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혹시 분노한 건가?”
그럴 리가 있겠나... 나는 지혜의 투구. 추구자에게 지혜로운 답을 주는 것만이 목적인데, 그런 사사로운...
‘화난 것 같은데.’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보통 저런 식으로 길게 말하는 사람치고 화 안 난 사람이 드물었다.
물론 지혜의 투구는 아티팩트긴 했지만 앙심을 품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흠. 지혜의 투구... 너처럼 자아를 갖고,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질문에 대답까지 할 수 있는 아티팩트는 매우 귀하겠지?”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지혜의 투구는 반색하며 대답했다.
드디어 이 어린 학생이 자신의 가치를 깨달았나 싶었던 것이다.
지혜의 투구가 가진 목적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탐구하고 쌓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투구의 주인이 얼마나 위험해지든 말든 상관없었다.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투구의 주인이 투구에게 의존하며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하는데...
이 건방진 학생은 짐 더미 속에 던져놓고 한참 후에야 투구를 들어올렸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가치를 깨달은 것 같으니 용서해줄 수 있었다.
“고맙다.”
잠깐... 왜 질문을 안 하는 거냐? 한 달에 한 번씩 할 수 있으니, 될 수 있는 한 많이 하는 게 좋을 텐데?
“안 돼. 팔 때 귀찮아지거든.”
ㅁ...!
이한은 투구를 잘 포장해서 나무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반지와 함께 은화로 바꿀 생각을 하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 * *
요네르는 멀리서 걸어오는 이한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가 어둠의 골짜기로 걸어오는데 말릴 수가 없어서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난 진짜 말했다? 나중에 나한테 뭐라고 하면 안 돼?”
요네르는 걱정된다는 듯이 몇 번이고 말했다.
그랑덴 시 서쪽 길드 구역에 위치한 요아넨 메이킨의 연금술 공방.
연금술사 중 아는 사람은 모두 아는, 혹독한 지옥의 연금술 공방이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단 1초의 낭비도 허용되지 않는 장소.
요네르는 어렸을 때 언니 옷자락 잡고 놀러갔다가 겁먹고 엉엉 운 이후로 여기 공방에 가는 걸 피해왔었다.
“요네르. 내가 나중에 너한테 할 소리는 고맙다는 말밖에 없어.”
“...이한. 나도 은화 좋아하지만... 인생은 은화가 전부가 아닐지도 몰라.”
요네르는 자신의 입에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낯부끄러운 소리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은화가 전부는 아니지. 나도 알아. 그렇지만 은화가 있으면 편하잖나.”
“그렇긴 해.”
이한의 말을 부정하기에는 둘의 성격이 너무 비슷했다. 요네르가 무심코 인정하는 사이 이한은 공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ㄲ...”
철퍽!
들어가자마자 이한이 본 건 연금술사가 다른 연금술사의 얼굴에 물약을 끼얹고 있는 모습이었다.
“쓰레기를 만들었군. 나가라. 너 따윈 필요 없다.”
“무... 무슨! 내가 어디서 일했는지 알고서 그딴 소리를 하는 거야?! 청송 길드와 클라센 공방에서...!!”
“네가 어디서 일했는지는 관심 없다. 오로지 지금의 실력만 본다. 그리고 넌 쓸데없는 말로 내 시간을 더 낭비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골렘이 나타났다. 골렘은 연금술사의 양쪽 팔을 붙잡더니 공방 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지시를 내린 연금술사는 ‘다시 작업에 몰두하도록’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공방 안에 있던 연금술사들은 시선도 주지 않고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에인로가드인가?”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요네르가 약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방학 끝나고 친구 한 명을 잃게 될까봐 걱정이었다.
* * *
요아넨은 장갑을 낀 손으로 자수정 안경을 똑바로 고쳐 쓰며 둘을 맞이했다.
“반가워요. 기다리고 있었는데.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왔네요?”
“도시에서 명성이 자자한 이 공방에서 일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려서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
요네르는 이한을 착잡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친구가 아부에 뛰어나단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진짜 좀...
적절한 아부에 자수정 안경 너머의 요아넨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아직 저학년일 텐데 벌써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니... 소문이 자자한 이유가 있군요.”
