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선배가 하라고 하셨잖습니까?”
“그게 하란다고 되는 거면... 아니다. 됐다. 후배. 조용히 하고 통제에 집중해. 안 그래도 지금 힘들 텐데.”
디레트의 말이 맞았다.
안정적인 형태의 물 구슬과 달리, 암흑 구슬은 상당히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언제라도 실수 한 번에 형태를 잃고 사방으로 비산할 것 같은 낌새가 느껴졌다.
“이 상태라면... 날리는 건 무리겠고, 활용한다면 근접전 정도인가? 후배. 싸움 잘 해?”
뜬금없는 질문에 가이난도와 이미르그가 동시에 쿨럭였다.
“호신용 정도로만 익혔습니다.”
“하긴 귀족 가문이니까 검술을 안 배우진 않았겠네.”
다시 두 친구가 동시에 쿨럭였다.
“마법사가 꼭 싸움을 잘 할 필요는 없지만 가끔 근접전을 할 때가 생기거든. 그럴 때는 이런 마법도 생각보다 유용해. 후배. 부여 마법으로 다룬다면 더 안정적이겠지만 지금 그것까지 바랄 순 없겠지.”
“그런 거라면 화염 원소가 더 낫지 않습니까?”
“화염 원소는 생각보다 잘 버티는 적들이 많거든.”
화염에 대한 저항력을 가진 몬스터부터 시작해서, 노련한 모험가들은 보통 화염에 대한 방어 수단 한두개 정도는 갖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만큼 실생활에서 만나기 쉬운 원소였던 것이다.
“과연...”
“후배. 너 암흑 원소 언제까지 유지하고 있는 거야... 빨리 해제해.”
감탄하던 이한은 디레트의 지적에 정신을 차리고 암흑 원소를 해제했다.
“아까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사전에 예방하지 못해서 문제가 생겼을 때 상극인 아이템을 쓰는 것도 좋지만 암흑 원소를 다룰 줄 안다면 이런 것도 가능해.”
디레트는 아까 이한의 암흑 원소 폭발로 인해 남은 잔해들을 둘러보고 지팡이를 붙잡았다.
“암흑이여. 이 끝에 모여라.”
물 원소나 화염 원소를 불러내는 게 아닌, 기존에 있는 물이나 화염을 통제하는 방식의 마법.
“주변에 있는 암흑 원소를 전부 모으는 겁니까?”
“잘 맞췄어. 일종의 진공 상태를 만드는 거지. 암흑 원소를 마법사가 먼저 선점해버리면 언데드나 그쪽 계열 존재들은 상당히 취약해지거든.”
언데드들은 장점과 단점이 극단적인 존재였다.
그런 존재들을 상대할 때에는 강대강으로 부딪치는 것보다 약점을 찌르는 게 효과적이었다.
만약 구울의 왕을 상대했을 때 이런 방법을 알았다면 동굴을 불바다로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으리라.
‘역시 아는 게 힘이군.’
“흥미롭지 않나, 가이난도?”
“어? 어어? 어어어.”
옆에서 하품하면서 졸고 있던 가이난도는 이한의 질문에 놀라서 대답했다.
암흑 원소고 뭐고 별 관심 없었던 것이다.
“...이 자식이...”
“진정해. 후배. 지금 배울 필요 없는 내용이니까. 다른 거 공부하는데 머리만 복잡해질 수 있어.”
이한이 지팡이를 들려고 하자 디레트가 말렸다. 가이난도는 속으로 감동했다.
‘선, 선배님...!’
“저. 마법사 님들??”
삽을 들고 있던 붙잡힌 모험가들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이한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오늘 안에 보내준다고 했잖나.”
“저, 그게 아니라... 탑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자꾸 나서...”
“!!!”
* * *
그랑덴 시 외곽의 공동묘지는 무덤만 있지 않았다.
무덤을 둘러싼 담벼락은 물론이고 안에는 몇 개의 작은 탑들이 있었다.
묘지기들이 휴식하는 공간으로 쓰이거나, 장비를 갖다 놓거나, 혹은 흑마법사들이 묘지에 규모 있는 마법을 시전할 때 중심핵 역할을 하곤 했다.
당연히 안에 시체를 보관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마력 확인은 확실히 했나?”
디레트는 후배들에게 가르침을 주던 선배의 얼굴을 벗어던지고, 공동묘지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흑마법사로 돌아왔다.
이한은 메모한 종이를 꺼내서 확인하며 대답했다.
“예. 소리를 들었다고 말한 탑은 1번 탑 아니면 2번 탑인데, 둘 다 마력량은 정상이었습니다.”
