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끝났을. 리가. 있겠나.
심연의 깊은 곳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끊기듯 터져 나왔다.
당연히 모든 생명체들이 자신의 강림에 겁에 질렸을 거라고 생각했던 구울의 왕은 자존심과 존재 양쪽에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웬 새파랗게 어린 마법사 놈 하나가 건방지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굴욕적인 건 그 타격이 크다는 점이었다.
빙의한 육신이 파괴되어버린 이상, 본체에도 타격이 갈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놈. 하나. 때문에. 잃어버린. 게. 많군. 그래.
구울의 왕은 죽어버린 용병을 멸시하며 힘을 끌어 모았다.
그 탐욕스러운 용병 놈이 눈치껏 일만 잘했다면 여유롭게 빙의할 수 있었으리라.
용병 놈의 실수 때문에 급히 빙의하려다가 이렇게 타격을 입은 것 아닌가.
불다학이 있던 자리에서 시커먼 힘이 일렁거리며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몰아쳐라, 페르쿤트라의 벼락이여!”
똑같은. 공격이. 두. 번이나. 통할. 것. 같으냐. 건방진. 마법사.
구울의 왕은 형체를 흩어버리더니 번개를 피했다.
그리고는 싸늘한 분노를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노이즈가 낀 것처럼 거슬리는 목소리였다.
구울의. 왕으로서. 자비롭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내게. 굴복해라. 내게. 무릎을. 꿇고.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해라. 그리한다면. 목숨은. 살려주마.
“속지 마라, 워다나즈! 빙의한 육신이 파괴된 이상 놈은 곧 자기의 차원으로 역소환된다!”
라파드엘은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다른 기사들의 검과 달리, 그랄 가문의 검에는 진은과 광령석이 섞여 있었다.
언데드들과 오랫동안 싸워 온 가문의 지혜였다.
“꺼져라, 언데드!”
벌레. 주제에. 짓밟히고. 싶어서. 날뛰는군.
라파드엘의 검격은 구울의 왕에게 데미지를 입혔다. 검이 닿자 형체가 불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너무나도 미약한 데미지였다.
구울의 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라파드엘을 후려갈겼다.
쾅!
굉음과 함께 라파드엘이 날아갔다.
“펼쳐져라!”
이한은 물의 형태를 변형해 라파드엘을 받아낸 뒤 검을 뽑아들었다.
흑자석으로 된 검. 새벽별.
마력을 빨아들이는 검인만큼 실체가 없는 이계의 존재를 상대하기 적합했다.
‘번개 마법은 통하지 않는다!’
방금 오간 공방에서 이한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상대는 마법의 전조를 읽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얼마든지 형체를 흩뜨리면서 공격을 회피할 수 있는 존재.
투사체 형태나 발사 형태의 마법은 직격시키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팍!
이한이 앞으로 발사됐다.
<고나달테스의 기민한 발걸음>으로 강화된 육체에 발끝으로 마력을 폭발시킨 덕분에, 달려 나갔다기보다는 발사됐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속도였다.
구울의 왕도 그 속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새벽별이 정확하게 형체를 베어 넘겼다.
으윽.
‘데미지는 들어갔는데...!’
분명히 상대의 형체에서 느껴지는 힘이 줄어들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빙의한 육신이 파괴되고 새벽별에 마력을 흡수당했는데도 이 정도 강함이라니.
믿기질 않았다.
에인로가드 상층에서 만났던 서리거인의 왕을 연상시키는 강함에, 이한은 바로 전략을 수정했다.
“더르규. 빠져나간다. 준비해!”
“...절대 혼자 희생하지 마라, 이한!”
“그럴 생각 없으니 움직여라!”
어디. 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구울의 왕의 목소리는 더욱 더 싸늘해지고 차가워졌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동굴의 기온이 내려갔다.
그리고 사방에서 구울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계획이. 수십. 년. 늦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벌레들은. 짓밟고. 가야겠군.
“닥쳐라. 언데드! 워다나즈의 이름 앞에서 어디서 건방이냐!”
“......”
이한은 전략을 고민하다가 친구들의 일갈을 보고 황당해했다.
이런 미친놈들이 지금 누구 상대로 도발을...?
* * *
다른 차원에서 소환된 존재들, 그 중에서도 특히 악한 존재들은 최대한 오랫동안 세계에 남아 있고 싶어 했다.
필멸자들의 욕망과 고통은 악한 존재들에게 달콤한 미주(美酒)였으니까.
물론 그런 만큼 필멸자들도 다른 차원에서 소환된 악한 존재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소식이 들려오는 즉시 전력을 보내서 역소환시키거나 힘들 경우 최소한 봉인이라도 성공시켰다.
