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처음에 이한이 동굴 안의 언데드를 토벌하고 재료까지 수집한다고 했을 때, 구본은 과욕이라고 말리려고 했었다.
언데드 토벌 자체도 꽤 힘이 드는 일인데다가 저런 희귀한 약초 수집 의뢰는 보통 찾기 힘들어서 모험가 길드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둘 다 하겠다고 나섰다가 둘 다 실패하거나 체력만 낭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한은 구본의 걱정을 주의 깊게 듣고, 조금도 감정적으로 굴지 않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책에 따르면 지금 동굴 뒤쪽의 지형이 약초가 나오기 좋은 지형인데, 동굴 안에 언데드들이 나온다면 약초의 힘은 거기에 영향을 받아서 더욱 구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마법이나 약초학에 대해 잘 모르는 구본이었지만 이한의 말에는 확실한 설득력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희귀 몬스터인 라펠라 멧쥐까지 포획하다니.
보통 모험가들은 저러지 않았다. 한 번에 한 의뢰씩 해결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의뢰 하나도 언제 해결될지, 해결할 수 있을지 몰라서 조심스러운데 저런 탐욕스러운 계획을 세운다는 것에 원래라면 반박해야 했지만...
구본은 그럴 수 없었다.
상대방의 계획이 정말 너무 완벽하고 치밀했던 것이다.
얼굴만 아니었다면 모험가로 십년 정도 활동한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다 이 정도는 할 줄 아는 편입니다.”
이한은 친구들의 명예를 위해 겸손하게 말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눈을 부릅뜨고 이한을 쳐다보았다.
‘뭐라는 거야?’
‘그건 너만 할 수 있는 거지...!’
“제가 뭐라고 더 할 게 없습니다. 이대로 바로 진행해도 될 것 같습니다만...”
구본은 말끝을 흐렸다.
조심스럽더라도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가는 길을 대비한 여행 준비나 야영 준비는 제대로 되어 있으십니까?”
구본의 말에 앙라고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걱정할 거 없습니다. 야영을 한두번 해본 것도 아니니까.”
“혹시 식료품이나 각종 야영 도구를 짊어지고 따라온 하인이 있었던 야영은 아니겠지?”
“......”
이한의 질문에 앙라고는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니, 어떻게 알았지?
이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문에서 다른 기사들과 야영했던 경험은 잊는 게 좋을 거다. 그 때는 야영지 준비부터 씻을 물 준비, 따뜻한 식사, 불침번 등 다 편의를 봐줬을 테니까. 혼자서 여행하려면 필요한 건 최대한 챙겨야지.”
이한의 말에 구본은 다시 한 번 당황했다.
정말 1학년 학생이 맞는지 믿기지가 않았다.
1학년 학생이 어떻게 저렇게 차분하고 침착하게 예상을...
“배낭 열어봐라. 뭐 있나 확인해봐야겠다. 못이나 망치까지는 아니더라도 밧줄도 없나?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그리고 헝겊도 필요해. 가능하면 기름을 먹인 놈이 좋겠지. 식량은 돼지고기 통조림이 전부인가? 부족하겠지만 그 정도는 괜찮겠지. 가죽 물통도 챙겨. 부싯돌하고 부싯깃은 마법 때문에 빼놓은 모양인데 쓸데없이 마력 낭비하지 말고 그것도 챙겨놔.”
“......”
구본은 완전히 압도되었다.
어지간히 노련한 모험가보다도 더 능숙하게 준비물을 확인하는 모습.
그걸 보니 구본이 여기 왜 왔나 싶었다.
노련한 베테랑이 없어도 충분히 잘 굴러갈 것 같은데...
“구본 씨. 조언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 구본의 속마음도 모르고 이한은 구본을 불렀다. 구본은 매우 부담스러웠다.
이미 이한이 구본보다 잘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꽤 대충 짐을 쌌는데...’
꽤 많은 베테랑 모험가들도 저렇게 철저하지 않았다. 정말 위험한 곳에 가는 게 아니면 ‘은화도 아낄 겸 몸으로 때우자’가 기본이었으니까.
“훌륭한 것 같습니다.”
구본의 말에 이한은 왜 그러느냐는 듯이 재촉했다.
“왜 그러십니까.”
“예?”
