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이한이 불러낸 불꽃의 화력에 홀린 건 발가로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화염 마법사들도 놀라워하며 수군거렸다.
“누구지, 저 마법사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절대로 평범한 마법사는 아닌 것 같군!”
그 시선에 당황한 발가로가 속삭였다.
“이봐! 다른 마법사들한테 에인로가드 소속인 거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고 했잖나!”
“죄송합니다. 조절에 실패해서.”
“아티팩트는 만능이 아냐. 명심해두라고. 너무 의존해서 좋을 게 하나 없어.”
발가로는 2학년 선배다운 듬직한 모습으로 말했다.
물론 이한이 조절에 실패했다고 말한 건 좀 다른 의미였다.
‘화염 마법은 여전히 어렵군.’
타고난 마력량 때문에 조금이라도 집중을 놓으면 화염이 사방으로 폭발하듯이 비산하는 만큼, 이한은 화염 마법을 쓸 때 기본적으로 범위를 최대한 좁히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남들은 화염을 키워서 화살도 만들고 창도 만들고 방패도 만들지만 이한은 작은 불꽃의 형태로 고정시켜 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 화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막강한 마력량으로 불러낸 화염인 만큼 어지간한 화염 저항은 뚫어버리는 파괴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다른 마법에도 그렇게 잘 버티던 짚 인형이 그대로 불타고 있었다.
‘화력을 좀 약하게 하려고 했는데 무리인가.’
화염의 세기를 조절해보려고 했는데 영 쉽지 않았다.
마력량을 억지로 줄여서 시전해야 하는 일이니...
남들은 있는 마력을 짜내서 마법의 위력을 강화시키려고 하는 걸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는 고민이었다.
화르르르륵...
짚 인형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기묘한 마력의 파동이 퍼져 나왔다.
그 마력의 파동은 신전에 있던 사람들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감쌌다. 악의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축복에 가까운 파동이었다.
“어때. 액운과 불운이 사라지는 느낌이 나냐?”
“그런 것 같습니다.”
“하루 이틀 정도는 묘하게 재수가 좋을 거야. 너는 많이 태웠으니까 더 오래 갈지도 모르겠다.”
‘오.’
이한은 선배의 말에 반색했다.
이 축복이 그런 효과가 있다면 이한에게는 정말로 필요한 축복이었다.
‘정말이라면 2학기 시작되기 전에 받고 들어가야 하는데.’
“자. 다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안전 수칙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교단의 사제들이 마법사들을 불러 모았다. 이한은 별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
“안타깝습니다. 실격입니다.”
“크윽!”
줄 앞에 선 마법사가 분한 듯 발을 굴렀다.
촛대에 불을 붙이는 대신 그 옆까지 불똥이 튄 탓이었다.
그 모습에 이한은 당황해서 물었다.
“안전 수칙에 대해 듣는 것 아니었습니까?”
“하면서 듣는 거지. 원래 듣는 것보다 직접 몸으로 겪는 게 더 기억 잘 나잖냐?”
‘이래서 기사 가문 놈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교단의 허가장을 받는 건 만만치 않았다.
사제들은 각종 상황에서 화염을 주변에 퍼뜨리지 않고 통제할 수 있는지 엄격히 판단했다.
그걸 본 이한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긴장했다.
이한이 가장 취약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집중 놓치면 이 신전은 불바다 된다.’
“야. 왜 그래? 별로 안 어려워. 이건 다른 마법사나 긴장하는 거지 에인로가드 출신인 우리는 긴장할 이유가 없는 거야.”
발가로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사제들은 화염 마법의 위력이나 속도, 복잡한 기교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기 화염 마법을 통제할 수 있는가 없는가만 봤다.
스스로 독학한 마법사면 모를까, 에인로가드에서 수학한 마법사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기본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한은 표정을 풀지 않고 독하게 집중했다.
그걸 본 발가로는 속으로 생각했다.
‘화염 마법에 자신이 없나?’
하긴 흰 호랑이 탑 학생들 중에는 마법에 자신 없어 하는 학생들이 좀 많은 편이었다.
발가로는 후배를 응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이난도. 너무 걱정할 것 없다. 마법이 전부는 아니니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다. 다른 탑 놈들이 너보다 잘나가도 초조해하지 말고. 알겠냐?”
