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이한 님?!”
“예? 어? 뭐 실수했습니까??”
이한은 당황해서 쓰러진 기사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깊은 자상(刺傷)들부터 먼저 치료하고 나서, 회복력을 강화시켜주는 물약을 먹였다.
제대로 순서에 맞게 한 것 같은데?
‘뭘 빼먹었나?’
“아니... 아니. 치유 마법을 쓰실 수 있으십니까? 치유 마법은 멋대로 쓰시면...”
메흐리드 사제는 상처를 훑어보았다.
놀랍게도 꽤 깊은 상처였음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아문 상태였다. 메흐리드 사제가 뭐라고 조언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세상에!’
“...죄송합니다! 이 정도로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 아닙니다. 저도 급해서 쓴 거지 원래라면...”
이한도 치유 마법에 크게 자신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마법과 달리 실수 한 번 하면 환자의 상처가 더욱 악화되는데 부담이 안 갈 리 있겠는가.
지금은 워낙 급해서 손이 먼저 나간 거였지...
“안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와야 하지 않나.”
“그러니까 데리고 나오려면 최대한 많이 들어가야 한다고.”
“그건 알지만 왜 네놈이 지휘를 하냐 이거지.”
“그럼 네가 하겠다 이거냐?”
“이렇게 싸울 시간에 따로 들어가는 게 낫겠군.”
“너희가 앞에 들어갔다가 괜히 실수라도 하면 뒤에가 피해를 보는데 어디서 먼저 들어가려는 거냐? 따로 들어가고 싶으면 뒤에 들어와라.”
모험가들은 어수선하게 웅성거렸다.
안에 다친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데리고 나와야 하겠는데, 그러기에는 영 서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날아온 몬스터들이야 대부분 전멸했다지만 어쨌든 던전은 던전.
익숙하지 않은 인원으로 억지로 들어갔다가는 충돌이 일어나 크게 피를 볼 수가 있었다.
“잠깐. 혹시 저번에 구울의 왕을 토벌하신 분 아니십니까?”
떠들던 모험가 중 한 명이 치유 마법을 시전하고 있던 이한을 알아보았다.
핑계를 대고 치유 마법을 그만 시전하려던 이한은 갑작스러운 말에 멈칫했다.
“아니...”
“맞네! 마법사 님이셔! 구본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마법사 님이 아니었다면 던전에서 다 죽었을 거라고!”
“그 정도는 아니었...”
“차라리 마법사 님께서 이끌어주십시오! 그게 나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이한은 모험가 등록한지 반년도 안 된 사람한테 뭘 맡기냐고 되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바이샤다와 그엣세가 뒤에서 속삭였다.
“그냥 받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은데.”
“받지 않으면 모험가들은 단합하지 못할 거다. 지금 상황이 급한...”
“......”
이한은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라고 생각했지만 불행히 시간이 없었다.
이한은 한숨을 참으며 모험가들에게 외쳤다.
“들어라! 나는 구울의 왕을 토벌한 자요, 워다나즈 가문의 마법사다! 다들 나를 따라와라! 위대한 마법의 힘으로 너희들을 인도하겠다!”
“우... 우와와아아아아아!”
“역시 마법사 님!!”
“저 분이 누구신데?”
“아까 마법 쓰는 것도 못 봤냐?”
“너무 젊지 않나?”
“원래 마법사들은 마법으로 생김새를 조절한다잖아.”
1/3 정도만 이한이 한 일을 알고 나머지 2/3는 그냥 옆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대단한 마법사라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싶었다.
대단한 마법산가봐!
‘마법사라면 뭐... 잘 하겠지.’
‘저 새끼보단 낫겠지.’
이한의 소문을 들은 모험가들은 잔뜩 기대했지만 나머지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이한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해야 할 일만 한다.’
“눈이여. 암흑을 꿰뚫어라!”
이한은 대뜸 모험가 한 명한테 암흑 시야 마법을 시전했다.
너무나도 뜬금없는 마법 시전에 모험가들은 당황했다.
여기 있는 모두한테 하려는 것도 아닐 텐데 지금 무슨?
그러나 그 당황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눈이여. 암흑을 꿰뚫어라. 눈이여. 암흑을 꿰뚫어라...”
“!!!!”
“미, 미친!”