“분명히 지적하실 부분이 있으실 텐데요. 없을 리가 없잖습니까.”
“아... 아니...”
진짜 없는데!
구본의 동료인 비지덱은 ‘여기서 더 어떻게 조언을 하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 * *
“과연. 배낭의 색도 중요한 겁니까. 이건 알지 못했던 정보입니다. 역시 노련한 모험가는 다르시군요.”
이한은 감탄한 표정으로 적었다.
가는 지형에 따라 배낭의 위장색을 맞춰서 바꾸다니. 역시 실전을 많이 겪은 모험가의 조언은 남달랐다.
비지덱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딴 거 없잖아.”
“...도, 도저히 안 떠올랐다.”
구본은 창피해서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가는 지형마다 배낭의 색을 바꾸는 짓은 해본 적도 없었다.
언제 어디에 갈지 모르는데 매번 배낭을 바꾼단 말인가. 모험가들은 그렇게 은화를 낭비할 정도로 돈이 많지 않았다.
앞에서 걷고 있던 더르규가 물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나? 매번 배낭을 바꾸는 것도 좀 성가시고 귀찮을 것 같은데.”
“아마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풀이나 흙 같은 걸로 위장하는 식이겠지.”
“아하.”
“......”
구본은 하나를 안 알려줘도 알아서 열을 알아버리는 에인로가드 학생의 모습에 전율했다.
대체 뭔...
“하지만 마법을 쓸 수 있으니 그럴 필요가 없겠군. <하급 색채 변환> 마법으로 대체 가능하겠는데.”
더르규는 이한의 말에 감탄했다.
“역시 미친놈처럼 모든 마법을 다 들은 이한 너답다.”
“방금 뭐라고?”
“아, 아니. 미안하다. 같은 탑 친구들의 말버릇이...”
“괜찮다. 더르규. 네 잘못이 아니라 다른 놈들 잘못이지.”
“우... 우린 안 했어.”
“우린 아무 말도 안 했다.”
앙라고와 라파드엘은 부정했지만 이한은 무시했다.
“그런데 워다나즈. 내 기억에 <하급 색채 변환> 마법은 강의 시간에 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언제 배운 거지?”
“아니. 나도 책에서 봤을 뿐이다. 연습하면 도착하기 전에는 되겠지.”
“그게 말이 되는...”
“색이여, 변하라.”
단 한 번에 배낭의 색이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 변환과 비슷하지만 쉽군. 덕분에 한 번에 성공했어.”
“......”
“왜 그렇게 쳐다보지?”
“아무것도 아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슬픔과 체념이 섞인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베테랑 모험가, 구본과 비지덱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소곤거렸다.
“분위기가 좀 이상하지 않냐?”
“나도 확실히... 친구 사이가 아닌가?”
같은 기사 출신의 친한 사이라기보다는 상관과 부하 같은 엄격한 분위기가 풍겼다.
분명 같은 학년일 텐데...
‘착각이겠지?’
그랑덴 시의 성문을 통과해서, 제국의 가도를 따라 움직이다가, 지도에 나온 길을 따라 빠져나온 뒤 풀숲을 통과하자 목적지인 불파른 언덕이 보였다.
초저녁 무렵에 도착한 셈이니 매우 빨리 도착한 편이었다.
다들 체력이 좋은데다가 말까지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
“역시 베테랑인 두 분이 계셔서 길을 잃지 않고 한 번에 올 수 있었습니다.”
...길을 한 번도 헤매지 않고 바로 찾아서 온 덕분이었다.
두 모험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는...’
‘...딱히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한이 혼자서 지도 보고 ‘이쪽인가?’ ‘이쪽이군’ ‘여기서 꺾자’하더니 알아서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이 주변에 잘 아는 둘이 조언을 하려고 해도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자, 그러면...”
“아직 체력 괜찮은데 들어가자.”
라파드엘이 의욕적으로 말했다.
범죄자 흑마법사들을 토벌하기 위해 흑마법을 배우는 사람답게 언데드 토벌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구본은 반색했다.
드디어 노련한 모험가로서 조언할 때가 온 것이다.
“그건...”
