 움직여! 고개 숙이고 거울로 보고! 움직여라!”
이한은 테이블을 세워서 귀족들을 그 뒤로 밀어 넣었다. 괜히 고개 내밀고 있다가 사안과 눈 마주치지 못하도록.
쨍그랑, 퍽!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둔탁한 소리가 물의 장막에서 튀어나왔다.
금방이라도 뚫릴 것 같은 충격에 이한은 놀랐다.
“새끼일 텐데 어떻게?”
“아! 워다나즈 님!”
옆에서 테이블 밑에 숨어 있던 졸바브덴이 알겠다는 듯이 외쳤다.
“브로돈 님은 알들을 잘 보살피시기 위해 성장 물약을 주곤 하십니다!”
“......”
졸바브덴은 제국 사교계의 소식통답게 정보에 뛰어났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는 별로 도움 되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브로돈은 현실을 부정하듯이 외쳤다.
“바실리스크가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뭐든 간에 저렇게 날뛰는 놈은 흉악한 놈이겠죠! 다들 테이블 뒤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샤르칸, 튀어나와라! 페르쿤트라,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이한은 갖고 있는 최강의 패로 선수를 치려고 했다.
괜히 어설프게 아끼다가는 사태만 커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한이 페르쿤트라를 반쯤 소환했을 때, 물의 장막이 기어코 찢어졌다.
치이익!
놀랍게도 물의 장막에서 타는 소리가 났다.
안에 있는 몬스터가 힘으로 뚫지 못하자 독으로 물의 장막을 찢어버린 것이다.
그 찢어진 틈새 안에서 몬스터의 모습이 번득였다.
뱀과 수탉의 영혼이 섞여서 태어난 지독한 몬스터, 바실리스크!
팟!
바실리스크는 이 자리에서 누가 가장 위협적인 마법사인지 느꼈는지 바로 이한에게 사안을 갈겼다.
세로로 길쭉한 동공이 번뜩이며 사악한 석화의 저주를 내뿜었다.
“...당신과 계약한 자가 마땅한 자격으로 당신을 부릅니다!”
-?????
그러나 이한은 석화의 저주를 맞고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사실 주문을 외우느라 집중해서 바실리스크가 석화의 저주를 갈겼는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팟, 팟, 팟!
연속으로 석화의 저주가 시전되었으나 이한은 모조리 튕겨내었다.
그리고 페르쿤트라가 소환되었다.
우르릉, 콰쾅!
실내에서 뇌우와 천둥이 치더니 이한의 위에 거대한 번개의 정령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난장판이냐?! 정말 가는 곳마다 사건을 몰고 다니는구나!
“...그건 나중에 해명하겠습니다! 앞에 바실리스크가 탈출하려고 합니다! 막아주십시오!”
이한의 다급한 외침에 페르쿤트라는 상황을 바로 파악했다.
저 물의 장막 안에 바실리스크가 갇혀 있다면 그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보아하니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도 꽤 여럿 있었는데,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네가 오늘 저지른 수많은 실수 중, 가장 잘한 선택은 바로 나를 소환한 것이다!
페르쿤트라의 몸이 크게 부풀어 오르더니 벼락처럼 쏘아져나갔다.
그리고 물의 장막 안으로 짓쳐 들어갔다.
바실리스크든 뭐든 한 번에 제압...
...기절했잖느냐?
“예?”
기절했다고. 탈진한 모양인데.
페르쿤트라는 물의 장막을 치우고 쓰러진 바실리스크를 보여주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쓰러져 있었다.
샤르칸도 바실리스크를 툭툭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실리스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 습니까?”
그래.
순간 어색한 침묵이 이한과 페르쿤트라 사이를 감돌았다.
이한은 멋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페르쿤트라는 이한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