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설명을 들은 이한은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의 마력이 반발력으로 작용해서 손의 생기를 흡수했군... 왜 그렇게 무식하게 휘둘렀나?”
“다들 깨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더르규의 말에 다른 두 친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은 많았지만 지금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큰 부상은 아니어서 다행이군. 치료할 수 있는 것만 치료하자.”
이한은 <하급 자상(刺傷) 치유> 마법을 앙라고의 손에 시전했다.
그리고는 멈칫했다.
‘아차.’
생각해보니 옆에 믿을 만한 교수가 없을 때에는 괜히 이한이 멋대로 써서 좋을 게 없었다.
치유 마법이 실패할 경우에는 시도하지 않은 것보다 더욱 지독한 꼴을 볼 수 있었다.
“고맙다. 워다나즈.”
이한의 속마음도 모르고 찢어진 상처가 낫자 앙라고는 고마워했다. 이한은 살짝 시선을 피했다.
“라파드엘 넌... 음... 꼭 치유 마법을 써야 하나?”
“......”
라파드엘은 자존심 때문에 말로 하진 않았지만, 카드 게임에서 패배한 가이난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새삼 억울하고 서러워하는 표정!
이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하지 마라.”
“????”
마법이 끝나자 라파드엘은 깔끔하게 치유된 손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후회하지 말란 거지?
“더르규.”
“난 괜찮다. 이한. 힘들 텐데 마법 그만 써라.”
“아니. 마법의 문제가 아니라...”
이한은 더르규만 들을 수 있게 작게 속삭였다.
“...미완성이다.”
“뭐라고?”
“마법이 미완성이라고. 나도 정신없어서 뒤늦게 깨달았다.”
“......”
더르규는 경악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더니 친구들의 손을 쳐다보았다.
지금 재수가 없었다면 친구들의 손가죽이 붕대와 눌러 붙었을 것 아닌가.
“그러니까 너는 조금만 참았다가 포션으로 치료해.”
“...아니... 친구들이 그랬는데 나만...”
“저 자식들은 운 좋게 나았으니까 상관없어. 그냥 안전하게 포션으로 치료해라.”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거지?”
라파드엘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혹시 이 동굴에 남은 사악한 무언가가 있나 싶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참. 라파드엘. 까먹을 뻔했는데 덕분에 기억났군.”
“뭐지?”
퍽!
“누가 멋대로 튀어나가도 된다고 했나?”
“컥... 그게... 큭...”
* * *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구본은 이한이 친구들과 돌아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잘 끝난 모양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고생은 다 같이 했잖습니까.”
이한의 말에 구본과 비지덱은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단한 마법을 보여주던 마법사의 존중을 받았는데, 어느 모험가가 가슴이 뛰지 않겠는가.
그 흥분을 용병들도 느끼고 있었는지 와서 감사인사를 했다.
“마법사 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불다학 그 놈을 따라갔으면 뒤졌을 겁니다!”
“정말로 죽는 줄 알았는데...”
살점덩어리 구울과 구울의 대군세 습격, 구울의 왕 강림, 동굴 안을 모조리 태워버릴 기세로 날뛰던 화염...
다른 의뢰였다면 하나만 들어가 있어도 목숨이 위험한 위기를 한 번에 모아서 겪은 것이다.
살아나온 게 기적이라고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마법사 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의 감사를 받아주십시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용병들의 진심 어린 충성에, 구본과 비지덱은 새삼스럽게 놀랐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당장 구본과 비지덱도 저 어린 마법사에게 충성심이 생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범죄자나 마찬가지인 탐욕스러운 저 용병들도 감화될 줄이야.
어쩌면 이게 진정한 마법일지도 몰랐다.
“그래. 고맙다. 나도 경의를 표하며 받도록 하지. 잠깐 손을 주겠나?”
이한의 말에 가까이 있던 용병이 얼른 손을 내밀었다.
무슨 심부름을 시키든 불만 하나 없이 해낼 생각이었다.
철컥!
“...???”