“안 된다. 라파드엘. 물론 지치지는 않았지만, 굳이 초저녁에 언데드가 출몰하는 동굴에 들어갈 필요가 없지. 해가 완전히 가라앉으면 언데드의 힘은 강력해질 거다. 지금은 피곤하지 않더라도 야영 준비를 하고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는 게 맞다.”
그렇게 말한 이한은 두 모험가를 보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맞, 맞습니다. 좋은 방법입니다.”
“감사합니다.”
두 모험가들은 당혹과 황당함을 떠나서 슬슬 깊은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우리가 과연 올 필요가 있었나?
* * *
“야영 준비는 우리가 맡겠습니다!”
“???”
두 모험가가 단호하게 선언하자 이한과 친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준비는 같이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원래 마법사 같은 분들은 이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구본의 말이 맞았다.
파티에서 궂은일은 나눠서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
마법사나 사제 같은 고급 인력이나 기사 가문 출신처럼 다른 모험가 몇 사람 몫을 하는 이들한테까지 잡일을 맡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건 오히려 낭비였다.
여기 있는 학생들은 전원이 다 마법사에다가 기사 가문 출신이었으니...
“과연.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아닙니다.”
이한은 거절했다.
“만약 두 분께서 안 계실 때에는 우리들끼리 해야 할 텐데, 그 때 하지 못하면 문제가 될 겁니다. 하는 법도 배워야겠죠.”
“어?”
“그, 그렇게까지 대비해야 해?”
그냥 쉴 생각 하고 있던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되물었다.
그러나 이한은 진지했다.
“그래. 잘 생각해봐라. 에인로가드에서 야영하게 될 일이 생겼을 때 다른 모험가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을 것 아니냐.”
“에인로가드에서 왜 야영을 합니까?”
구본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물었다. 마법학교 학생들은 못 들은 척 넘어갔다.
“자. 뭐부터 해야 합니까?”
“일단 불을 붙이고...”
구본이 부싯깃통을 꺼내려고 하자 이한이 바로 지팡이를 휘둘렀다.
화르륵!
“붙였습니다.”
“...그, 수원이 가까운 곳이라면 물을 구해오는 게 좋습니다. 신선한 물을 확보해두면 여러모로...”
첨벙!
“불러왔습니다. 다음은요?”
“......”
허공에 뜬 거대한 물 덩어리를 본 구본과 비지덱은 입을 뻐끔거리더니 조용히 나무통을 꺼내 물을 담았다.
“지금 주변의 수풀이 불빛이 새어나가는 것과 찬바람을 막아주겠지만 아무래도 약간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흙만 쌓아올려도...”
파파팍!
순식간에 흙더미가 쌓이더니 간단한 토담이 됐다.
“이 정도면 됩니까?”
“...예. 이제 주변에 침입자가 오면 알 수 있는 간단한 함정만 설치하고...”
이한은 버두스 교수와 같이 폭죽을 만들 때 배웠던 마법을 꺼냈다.
빛의 환상을 종이에 부여해, 종이가 찢어질 경우 빛의 환상이 소환되는 마법이었다.
파아앗!
앙라고가 별 생각 없이 물었다.
“그것도 여기 오면서 익힌 거냐? 대단한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마법은 그런 식으로 쉽게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 알잖나. 학기 때 교수님에게 직접 배운 마법이다.”
“...아니... 야...!!”
앙라고가 너무 억울하고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 사이 이한은 주변을 돌며 작업을 마쳤다.
“어떻습니까?”
“불침번만 잘 서면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다들 들었지? 순서를 잘 기억해둬라.”
이한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에게 말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이 수많은 마법의 연속에는 놀라지도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라. 워다나즈. 잘 기억해뒀다.”
“이 정도라면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다.”
‘아니...’
구본과 비지덱은 상식이 붕괴되는 느낌에 혼란스러웠다.
원래 2, 3시간은 걸려야 할 일이 지금 몇 분만에 끝났는데...
거기에 대해서 이런 반응이 말이 된단 말인가?
‘마법사들은 다 이런가??’
‘마법사들의 몸값이 비싼 이유가 있구나...! 정말로 비쌀 만하다!’
물론 파티에 참가한 마법사들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마력 소모를 아껴야 하는데 이런 준비에 마법을 쓰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이한을 잘못 만난 것 때문에, 두 모험가의 마법사에 대한 상식이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