구울의 왕은 제국 이전, 까마득한 고대에 봉인된 악한 존재였다.
원래라면 영원히 봉인되어서 나올 일이 없었을 테지만 오랜 세월과 변덕스러운 행운이 유물의 봉인을 파괴시키고 구울의 왕을 깨어나게 만들었다.
간신히 봉인에서 빠져나온 구울의 왕은 자신을 붙잡은 과거의 적들에게 이를 갈았지만, 그게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건 구울의 왕 본인이 잘 알았다.
필멸자들의 수명은 짧았고 적수들은 벌써 다 먼지가 되어버렸을 터.
그래서 구울의 왕은 회복에 집중했다.
봉인은 깨졌지만 전성기의 힘은 전부 사라진 상태였고, 자신을 봉인시켰던 유물에 역으로 몸을 의존하고 있는 초라한 꼴이었다.
만약 이 유물이 파괴라도 된다면 다른 차원으로 그대로 역소환되리라.
구울의 왕은 몇 개 남지 않은 미약한 권능으로 구울들을 불러내고, 밤을 틈타 구울들을 내보내 여행자들의 정기를 빨아먹었다.
그러나 영 시원치가 않았다.
스스로 현신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힘이 필요했는데, 여행자 수십 명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했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다고 생각한 구울의 왕은 전략을 바꾸었다.
몇몇 놈들을 살려 보내서 소문을 퍼뜨리기로.
보물이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면 탐욕스러운 모험가 놈들이 찾아오지 않겠는가.
그런 놈들을 구슬려서 몸을 빼앗는다면 힘을 회복하지 않고서도 이 동굴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한 마법사 놈이 찾아왔다.
워다나즈. 라고. 했나.
“그렇다. 그 이름을 두려워해야 할 거다!”
흰 호랑이 탑 학생의 외침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비지덱은 그제야 깨달았다.
워다나즈 가문!
제국 최고의 마법명가!
“...가 왜 여기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비지덱! 정신 차려!”
구본은 비지덱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베테랑으로서 파티에 참가했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나서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든 상대의 빈틈을 찾아내야 했다.
“그... 그렇지. 미안하다.”
허명. 따위는. 내게. 무의미하다.
구울의 왕은 모았던 힘들을 모두 소모하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침입자들을 전부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내버려두면 어떤 지원을 불러올지 모르는데다가, 무엇보다 상대 마법사의 강함이 매우 탐이 났다.
저 정도 육신이라면 차지할 경우 아까 그 허섭스레기 같은 모험가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 될 수 있으리라.
잡아라.
난전.
오늘 싸웠던 전투 중 가장 정신없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동굴에 있는 구울이란 구울은 모두 다 이쪽으로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타협하지 않겠나, 구울의 왕! 돌아가도록 내버려둔다면 우리도 더 이상 공격하지 않겠다.”
이한은 닥치는 대로 공격을 날려 길을 만들며 외쳤다.
구울의 왕은 비웃음 섞은 대답을 날렸다.
왕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다니. 통할. 것. 같나.
‘젠장. 어떻게 알았지.’
이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필요하다면 가문이나 명예도 걸 생각이었는데, 구울의 왕이 일체의 타협을 거부했다.
“강철로 화해라, 망토여!”
덤벼드는 구울을 망토로 갈라버리고 이한은 다시 외쳤다.
“마지막으로 경고하겠다. 구울의 왕! 타협을 거부한다면 이쪽도 방법이 있다.”
-■■! ■■!
-■■!
-■■■!
허세를. 떠는군.
구울의 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본체가 깃든 유물은 다른 곳에 위치해 있었고, 상대의 마법은 발사되기 전에 먼저 읽어낼 수 있었다.
전투가 지속될수록 구울의 왕이 가진 힘도 소모되겠지만 그보다 상대방이 먼저 쓰러지리라.
필멸자가 가진 육신의 한계란 건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좋다.”
이한은 각오를 다졌다.
어지간해서는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적의 강함을 봤을 때 물러설수록 위험했다.
위험하더라도 허세를 부려야했다.
“타올라라!”
뭐하나.
구울의 왕은 이한이 주문을 외치자 어이없어했다.
그렇게 협박을 해놓고 기껏해야 낮은 서클의 화염 주문이라니.
게다가 형태도, 속도도, 그 외의 다른 속성도 추가하지 않은 순수한 화염 소환이었다.
번개 속성의 공격도 읽어내고 피했는데 저런 공격을 맞을 리가 없지 않은가.
화르르르르르르르륵!
그러나 이한이 억제를 풀어놓은 화염은 미친듯이 치솟았다.
