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계속 노려본다구. 찾아올 때마다 저렇게 노려보면 어떡해.”
가이난도가 칭얼대자 이한은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이미 아산에게도 한 적 있는 말이었다.
“저택 밖으로 나가면 되지.”
“어?”
“밖에서 돌아다니면 어쩌겠냐?”
“오... 같이 놀아줄 거야?”
“네가 원한다면야.”
가이난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모습에 랫포드는 안타까워했다.
‘아마 생각하시는 것과 조금 다를 텐데...’
* * *
말 나온 김에 아산까지 불러낸 이한은 친구들과 같이 발걸음을 옮겼다.
가이난도는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물었다.
“마법사 카드 사러 갈 거야?”
“아니.”
“새로 나온 잡지 사러 갈 거야?”
“아닌데.”
“그럼 어디 가는데?”
“리치몬드 가문.”
“???”
가이난도와 아산은 이한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익숙한 이름의 가문이 아니라 순간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걸린 것이다.
리치몬드 가문이라면...
“어디였지?”
“리치몬드 가문을 모른다고?”
이한은 어이없다는 듯이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친구들은 너무나도 쉬운 시험 문제를 틀린 학생처럼 주눅들었다.
“미, 미안. 리치몬드 가문이 어디 가문이었지?”
“제국에서 손꼽히는 마차 운송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가문이잖나.”
“......”
“......”
그걸 어떻게 알아!
둘이 황당해하는 사이 요네르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아. 그랬지.”
“봐. 요네르는 알잖아. 그걸 모른다니 신기하군.”
“......”
“......”
아산과 가이난도가 할 말을 잃은 사이,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시 외곽에 위치한 리치몬드 운송 길드의 건물은 거대한 창고를 연상시켰다.
“야, 이 자식아! 마차 지금 여기 있는 거 안 보여!”
“내가 할 소리다! 당장 마차 옮기지 않으면 네놈을 신전으로 보내주마!”
마차를 맡은 마부들은 창고 안에 어떻게든 마차를 빨리 집어넣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길드의 직원들은 단 1초도 멈추지 않고 움직이며 상자를 내리고 올렸다.
“요네르네 저택 같군.”
“?!”
이한의 중얼거림에 요네르는 깜짝 놀랐다.
‘우리 집이 그렇게 어수선해보였나...?’
요네르는 저택에 돌아가면 저택 앞에 너무 사람 많이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크발겐 시 가는 마차, 끝났습니다!”
“출발! 출발!”
“샤일스?”
“?!”
일꾼들과 사이에 섞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던 리치몬드 가문의 샤일스는 친구들이 찾아오자 깜짝 놀랐다.
* * *
“정말 고마웠다. 워다나즈.”
샤일스는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표하며 주머니를 내밀었다.
이한은 별다른 귀찮은 과정 없이 바로 돈부터 주는 상대의 성실함에 감동했다.
‘다른 친구들도 이걸 본받아야 하는데.’
“왜 그래?”
이한이 자기들을 훑어보자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참. 샤일스. 하나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나한테? 뭐든지 말해봐라.”
샤일스는 살짝 놀랐다.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이 그에게 부탁할 일이라니. 어떤 일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혹시 남몰래 운송해야 할 물건이 있는 건가?’
자기 가문의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옮겨야 하는 중요한 물건이라도 있...
“도시에 마법사가 할 만한, 수익 좋은 단기 일자리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으... 으음??”
샤일스는 당황했다.
이한의 말이 너무나도 예상 밖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한은 진지했다.
‘좋은 일자리는 미리 찾아놔야 한다.’
마법사는 언제 어디서나 고급 인력이었지만, 그렇다고 일할 수 있는 곳이 많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사의 몸값이 너무 비쌌다.
당장 뒤의 마차에 포장된 짐들을 내리고 싣는 것도 뛰어난 마법사 한 명만 부르면 순식간에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바로 인건비가 수익보다 더 나오게 됐다.
일할 수 있는 곳은 많지만 마법사가 몸값에 맞는 은화를 받아가면서 일할 수 있는 곳은 몇 개 안 되는 상황.