“감사합니다. 잠깐. 소문이라면 뭘 말하시는?”
“발드로가드 출신 마법사와의 대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고 들었는데요?”
“그 소문에는 오해가 좀...”
“황족의 저택에서는 바실리스크를 제압했고요.”
“그건 맞긴 한데 거기에도...”
“며칠 전에 사악한 이계의 존재를 토벌하고 왔다고 들었는데.”
‘이 도시에도 혹시 교수들 게시판 같은 게 있나?’
에인로가드의 교수들처럼 빠르게 정보 공유가 되는 그랑덴 시 사교계의 무서움에 이한은 전율했다.
물론 명성이 퍼져서 나쁠 건 없었다.
하지만 자기 수준에 걸맞지 않은 명성이 퍼져봤자 독밖에 되지 않았다.
당장 이한을 ‘사악한 이계의 존재를 역소환시키시거나 바실리스크를 잡는 게 취미시군요’라고 오해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이한은 이미 에인로가드에서 그런 경험을 한 번 한 적 있었다. 두 번은 사양이었다.
“이계의 존재는 토벌 안 했을걸? 잘못 퍼진 걸 거야.”
요네르는 의아해하며 이한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한은 씁쓸해하며 말했다.
“사실 했어.”
“...언제?!”
“흰 호랑이 탑 놈들하고 모험가 등록하고서. 이 자식들이 쓸데없이 덤비는 바람에...”
“......”
요네르는 친구를 변호해주는 걸 포기했다.
이쯤이면 그냥 이한이 불운한 게 아니라 이한의 자업자득 아닌가 싶었다.
“너무 걱정하실 것 없어요. 공방에서 해야 할 일들은 그런 위험한 일들이 아니니까요.”
“진짜지?”
요네르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벌써 기분은 친구 잃기 30분쯤 전이었다.
“당연하지. 잘 생각해봐. 요네르. 여기 공방에서 일하고 있는 연금술사들은 적어도 십 년 이상의 경력을 갖고 있는 뛰어난 연금술사들이야.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1학년 학생을 바로 투입시킬 수는 없잖아.”
“그러게?”
요네르는 언니의 설득에 살짝 넘어갔다.
하긴 이한이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아직 연금술의 온갖 복잡한 비의를 배우지는 않은 상태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한은 요네르에게 작게 속삭였다.
“음. 요네르. 이런 말을 내가 굳이 하고 싶지는 않지만, 수준이 안 맞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부려먹을 수 있어.”
버두스 교수도 그랬듯이, 이한의 마법 수준이 아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한에게는 한 가지 특출난 장점이 있었다.
측정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한 마력량.
“그러니까...”
“참. 요네르. 이 편지를 오네트 부인에게 좀 전해드릴래? 오네트 부인께서도 널 오랜만에 보면 정말 기뻐하실 거야.”
요아넨은 둘의 대화를 자르고 요네르에게 편지를 건넸다.
편지를 받은 요네르는 불안함과 걱정이 섞인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마치 눈을 떼면 친구가 죽기라도 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엿보였다.
“갔다 와. 난 괜찮으니까.”
“...진짜 조심하고. 이한. 아까 말한 거 기억해.”
요네르가 문을 닫고 나가자 요아넨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까 동생이 무슨 말을 했는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인생은 은화가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걔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동생에 대한 확고한 신뢰에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자. 어쨌든... 동생도 갔으니 일을 시작해도 될까요?”
“예.”
“가죠.”
요아넨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방의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온갖 곳에서 쏟아지는 복잡한 향기가 연금술사의 공방이라는 걸 확실하게 느끼게 만들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요?”
“메이킨 님의 작업실입니까?”
“잘 맞췄어요.”
요아넨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찬장에 위치한 재료들을 불러왔다.
솥 안의 물이 차오르고 그 위에서 약재들이 다져졌다. 솥의 불길이 당겨지자 열기가 올라왔다.
“지금 만들려고 하는 물약은 <도브룩의 환혼 물약>이에요. 혹시 아시나요?”
“어떤 물약인지만 알고 있습니다.”
우레걸음 교수는 짓궂은 사람이었지만 어느 미치광이 뱀파이어 교수처럼 만들 수 없는 물약을 지금 당장 만들라고 협박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도브룩의 환혼 물약>은 지금 이한의 수준에서 만들 수 없는 고난이도의 물약이었다.