뼈 구속구가 수갑처럼 손목에 채워지자 용병은 눈을 깜박였다. 이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발목에도 소환해서 채우고, 목에는 다시 뼈다귀 손을 소환했다.
아까 전투 때는 상황 때문에 모두 다 역소환했었지만 이제 끝났으니 다시 채워야 할 시간이었다.
“자. 다음.”
“어... 아니... 마법사 님...”
“조용히. 다음.”
이한은 용병들을 단단히 묶어서 아까 왔던 것처럼 진형을 만들었다.
구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용병들이 기분 나쁜 짓이라도 저질렀습니까?”
“예?”
“그게 아니라면 왜 갑자기...”
“아. 데리고 가서 포상금 받아야죠.”
“......”
구본은 할 말을 잃었다.
불다학 정도 되는 놈이면 모를까 여기 있는 나머지 용병들은 사실상 잡범이었다.
아마 몇 푼 정도 받을 텐데, 그걸 받아내려고 저렇게까지 철저하게 붙잡다니.
대체...!
‘저게 진짜 모험가인가? 내가 이제까지 너무 일을 방탕하게, 대충 해왔던 것인가?’
처음 의뢰 뛰는 모험가가 보여주는 광기 어린 철저함에 구본은 갑자기 반성하게 됐다.
“밖이다!!”
묶여서 끌려나왔지만 용병들은 바깥 공기에 깊게 심호흡하며 기뻐했다.
아무리 빛이 있더라도 동굴 안의 축축하고 음산한 공기는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한도 기지개를 피더니 구본에게 말했다.
“잠시 이 용병들을 지키고 계셔주시겠습니까?”
“예?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혹시, 무슨 일이라도...”
구본은 이한을 걱정했다.
그렇게 격렬한 전투를 펼쳤는데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당장 외투부터 엉망이 된 상태이라 더욱 걱정이 됐다.
혹시 사악한 마법의 부작용 때문에 사람들이 없는 외진 곳으로 향하려는 것일까?
“아. 라펠라 멧쥐를 포획하려고 합니다.”
“...그... 그러시군요.”
이한은 샤르칸을 데리고 숲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구본에게, 비지덱이 퍼뜩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내가 말했잖아! 저 마법사 님,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라고! 그 마법명가!”
“뭐라고 했... 아니. 잠깐. 잠깐 뭐라고???”
아까는 정신없어서 놓쳤는데, 구울의 왕이 동굴 안에서 등장한 것보다 방금 비지덱이 말한 게 더 놀라웠다.
누가 누구라고??
* * *
그랑덴 시 모험가 길드의 엘프 사무원, 블랑세는 구슬픈 표정으로 줄줄이 걸어 들어오는 용병들의 모습에 1차로 놀랐다.
그리고 매우 피곤한 얼굴로 보고하는 에인로가드 학생들의 모습에 2차로 놀랐다.
“뭐... 뭐가 뭐라고요?”
“불파른 언덕 동굴에 다른 차원의 사악한 존재가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구울의 왕이라고 칭하고, 꽤 예전에 봉인된 존재 같았습니다.”
블랑세는 빠르게 받아 적으면서 바로 서랍을 열고 급한 연락용 종이 새를 꺼냈다.
길드 창문을 통해 뛰쳐나간 종이 새들은 빠르게 날아갔다. 그랑덴 시에서 일하고 있는 제국 관료들이 허겁지겁 달려올 내용을 담고서.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토벌대가 편성되어서 그쪽으로 향할 겁니다.”
블랑세는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그런 위험한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첫 의뢰를 하는 에인로가드 학생을 그쪽으로 보내다니.
고의는 아니어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만약 사고라도 났다면 에인로가드 측에서 얼마나 개ㅈ... 아니, 얼마나 항의를 해왔겠는가.
이렇게 무사히 빠져나와서 천만다행이었다.
‘차라리 에인로가드 학생이어서 다행인 걸지도 몰라.’
영리한 에인로가드 학생이었으니 그런 사악한 존재의 낌새를 파악하고 빠져나왔지, 그렇지 않았다면 서투른 실수와 함께 전멸했을지도 몰랐다.
“토벌대 말입니까?”