게다가 여기 그랑덴 시는 이한을 제외하고서도 에인로가드에서 나온 학생들이 제법 됐다.
선배들의 숫자까지 생각해보면 괜찮은 단기 일자리는 순식간에 사라질 터.
‘최대한 빨리 찾아놔야 해.’
“혹시 농담하는...”
말을 꺼낸 샤일스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이한의 눈빛을 보고 멈칫했다.
저건 절대 농담하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아니 왜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일을 하려고...’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나 불사조 탑, 혹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일을 구하려는 건 놀랍지 않았다.
실제로 많이들 그러고 있었으니까.
그랑덴 시의 물가도 비싼 만큼 방학 때 일을 아예 안 하는 학생은 드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그럴 필요 없지 않나?
“일단 그... 나도 많이 알지는 못하는데.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나 길드 직원들이 하는 이야기만 들었다.”
“뭐든지 좋아. 말해봐라.”
“어, 마차 호위나 그런 건 좀 그렇지?”
제국의 땅은 넓었고 긴 거리를 여행하는 일에는 자연스레 위험이 따랐다.
몬스터부터 도적까지.
당연히 마차 행렬에는 마부만 있는 게 아니라 호위들이 따라붙었다.
싼 화물은 괜찮았지만 비싸고 중요한 물건을 옮길 때에는 마법사 같은 고급 인력도 참가시키곤 했다.
“조금 그렇군. 잘못 참가했다가는 다음 학기 시작에 못 맞추잖나.”
“그... 그렇지. 일단 마법에 소질이 있는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 있다고 하던데...”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했다.
확실히 제법 괜찮은 일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제국 마법학교에 입학할 만큼의 재능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몇몇 사람들은 마법의 재능을 갖고서도 그걸 깨닫지 못해 그냥 살아가곤 했다.
가끔 그런 사람들 중에서 뒤늦게라도 마법을 배워볼 결심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부류도 다양했다. 모험가, 용병, 상인, 선원, 탐험가 등등.
이런 이들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건 에인로가드 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좋은 일이었다.
“잠깐. 우리는 1학년인데 가르쳐도 되나?”
“일단은 에인로가드 1학년이면 충분하다고 하더라고.”
“그렇군. 다음은?”
“아, 아니. 여기서 더?”
샤일스는 이한의 눈빛에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냈다.
“아, 이건 항상 있는 일은 아닌데, 재료 채집 의뢰가 좋다고 하더라.”
“재료 채집 의뢰?”
이한은 멈칫했다.
보통 저런 건 경력 적은 모험가가 하거나 혹은 심부름꾼들이 하는 일이었다.
물론 난이도 높은 재료야 엄청난 상금이 걸리고 고참 모험가들이 나서지만...
학생들 사이에서 그런 의뢰가 유행할 리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해도 되는 일 아닌가?”
“아. 마법사들만 채취할 수 있는 재료가 있대.”
‘아하.’
이한은 이해가 갔다.
재료 중에서는 마법을 사용해서만 온전히 캐낼 수 있는 재료도 있었다.
“샤일스. 만약 이런 의뢰가 나온다면 나한테 꼭 말해다오.”
“아니... 대체 왜... 그, 그래. 알겠다.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 그 정도야.”
“그런데 더 없나?”
“......”
샤일스는 다시 한 번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냈다.
일 못해서 미친놈도 아니고 대체...
“맞아! 마법사의 실험을 보조하는 일도 있어!”
“그건 좀 그렇군.”
“?!”
이한이 바로 거절의 뜻을 내보이자 샤일스는 당황했다.
“왜? 이것도 되게 괜찮은 일자리라고 들었는데.”
“샤일스. 낯선 마법사는 일단 경계부터 하고 봐야 하는 거다. 무슨 실험을 할 줄 알고.”
이한은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실제로 낯선 마법사를 잘못 만났다가 개고생하고 있는 입장에서 샤일스의 저런 안일한 인식은 매우 걱정이 됐다.