“어... 감사합니다?”
* * *
다행히 이한은 무사히 성공했다.
불꽃이 정확하게 허공을 부유하며 목표들을 핀포인트로 불태웠다.
먼저 통과한 발가로는 박수를 치며 후배를 응원해줬다.
“잘 했다! 잘 했어! 뭐야, 잘 하잖냐!”
“감사합니다.”
발가로뿐만 아니라 아프하 교단의 사제들도 이한에게 다가왔다. 사제들은 이한을 보며 말했다.
“워ㄷ...”
“감사합니다. 사제님들! 언제나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한은 사제들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먼저 말했다.
“사제님들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화염 마법을 이렇게까지 갈고 닦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말해주실 줄이야...”
사제들은 이한의 진심 어린 감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신전의 문은 언제든지 열려있으니 찾아와주십시오. 불을 통제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어...”
이한은 머뭇거렸다.
물론 방학 때 공부를 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벌써부터 일정을 추가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혹시 워ㄷ...”
“꼭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 전에 이한은 못을 박았다.
일정을 추가하는 게 찜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걸 옆에서 본 발가로가 이한을 수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너...”
‘들켰나?’
이한은 자신이 흰 호랑이 탑 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켰나 싶어서 긴장했다.
“마법 공부를 좋아하는구나?”
“...예!”
“신기하네. 근데 왜 실력이... 아차. 아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실력이 없으니 더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배의 말에 발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성실한 녀석이었다.
마법 실력이 따라주지 않아서 안타까웠지만...
“나가자. 내가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해야겠군.”
“어... 아니. 괜찮습니다.”
이한이 공짜를 좋아하긴 했지만, 자기보다 작은 가문 출신에게 식사를 얻어먹는 건 양심의 문제였다.
“아냐! 다른 흰 호랑이 탑 놈들이 널 그렇게 대하는데, 기사로서, 흰 호랑이 탑 선배로서 난 너한테 한 끼 대접할 책임이 있다.”
“......”
이한은 언제 슬쩍 튈지 고민했다.
화르르르륵-
“?”
옆을 보니 허가장을 받은 도시의 마법사들이 신전 문을 나가지 않고 모여서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불이여, 고리의 형태로 모여라!”
화염의 고리가 허공에 타올랐다. 이한은 그 원리를 바로 알아차렸다.
1서클 마법을 어떻게든 개조해서 고리의 형태로 만든 것에 가까웠다. 아슬아슬하고 불안정했지만 어쨌든 목표만 달성하면 마법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좀 많이 어설프긴 하군.’
“세... 세상에! 화염의 고리를 성공시키다니!!!”
“이건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된다고!”
“하하하하! 다들 은화를 내놓게! 내가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
“......”
이한과 발가로는 동시에 할 말을 잃고 마법사들을 쳐다보았다.
내기에서 승리한 마법사는 세상에서 제일 거만한 표정으로 으스댔다.
“내가 뭐라고 했나? 4서클 마법 정도는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했지?”
“저번에는 그렇지 않았잖나? 대체 언제 이렇게 실력이 늘어난 건가?”
“깊은 사색과 깨달음. 오로지 그것뿐이라네.”
이한은 속으로 한탄했다.
스승 밑에서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마법사들은 마법에 대한 지식이 매우 들쭉날쭉했다.
눈앞에 있는 1서클 화염 마법의 변형 형태를 보고 4서클 마법으로 착각할 정도로.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환영 받는 이유를 알겠군.’
안 그래도 희귀한 직종이 마법사인데, 그 중에 상당수가 저런 마법사일 것 아닌가.
사람들이 제국 마법학교 출신을 선호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선배. 가시ㅈ... 아니. 어디 가십니까?”
이한은 당황했다.
발가로가 신전 문이 아니라 마법사들한테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기꾼 놈을 내버려둘 순 없지.”
“잠깐. 선배. 에인로가드 출신인 게 들키면 귀찮아진다고 하셨잖습니까.”
다른 마법사들한테 에인로가드 출신이라는 게 알려지면 좋지 않다고 해놓고 자기가 직접 달려들다니.