“네. 다른 차원에서 넘어 온 사악한 존재는 약해 보여도 절대로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요.”
“아... 그. 저희끼리 토벌했습니다.”
“네?”
“일단 저희끼리 토벌했습니다. 급한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이...”
“그게 무슨...”
쾅!
달카드 가문에서 본 적 있던 첫째 다이할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흥분과 걱정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달카드 가문 출신의 제국 특수 행정관 다이할입니다. 다른 차원의 존재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다시 한 번 정확하게 설명을... 잠깐,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다이할은 이한을 보고 깜짝 놀랐다.
워다나즈 가문 출신인, 동생의 친구가 모험가들과 같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제가 발견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전문가가 발견하다니. 불행 중 다행인 일입니다.”
다이할은 이한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깃펜을 꺼냈다.
“상대는 스스로를 어떻게 칭했습니까?”
“구울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구울의 왕... 그런 칭호를 가진 존재가 당장 세 명 정도 떠오릅니다만, 이 세 명 모두 지금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정보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제가 만나 본 상대는 상당히 고대의 존재 같았습니다. 제국에 정보가 없어도 이상하지 않아보였습니다.”
“과연.”
다이할은 이한과 대화를 나누며 냉정함을 되찾았다.
다른 횡설수설하는 모험가들과 달리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이 동생 친구는 정말로 대화하기 편한 상대였다.
사건을 육하원칙에 따라 순서대로 빠짐없이 설명해주는 모험가라니.
‘아산은 에인로가드에서 정말로 좋은 친구를 만난 것이 틀림없다.’
다이할은 저택에 돌아가면 아산을 붙잡고서 친구를 본받아보라고 충고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산도 분명 그런 뜻깊은 충고에 고마워하리라.
“빙의를 시도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이런...”
“예. 그리고 구울을 꾸준히 불러내더군요.”
“한시라도 빨리 토벌대를...”
“저, 행정관 님?”
사무원 블랑세가 끼어들려고 했다.
지금 다이할 특수 행정관이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지금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최대한 빠르게 정보를 취합한 다음에 말씀드릴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그게...”
“죄송합니다.”
“아니...”
“그래서 그 구울의 왕이라고 자처한 존재가 또 어떠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까?”
“형체 분산, 음에너지 발산, 다른 차원 연결도 한 것 같습니다만 이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바로 특화된 전문가를 보내겠습...”
쾅!
“토벌했다고 했어요!!!”
참지 못한 블랑세가 의자를 발로 걷어차며 소리쳤다.
다이할은 당황스러워하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토벌했다고 했다구요! 토벌했다고 했어요! 토벌했다니까요!”
“그게 대체 무슨...”
“토벌하긴 했습니다.”
이한은 박살난 수정 해골을 꺼냈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오싹한 기운에, 블랑세와 다이할은 이 수정 해골에 어떤 존재가 깃들어 있었는지 본능적으로 느꼈다.
“고대에 봉인된 존재였는데, 아마 봉인이 뚫린 틈을 타 빠져나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말 토벌하신 겁니까?”
“예.”
“......”
다이할은 할 말을 잃었다.
유려하게 써내려가던 깃펜의 끝이 멈춰버렸다.
쾅!
길드 문이 다시 거세게 열리고 그랑덴 시 기사단 소속 기사가 들어왔다.
“다이할 경! 지금 소식을 듣고 소집 가능한 기사들을 불렀습니다. 신전에도 연락을 넣었으니 사제님들도 합류하실 겁니다. 바로 출발할 테니, 정보는 가면서 받겠습니다.”
“아, 아니. 토벌했습니다.”
“예?”
“토벌했습니다...?”
기사는 특수 행정관 다이할이 자신감을 잃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실로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모습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잠깐. 너희들은...”
기사는 다이할 앞에 앉아 있는 모험가들 중에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했다.
다른 기사 가문 출신의 어린 학생들이었다.
“...왜 목에 그런 걸 걸고 있지?”
그들은 <다시는 명령을 어기지 않겠습니다>라고 쓰여 있는 팻말을 목에 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