“짐꾸러미 사이에 숨어 있던 몬스터가 짐을 옮기는 사이에 들어왔을 경우는?”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시야를 가리는 짐들은 해체해서 분산해놓았습니다. 공간 인지 마법에 암흑 시야 마법을 시전하고 확인했고, 끝낸 다음에는 창문을 닫아놓았으니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봅니다.”
“......”
진지하게 집중하려고 했지만 디레트는 새삼 간질간질한 뿌듯함이 밀려오는 걸 참기 힘들었다.
새로 들어오는 학생 많다고 자랑하는 다른 학파들 중에서도 저런 후배는 없을 것이다.
솔직히 데리고 나가서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 근데 저 후배는 다른 학파도 다 듣고 있지...’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디레트는 씁쓸해했다.
“선배?”
“저 모험가들이 잘못 들었거나.”
“아, 아닙니다! 저희들이 모두 다 제대로 들었습니다!”
“혹은 외부에서 들어왔거나.”
“그게 가능합니까?”
이한은 의아해했다.
짐꾸러미 사이에 숨어 있는 거면 모를까, 아예 밖에서 침입한 몬스터라니.
여기가 외진 곳이라 하더라도 엄연히 도시 안이었다. 몬스터가 대로를 돌아다니면 삼십분도 되지 않아 도륙될 가능성이 컸다.
“나도 그게 의문이야. 후배.”
“저 사람들이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이, 이런 거 아닐까요?”
이미르그가 손을 들며 말했다.
“가, 가끔 지하의 흙도 움직이는 경우가 있거든요. 여기 지, 지하에는 시체가 있으니까. 지하의 흙이 움직여서 공동묘지 밖으로 밀려나오면...”
“!”
지하의 흙이 밀려나와서 시체의 위치가 움직인다면, 그리고 운 나쁘게 마력이 그 주변에 고인다면, 공동묘지 안이 아니라 밖에서 언데드가 생성될 수도 있었다.
“그럴듯한데?”
“잘했어. 후배.”
“감, 감사합니다.”
이미르그는 이한과 디레트의 칭찬에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가이난도는 이미르그를 노려보았다.
“왜, 왜?”
“...앞으로 넌 내 라이벌이다.”
“......”
라파드엘은 이미 꺾었고(적어도 자기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한은 그냥 제외하기로 마음먹은 가이난도에게 이미르그의 활약은 결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
“흥. 누가 진정한 흑마법의 1등인지 겨뤄보자고.”
“그, 그건 그냥 워다나즈...”
“수색에 들어간다. 언데드여, 모습을 드러내라!”
주문과 함께 디레트의 지팡이에서 파장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2번 탑의 위층에서 번쩍임과 함께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
“저쪽이야! 가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혹시 모르니 방어를 갖추고 가셔야 합니다.”
이한의 말에 디레트는 멈칫했다.
‘어떤 방어 마법을 쓰려고?’
같은 방어 마법이라 하더라도 4학년인 디레트가 쓰는 게 나았지만, 상대는 평범한 후배가 아니었다.
디레트는 이한이 어떤 방어 마법을 쓸지 솔직히 궁금했다.
이번에도 예상을 뛰어넘는 마법을 보여줄...
“어이! 모험가들! 앞장서!”
“......”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 * *
이한과 디레트, 모험가들은 탑 위로.
이미르그와 가이난도는 탑 밖에.
계단을 빠르게 뛰어올라가며 이한은 물었다.
“자기 위치를 들켰다는 걸 놈도 알 텐데, 도망치지 않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적어. 후배. 공동묘지 밖에서 일어났는데도 일부러 힘을 키우려고 안에 들어온 놈이야. 호전적이고 겁이 없는 거지.”
“과연.”
일어났을 때 보이는 반응만으로도 그 언데드의 특성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소환된 장소에서 빠르게 멀어지려고 하면 신중하고 겁이 많은 놈이었고, 멀어지는 대신 자리를 잡으려고 하면 그 반대였다.
이번 경우에는 공동묘지에 흐르는 마력을 흡수하고 힘을 키우려는 것인 만큼 호전적이고 탐욕스러운 놈일 가능성이 높았다.
-■■■■■!!
“으아아악!”
“나타났다!!!”
앞에서 올라가던 모험가들이 비명을 질렀다.
위쪽 계단에서 거대한 덩치의 언데드가 굴러 떨어지듯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 모습을 본 디레트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젠장... 언데드 키메라다.”
강한 음의 마력이 단일 시체와 결합하는 대신 찢기고 뭉개진 시체들과 결합한 결과물.