아직 이한이 사용할 줄 모르는 몇 개의 마법이 들어가고, 들어가는 재료와 사용법도 훨씬 더 복잡하고...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죠. 오늘 워다나즈 님께서 해주실 일은 이제 이 환혼 물약의 주 재료, 드라필라를 손질해서 집어넣는 거예요. 요약하자면, 제 조수 역할을 맡는 거죠.”
얼핏 들으면 상당히 간단하게 들렸지만 이한은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세상일은 그렇게 쉽게 은화를 벌 정도로 만만하지 않았다.
“집어넣을 때 주의해야 하는 게 있습니까?”
이한의 말에 요아넨은 눈빛을 빛냈다.
확실히 에인로가드 수석 학생인 만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가 빨랐다.
“여기 그림대로 손질하되, 혹시 <성분 증폭> 마법은 할 줄 아나요? 아직 배우지 않았을 것 같은데.”
“가르쳐주시면 배우겠습니다.”
“오늘 일정이 있으니까 30분 안에 배워주세요.”
요아넨은 슬슬 잔잔하게 광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요네르가 옆에 있었다면 ‘제발 정신차려 언니 내 친구란 말야’하며 말렸을 터.
어느 마법사가 처음 보는 마법을 30분 안에 배워달라고 한단 말인가.
“알겠습니다.”
그러나 이한은 당황하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았다.
이미 더 미친 사람들을 에인로가드에서 많이 겪었기 때문이었다.
요아넨은 지팡이 동작과 주문, 마법의 흐름을 간단히 설명해줬다.
“<성분 분리> 마법의 연장선으로 생각하면 수월할 거예요.”
“이해했습니다.”
“해보세요.”
이한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한 번에 성공시켰다.
요아넨은 감탄했다.
30분 안을 기대했는데 한 번에 성공할 줄이야.
정말 괜찮은 인재를 제대로 데리고 왔다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훌륭하네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드라필라의 액체 성분을 추출해서 증폭해보세요.”
이것도 간단했지만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뿌리 안에 액체 성분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식물, 드라필라는 추출하는 것부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억지로 힘을 줬다가는 액체가 나오기 전에 뿌리가 파괴되어 지저분하게 섞여버렸다.
이걸 해내기 위해서는 뛰어난 마력 컨트롤뿐만 아니라 물 원소에 대한 이해력과 경험도 필요했다.
콰득!
천조각을 쥐어짤 때 나는 소리와 함께 드라필라의 안에서 액체 성분이 추출되었다.
만약 공방에 다른 연금술사들이 있었다면 경악했으리라.
아무리 뛰어나도 그렇지, 1학년 학생이 벌써 이 정도라니.
그러나 요아넨은 고개를 저었다.
“성분에 불순물이 있습니다. 다시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요네르가 걱정했던 요아넨의 본격적 광기.
상대가 99를 해냈어도 100에서 1이 부족하니 다시 하라고 지적하는 완벽주의적 성격이었다.
다른 연금술사들이 있었다면 ‘메이킨 님 이러시니까 조수를 못 구하시는 겁니다 제발 진정해주십시오’라고 말렸을 테지만, 불행히 지금 이 작업실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한은 다시 액체를 추출했다. 요아넨은 아쉬워하며 말했다.
“추출에 낭비가 좀 있네요. 다시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네.”
“증폭에 문제가 있었어요. 변질이 있어서 다시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문제없습니다.”
원래라면 이런 고난이도의 과정을 성공시켰는데도 사소한 이유로 다시 하라고 한다면, 두 번째에 이를 악물고 세 번째에는 문을 열고 뛰쳐나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불행히 지금 이 작업실에는 제정신인 사람이 없었다.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거의 다 온 것 같아요. 다시 해주셔야...”
“예.”
* * *
요네르는 숨을 헐떡이며 문을 열었다.
“나 갔다 왔어! 무슨 일 없었지?!”
“딱히 없었는데.”
“작업 잘 하고 있었다니까.”
이한과 요아넨은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라는 뜻이 담긴 잔잔한 미소로 요네르를 반겼다.
요네르는 둘의 그 미소가 이상하게 오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