설마 모험가들 전원에게 강화 마법을 걸어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모험가들은 왜 마법사가 대단한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이래서 마법사를 그렇게 대우하는구나...!’
‘구본이 그렇게 칭찬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가자! 다음 주문은 움직이면서 시전하겠다! 발이여, 땅을 주름잡아라!”
이한은 던전의 입구로 움직이면서 외쳤다.
멍하니 서있던 모험가들은 홀린 듯 외쳤다.
“마법사 님의 뒤를 쫓아라!”
“마법사 님을 보호해라!!”
중구난방으로 흩어져있던 모험가들이 순식간에 질서정연하게 모여 이한의 뒤를 쫓아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바이샤다는 그 모습에 중얼거렸다.
“이게 진짜 마법이군.”
* * *
“움직이지 마! 상처가 덧난다!”
“여기 계속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빠져나가는 게...”
부상자들은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여기 계속 있어봤자 피 냄새를 맡은 던전의 원래 몬스터들만 더 상대해야 했다.
차라리 일단 빠져나가는 게...
“다들 가만히 있어라! 빛이여!”
“!!!!”
이한은 빛 구체부터 띄워서 천장에 박고 거대한 지하 공동에 진입했다.
텔레포트하면서 주변 암반이 무너졌는지 박살난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날아온 몬스터들은 전멸했지만 토벌대들의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다들 부러지고 베여서 바닥에 끙끙대며 누워 있었다.
‘젠장. 치유 마법 쓰기 싫은데.’
이한은 질색하며 지팡이를 붙잡았다.
“떠올라라, 감정이여! 공간이여, 인지되어라!”
감정 인지 마법과 공간 인지 마법을 동시에 시전하자 쓰러진 부상자들의 상태가 체계적으로 머릿속에 들어왔다.
이한은 상태가 안 좋은 부상자들부터 찾아서 달렸다.
‘제발 치료할 수 있는 상처여라!’
다행히 부상자들의 상처 대부분은 육박전에서 나온 상처였다. 부러졌거나 베인 상처들이라면 이한도 어찌어찌 할 수 있었다.
“붙어라! 아물어라!”
응급처치를 끝낸 이한은 다급히 외쳤다.
“물약 갖고 와!”
“마법사 님! 이 사람은 물약 먹여도 됩니까?”
“잠시 기다려! 큰 부상은 치료하고 먹여야 한다!”
상처 회복의 물약 같은 건 보통 치유력을 향상시켜서 부상을 낫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무난하고 안전한 방식이었지만 중상 여러 개를 입은 상황에서 물약을 마셔봤자 치유력이 분산되서 효과가 약해졌다.
이럴 때 요령은 급한 중상을 먼저 마법으로 낫게 하고 물약을 마시게 하는 거였다. 그러면 자잘한 상처까지 회복이 가능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빨리...?”
“부상자는 입 다물고 있도록!”
이한은 다친 사람의 응급처치를 끝내고 모험가에게 넘겼다. 모험가들은 허겁지겁 들것에 부상자를 올리고 위로 바람처럼 달려나갔다.
‘강화 마법????’
쓰러진 기사는 눈을 깜박였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모험가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아티팩트를 찼거나 강화 마법을 시전한 움직임이었다.
‘여기 전부가...?? 대체 뭐지? 처음 보는 자들인데??’
처음에는 운 좋게 이름 있는 모험가 파티가 온 줄 알았는데, 아무리 봐도 장비나 복장이 통일성 하나 없었다.
그렇다면 그냥 모험가들한테 강화 마법을 걸었다는 게 되는데, 그게 말이 되나?
주변에 심심하고 마력 넘치는 마법사들 수십 명이 소풍이라도 나온 게 아니라면...
“쿨, 쿨럭. 잠깐. 마법사 님.”
기사는 재빨리 이한의 손목을 붙잡았다. 울컥한 이한은 뺨을 때릴 뻔했다.
‘다쳤으면 가만히 좀 있지.’
지금 피가 줄줄 새는데 부상자가 움직이는 걸 보니 고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래서 알카시스 교수의 성격이 더러워진 건가??
“뭐지? 손 놔라.”
“저 말고, 여기 젊은 기사들부터... 젊은 기사들부터 치료해주십시오. 마력이...”