높은 동굴 천장을 찌를듯이 타오르는 화염의 범위에 구울의 왕은 드디어 놀랐다.
무슨.
고대에 수많은 마법사들을 쓰러뜨린 구울의 왕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넓은 범위의 광역 화염 마법을 쓸 거면 높은 서클의 마법을 쓰는 것이 당연하고, 수준이 부족해서 낮은 서클의 마법을 쓴다면 좁은 범위의 한정적인 화염 마법을 써야 하는데...
지금 눈앞에서 낮은 서클의 마법으로 넓은 범위의 광역기를 구사하는 마법사가 있었다.
비효율의 극치였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이한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불길을 더욱 불러냈다.
“타올라라, 타올라라, 타올라라!”
강한 마력을 머금은 불길은 서로 중첩되고 증폭되어 더욱 더 거세졌다.
어느 순간 이한은 동굴의 불길이 더 이상 통제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원소 통제력을 벗어나는 수준으로 화염의 규모를 올린 것이다.
무슨. 생각이냐.
“불길 속에서도 아까처럼 도망칠 수 있나?”
너희들이 먼저. 타죽을 터.
“마법사가 자기 마법도 통제 못하겠나. 생각보다 어리석군.”
미친듯이 초조했지만 이한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말했다.
그 순간 화염이 방향을 바꿔서 이한을 후려갈겼다.
‘젠장!’
이한은 온몸에 마력을 순환시키며 각오를 다졌다.
만약에 이 화염이 통제 불가능하다는 걸 들키면 상황이 꼬였다.
그 순간 따뜻한 힘이 몸을 타고 흘렀다.
불사조가 남기고 간 문양에서 흘러나오는 힘이었다.
“...!”
이한은 불사조의 문양이 주변의 화염을 밀어내고 통제하는 것을 느꼈다.
불사조를 죽이지 않고(사실 못했던 거지만) 놀아준 과거의 자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지금 상황에서는 절실한 힘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갈지 모른다!’
문양의 힘이 빛을 잃고 끝나기 전에 이한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주변의 화염이 파도치면서 옆의 구울들을 쓸어버렸다.
“봐라, 언데드 놈아. 이게 워다나즈다!”
“마법사 님의 힘이시다!”
구울의 피와 체액이 뚝뚝 떨어지는 무기를 들고서 학생들과 모험가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들도 설마 이 화염이 통제 불가능의 화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남은 구울 쓸어버리고 탈출로를 만든다!’
이한은 구울의 왕이 머뭇거리는 사이 다시 한 번 지팡이를 휘둘러 화염을 보냈다. 구울들의 숫자가 대폭 줄어들었다.
구울의 왕이 이한을 위협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이한은 구울의 왕을 진지하게 쓰러뜨릴 생각이 없었다.
주변을 전부 불바다로 만들어서 도망치지 못하게 한 다음 생사결을 벌인다니 무슨 볼라디 교수나 할 짓이지 않은가.
이한은 어떻게든 탈출만 하면 됐다.
상대가 협상에 응하면 응하는 대로 좋고, 응하지 않고 머뭇거리면 그걸 이용해야 했다.
‘...됐다!’
이한은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구울의 왕이 화염에 정신이 팔린 사이 뒤에 모여 있던 구울들을 모두 태워버린 것이다.
도주로가 생겼으니 이제 도주만 하면 됐다.
“워다나즈, 알았다!”
“라파드엘. 뭘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닥치고...”
“놈이 왜 저러는지 알겠다! 저 정도 힘을 갖고 있는데 동굴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숙주가 없는데도 저렇게 공격에 강한 것도! 답은 하나밖에 없다! 저건 분신이다! 놈의 본체가 깃든 유물이 따로 있는 거다!”
이한은 ‘그래 너 잘났으니까 나가서 이야기하자’라고 대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깨달음에 흥분한 라파드엘은 더르규와 앙라고를 보며 외쳤다.
“가자. 워다나즈가 목숨을 걸고 벌어준 기회다! 반드시 유물을 파괴해야 한다!”
라파드엘은 미친놈처럼 불길 틈새를 달려 동굴 안쪽으로 달려 나갔다.
앙라고도 바로 그 뒤를 쫓아갔다.
더르규는 건초 더미 사이에 낀 당나귀처럼 당황해하며 이한과 라파드엘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한숨을 쉬었다.
‘흰 호랑이 탑 놈들을 데리고 온 내 잘못이다.’
“가라. 샤르칸. 저 개새... 저 놈들을 도와라!”
감히.
“그러게 내보내줬으면 서로 좋았을 것 아닌가. 번쩍여라!”
이한은 이를 갈며 주문을 갈겼다.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번개가 훨씬 더 난폭하게 쏘아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