그러나 발가로는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저 놈이 다른 마법사들을 속이고 있잖냐.”
“...역시 선배는 흰 호랑이 탑 정신 그 자체십니다.”
후배의 칭찬에 발가로는 머쓱해졌다.
“그, 그러냐?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 * *
마법사, 오티로는 도둑 길드 출신의 마법사였다.
우연히 얻은 화염 마법에 관한 마도서를 읽고, 은퇴한 용병 마법사한테 뇌물을 바쳐서 일단 마법을 배우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이후의 성취는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오티로는 방향을 틀었다.
배운 마법을 좀 더 유익하게 활용하는 방향으로!
“자. 자네들도 아직 늦지 않았네. 나와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어. 약간의 은화만 지불한다면, 같은 마법사로서의 동료애로서 가르침을...”
“지랄은 거기까지다!”
발가로가 으르렁대며 발걸음을 옮겼다. 웬 어린 마법사가 살벌한 표정으로 다가오자 모여 있던 마법사들은 당황했다.
“뭐라고 한 건가?”
“기껏해야 1서클 마법의 변형으로 다른 마법사들을 홀리려고 하다니. 그러고도 네가 마법의 길을 걷고 있는 자냐?”
‘안 좋다.’
이한은 상대의 표정에서 불길함을 감지했다.
원래라면 당황해야 할 놈이 태연하게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믿는 구석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내 마법이 1서클이라니... 그럼 여기 있는 마법사들의 눈이 다 잘못되었단 건가?”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발가로는 상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바로 외투를 내려 에인로가드의 문장을 드러냈다.
“난 에인로가드의 학생이다. 에인로가드의 학생으로서, 네 마법은 속임수라고 주장하겠다!”
“에인로가드의 학생이라고?”
오티로의 눈동자는 놀라움으로 떨렸지만,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과연.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군. 하지만...”
오티로도 외투를 올렸다.
그러자 어디서 본 문양이 드러났다.
...발드로가드의 문양이었다.
‘아니 뭔...’
이한이 황당해하는 사이 발가로도 당황한 것 같았다.
“난 발드로가드를 졸업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가짜잖냐! 어디서 가짜를!”
“하... 그만하게. 학생이니만큼 아직 보는 눈이 미숙해서 실수가 있겠지. 이해하네. 나도 그랬으니까.”
확실히 상대가 발가로보다 한 수 위였다.
가짜 문장이라 하더라도 다른 마법사들이 알아볼 능력은 없었고, 무엇보다 발가로는 화술에서 상대에게 밀렸다.
‘나서야 하나?’
그래도 같은 학교 학생이니 좀 도와줘야 하나 싶었는데, 발가로가 먼저 나섰다.
“결투다 개자식아!”
“......”
“......”
“뽑아라! 뽑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진짜 미친 사람인가.’
신전 안에서 결투를 신청하다니.
이한은 발가로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사제들이 달려왔다.
“여기서 결투하시면 안 됩니다!”
“좋다! 밖으로 따라 나와!”
“무, 무슨 그런 야만적인...”
“진정하시오. 다들. 마법으로 승부를 보면 되잖소.”
마법사들과 사제들이 둘을 말렸다. 씩씩대던 발가로는 결국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 마법으로 승부를 보지.”
발가로는 자신이 저런 사기꾼에게 질 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에 절대란 없는 법.
“승부라면... 불꽃 조종으로 승부를 보는 게 어떻겠소?”
중재를 위해 사제가 말을 꺼냈다.
화염 마법사들이 자주 하는 놀이 중 하나로, 서로가 불꽃을 소환해 격추시키는 놀이였다.
간단한 놀이였지만 파고들면 꽤 심오했다. 상대의 불꽃보다 더 빠르게, 더 정교하게 움직여서 뒤를 잡아야 하는 것이다.
“......”
발가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한은 의아해했다.
“왜 그러십니까? 설마...”
“...나는 부여 마법 전문인데.”
“......”
이한은 얼어붙은 선배의 모습을 보고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뭐?”
발가로는 고개를 들었다.
“네가?”
“예.”
“안 돼. 네 실력으로는 무리야!”
“......”
이한은 순간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