여러 개체의 개성이 섞인 만큼 마법사 입장에서는 예측이 힘들고 상대하기가 까다로웠다.
디레트는 바로 언데드 키메라에게 약화 주문을 준비했다.
“쇠락...”
쾅!
언데드 키메라의 몸 안에서 폭발이 일어나더니 1/4 정도가 날아갔다.
그 폭발로 추진력을 얻은 언데드 키메라는 모험가들을 단숨에 짓이기는 대신 탑의 벽과 충돌했다. 약해진 벽의 부분이 무너져 내리더니 구멍이 생겼다.
“?!?!”
포악한 놈이 자기 몸의 일부를 희생하면서까지 탑의 벽을 뚫고 탈출하자 이한과 디레트는 당황했다.
아직 싸우지도 않았는데 왜 갑자기 도망을?!
“...선배. 화내지 말고 들어주시겠습니까?”
“내가 왜 후배 너한테 화를 내? 그냥 말해도 괜찮아! 뭔데?”
“아마 저 놈이 절 보고 도망친 것 같은데...”
“......”
디레트는 순간 지금 농담할 때냐고 화를 낼 뻔했다.
앞에 서있던 모험가들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과, 과연.”
“뭘 과연이냐!”
“죄... 죄송합니다!”
“언데드 중에서도 마력 감지 능력이 뛰어난 놈이 있잖습니까. 제 마력을 파악하고 도망친 것 같습니다.”
“...!”
디레트는 그제야 이한의 말을 이해했다.
단순히 포악하고 호전적인 놈이 아니라, 마력 감지 능력이 있고 그걸 이해해서 물러날 정도로 지능이 있는 놈이라면...
“일이 꼬이겠는데. 후배.”
-저거 도망간다!! 저거 도망간다!! 야 이 자식아! 거기 서지 못해! 쏘아져라, 뼈! 이미르그! 뭐라도 던져봐! 바윗덩이 던져!
-잘, 잘못 던지면 사람들이 다쳐서 안 돼...!
* * *
탑에서 내려온 디레트와 이한은 바로 추적을 개시했다.
“도시 경비대에 언데드 키메라가 나타난 것 같다고 연락해. 우린 우리대로 추적하자. 후배.”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법사 님!” 묘지기들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해했다.
원래 이건 묘지기들의 책임이었다.
언데드가 발생하지 않도록 평소부터 잘 확인을 해놨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묘지기들도 억울한 사안이긴 했다.
지하에서 움직인 흙 때문에 공동묘지 밖에서 언데드가 소환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가 발생하고 피해가 커지면 책임을 져야하는 건 사실.
그런데 흑마법사들이 도와주겠다고 나서니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다들 고마워 할 필요 없습니다. 이건 흑마법사들이 해야 할 일이니까.”
“과, 과연...”
선배가 너무 청렴결백하게 손해를 볼 것 같자 이한은 단호하게 끼어들었다.
“하지만 이 일을 누가 해결했는지는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시 경비대한테 제대로 사실을 전달하고 명예에 걸맞은 예우가 있어야 할 거라고 전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디레트는 황당하다는 듯이 후배를 쳐다보았다.
지금 급한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란 말인가.
“선배. 아무리 급해도 필요한 정보는 전달해야 합니다.”
“아니... 그게 필요한...? 일단 출발하자!”
디레트는 언데드 키메라가 남기고 간 마력을 추적했다.
공동묘지를 빠져나온 놈은 대로를 피해 골목길로 도망치고 있었다.
“마력을 느끼고 피할 줄 안다면 당연히 사람들을 피해야 한다는 것도 본능적으로 알겠지. 숨어버리면 골치 아픈데.”
“꼭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좋겠네. 도시에서는 조금만 늦어도 추적하기가 힘들어서... 아차. 이런.”
디레트는 혀를 찼다.
기껏 골목길을 빠져나왔는데 하필이면 놈이 들어간 곳이 길드 창고 부지였다.
“왜 그러십니까? 사정을 말하고 들어가죠.”
“힘들 거야. 후배.”
길드는 이런 부분에서 완고했다.
외부인을 들여보냈다가 물자에 문제라도 생기거나 기밀이 유출이라도 되면 그게 더 커다란 문제인 것이다.
언데드 키메라가 탈출해서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자기들끼리 잡겠다고 고집을 부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말이라도 해보겠습니다.”
“알겠어. 한 번 해봐. 대신 너무 매달리진 말고. 어차피...”
잠시 후 이한이 다시 돌아왔다.
“된답니다. 들어가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