<기초 마법전투의 반복적 실험> 같은 평범한 이름의 실험이어도 막상 참가하면 온갖 공격을 피실험자한테 날리는 괴상한 실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 아니. 워다나즈. 물론 낯선 마법사라지만 나름 여기 도시에서 신뢰와 이름을 쌓은 마법사다. 현상금이 걸린 범죄자 마법사가 아니라. 이상한 실험을 할 리가 없지 않...?”
“아니.”
이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할 수 있다. 기억해둬라. 알겠나?”
“으, 으응...”
샤일스는 이한의 박력에 압도되어서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논리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한의 목소리에는 논리를 뛰어넘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의 실험을 보조하는 건 정말 괜찮은 일자리다. 워다나즈. 구하고 싶다고 해서 바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험 내용을 들어보고 괜찮은 걸 고르면 되지 않을까.”
마법사의 실험이라고 해서 꼭 위험한 것만 있지는 않았다.
도시 인근에서 일어나는 특이한 마법 현상을 관찰하거나 기록하는 것도 실험 보조에 들어갔다.
“알겠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고려는 해보도록 하지.”
“아니 정말로 괜찮은...”
대충 정리를 끝낸 이한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래서 샤일스. 넌 이 중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지?”
“나? 나는 바빠서 못 해. 길드 일을 도와드려야 하거든.”
이한은 솔깃했다.
사실 파랑새는 가까이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운송 길드 일도 돈이 되나?”
“아니. 돈은 못 받는데 우리 가문 일이니까 하는 거지.”
“저런. 샤일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무급으로 일하는 건 좋지 않은 생각이다. 스스로 네 가치를 깎아먹는 짓이지.”
“...아, 아니... 우리 가문 일인데...?”
이한이 그렇게 충고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길드원 한 명이 달려와서 샤일스에게 말했다.
“도련님. 옆의 상단에서 시약 재고 정리 건으로 마법사를 급하게 찾고 있던데, 도련님께서 가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꽤 짭짤하던데요.”
“안 돼. 우리 창고를 봐. 오늘 안에 정리를 끝내야 한다고. 지금 마부들이 폭동 일으키려는 거 안 보여?”
“마침 잘 됐군. 그 의뢰. 우리가 맡지.”
“?!”
“??!”
이한의 말에 샤일스도 당황하고 길드원도 당황하고 뒤에 있던 이한의 친구들도 당황했다.
“워다나즈 네가?”
“마법사가 필요한 일이라면 보수가 괜찮지 않나?”
“아, 아니. 보수야 괜찮은데 지루하고 귀찮을 텐데.”
“보수가 중요한 거지. 그럼 맡아도 되겠지?”
“어... 어.”
이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종이를 받아 챙기고 유유히 떠나버렸다. 친구들도 그 뒤를 쫓아서 나갔다.
아직도 입을 헤 벌리고 있던 길드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아... 아니. 도련님. 저 친구분들 귀족이시죠? 그런데 대체 왜?”
샤일스는 길드원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러게 말이야!
* * *
“마법사, 그것도 에인로가드 학생이시라고요? 무조건 환영입니다!”
신나게 외치던 상단 직원은 고개를 들고서 깜짝 놀랐다.
‘귀족들이잖아!?’
“...저, 저희 상단에서 뭐하시는 건지는 아시죠?”
“창고 뒤져서 시약 확인하고 재고 정리하는 거 아닙니까?”
“맞, 맞는데... 지루하실 텐데요. 재미없을 거고...”
“하지만 보수는 좋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잘, 잘 부탁드립니다.”
이한 일행은 창고로 향했다.
닐리아, 랫포드, 요네르는 별 생각 없었지만 가이난도와 아산은 아직 당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 그런데 왜 하는 거야?”
“마... 마법 공부가 되어서 그러는 거겠지. 워다나즈라면 틀림없다.”
둘이 소곤거리는 사이 창고 앞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살코 패거리였다.
“!!”
살코와 친구들은 이한 일행을 보고 깜짝 놀랐다.
“워다나즈!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냐?”
“일하러 왔는데.”
“너...”
살코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감탄한 목소리로 외쳤다.
“...는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우리 진짜 일하는 거야?”
가이난도의 속삭임은 허무하게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