기사는 경력이 꽤 있는지 마법사들의 마력이 한정되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자기부터 치료했다가 젊은 기사들이 치료를 못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말을 꺼낸 것이다.
물론 이한은 무시했다.
“가만히 있도록. 아물어라!”
“안 돼... 커헉.”
“가만히 있으라고. 이봐! 응급처치 끝났으니까 위로 데리고 가라!”
이한은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기사를 위로 올려 보냈다. 모험가 두 명이 재빨리 기사를 들고서 위로 달려나갔다.
“위... 위험... 던전에서 이러면...?”
기사는 아픈 와중에도 중얼거렸다.
여기가 어느 던전인지는 몰라도 던전에서 이렇게 무방비하게 움직이면 안 됐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몬스터라도 있으면 대형사고가 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는 길이 이상하게 너무 밝았다.
“????”
기사는 당황해하며 통로 천장을 쳐다보았다.
밝게 타오르는 빛의 구체들이 간격마다 배치되어 있었다.
“...????”
* * *
바이샤다는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을 황무지 별잡이 대신 그림자 순찰대를 골랐을 때부터 좋아했지만, 지금 모습을 보자 더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됐다.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수십 명이 넘게 널브러져 있던 아수라장을 혼자의 힘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모험가들에게 강화 마법을 시전해서 뜻을 한 곳으로 모으고, 던전 통로를 대낮처럼 환하게 만들더니, 아래에 쓰러진 중상자들을 쉬지 않고 회복시킨 후 위로 올려 보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마법사들은 많았지만 이렇게 전력으로 헌신하는 마법사는 제국에 없으리라고, 바이샤다는 분명히 확신했다.
-크르륵!
“!”
공동 아래쪽 길에서 나는 소리에 바이샤다와 그엣세는 바로 활을 들었다.
이럴 때 활약하려고 둘이 따라온 것 아니겠는가.
이한이 치유 마법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움직여라, 독이여!”
이한은 중독된 기사의 상처에서 독을 빼냈다.
그리고는 그 독을 쏘아보냈다.
“쏘아져라!”
-크레레레렉!
타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가 바닥에서 뒹굴었다.
바이샤다와 그엣세, 닐리아는 황당하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고 동시에 외쳤다.
“치유 마법에 전념해!!”
“치유 마법에 전념해도 된다!!”
“치유 마법에 전념하라고!”
“......”
이한은 쓰러진 기사 한 명을 더 치료해서 올려 보냈다.
슬슬 공동에 빈 공간이 많이 보이고, 뼈가 부러진 정도의 부상자들만 남자,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됐구나.’
여기 도착했을 때만 해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는데 행운이 따라줬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부상자들을 수습해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법사 님! 지원이 도착했습니다!”
“지원이? 잘 됐군.”
이한은 위에 부상자를 놓고 돌아온 모험가의 보고에 반색했다.
“사제분들이 왔나? 어느 교단의 사제분들이지?”
“아닙니다. 부상자들의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한두 교단의 사제분들로는 해결이 힘든 모양입니다.”
“그러면?”
“전문 치유 마법사들을 불렀다고 하는데요?”
“다행이야. 잘 됐군.”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도시에 있는 교단에 연락을 보내서 지금 부를 수 있는 사제들을 찾는 것보다는 대기하고 있는 치유 마법사들을 한 번에 소환하는 게 훨씬 더 빨랐다.
보통 이럴 때 불려오는 치유 마법사들은 집단으로 움직였다. 부상자들이 많을 경우 마법사 혼자서는 절대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치유 마법사들이 도착한 이상 이제 뒷일은 마무리되었다고 봐도 됐다.
이한이 어설프게 실수를 했어도 치유 마법사들이 수습을 해주리라.
“감사합니다. 마법사 님. 으흑흑...”
“마지막! 다 됐다. 올라갑시다!”
마지막 남은 부상자까지 수습하고 나자 이한은 공동에 있던 사람들에게 외쳤다.
모두 박수와 환호성을 터뜨리며 올라갈 준비를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마법사 님!”
“여기 있는 기사님들이 목숨 건진 건 정말로 다 마법사 님 덕분입니다!”
모두가 환호하는데 닐리아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이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아까 전문 치유 마법사들을 불렀다고 했지?”
“그랬지?”
“...뭔가 떠오르는 게 없는 거야?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