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평소라면 바로 위기를 알아차렸을 이한이었지만, 낮에는 아티팩트 저주 해제하고 저녁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화 마법 걸어주고 치유 마법까지 걸어준 터라 정신이 둔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닐리아보다 한 발짝 늦게 깨달았다.
“...설마 에인로가드에서 오나?!”
“나라면 그럴 것 같은데.”
닐리아는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한 정도 되는 사람이 자신도 알아차릴 만한 걸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아니. 마법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 걸지도.’
닐리아는 갑자기 걱정이 되어서 친구를 쳐다보았다. 이한은 닐리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속삭였다.
“걱정 마라. 교수님이 끌고 가도 네 이름은 안 불 테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도 않았어! 이 자식아!!”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 * *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얼굴을 한 다크엘프 교수는 검으로 몸을 지탱한 채 꾸벅꾸벅 고개를 졸았다.
그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피곤해보였기에 모험가들은 감히 말을 걸지도 못했다.
“교수님. 마무리했습니다.”
“교수님. 이쪽도 끝났습니다.”
“교수님. 이쪽도...”
알카시스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저희끼리 해결했습니다!”
“저 정도로 응급처치해서 나온 상태면 당연히 너희들끼리 해결해야지. 날 불렀으면 너희들은 도둑놈 새끼들 그 자체다.”
“......”
상냥한 스승의 따뜻한 격려에 제자들은 울컥 감동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자. 그래서. 지금 내가 과로와 수면부족으로 미쳐버린 거냐? 아니면 모험가들이 헛소리를 하는 거냐? 그도 아니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게 맞는 거냐?”
“......”
제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그들도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지금 치료가 되서 올라오고 있는데 사제들이 아래에 내려가 있습니까?
-마법사 님 한 명 내려가 있습니다!
-한 명이요? 한 명??
-예!
-한 명이서 이 인원을 이렇게 치료를 했다고요??
-예!
-혹시 정신착란 아니야 이 모험가?
-...감히! 아무리 치유 마법사라 하더라도 워다나즈 님을 모욕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저희가 아는 워다나즈는 그... 1학년밖에 없는데... 걔가 그... 오해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필과 칠은 이한을 위해 변명에 나섰다.
그리고 솔직히 믿기지도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후배라 하더라도 이만한 인원들을 모두 살려서 올려 보내다니.
그것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던전 통로를 확보하고, 모험가들에게 강화 마법을 걸고, 이 모든 걸 다 하면서 치유 마법까지?
그보다는 그냥 워다나즈 가문의 다른 마법사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이 참상을 보고 도와줬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였다.
“내가 알기로, 워다나즈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이유로 일을 도와주지 않는다.”
“그러면 역시 모험가들이 착각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낯이 익은 1학년 후배가 모험가들과 함께 지친 표정으로 올라왔다.
후배는 치유 마법사들을 둘러보더니 체념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필과 칠은 똑같이 가슴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적당히 잘했어야지...!’
후배가 도망치기도 전에 회복된 기사들이 우르르 이한을 둘러쌌다.
기사, 버히르그는 토벌대 기사들을 대표해서 외쳤다.
“여기, 명예로운 마법사가 있습니다. 워다나즈 가문의 마법사, 이한 님에게 모두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이한 님!”
“감사합니다!!”
쓰러졌던 기사들은 목청을 짜내듯이 외쳤다.
고고하고 자존심 강한 기사들이 이렇게 감사인사를 하는 광경은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흥분한 모험가들은 발을 구르고 휘파람을 불어댔다.
“이한 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목숨을 구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 놀라운 마법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기사들이 이야기하는 사이 모험가들은 뒤에서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용케 정말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다 데리고 나왔다.”
“이게 마법이구나, 싶더라고. 내가 저번에 화염 화살 날리는 마법사를 보고 감탄한 적 있거든? 앞으로는 절대 안 그럴 것 같아.”
“그런데 마법사 님은 왜 표정이 어두우시지?”
“쯧쯧. 마법사 님이 너 같은 사람이겠냐? 이렇게 다친 사람들이 많은 와중에 칭송 받는 게 불편하신 거겠지.”
“과, 과연. 정말 차원이 다르시군...”
* * *
버두스 교수와 알카시스 교수의 차이점이 있다면, 버두스 교수 앞에서는 꾀병이 통하지만 알카시스 교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프다고 하는 순간 알카시스 교수는 바로 회복시킬 능력이 있었다.
“매우 인상적이었다.”
“감사합니다.”
이한은 피곤한 얼굴로 알카시스 교수 앞의 의자에 묶여, 아니, 앉아 있었다.
좀 묶여 있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었다. 어딜 봐도 밧줄은 보이지 않았다.
같이 알카시스 교수를 따라온 제자들, 그러니까 이한의 선배들은 반반으로 나뉘어서 뜨겁게 토론하고 있었다.
토론 주제는 이한의 처분이었다.
-저 정도 실력이 있으면 정말 2학기부터 데리고 다녀도 된다! 아니, 저 정도면 당연히 데리고 다녀야지! 마력 부족 때문에 내가 어제도 몇 번을 토했는데! 저 후배 한 명이 부상자 수십 명을 맡는 거야!
-양심 없는 쓰레기 같은 놈아! 네가 그러고도 귀족이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학년 후배를 2학기 때부터 데리고 다닐 생각을 해? 후배가 말라죽는 게 보고 싶은 거냐?
“널 2학기 때부터 현장에 참여시킨다는 말에,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지.”
“교수님. 저는 특혜를 싫어합니다.”
이한은 진지하게 말했다.
“만약 교수님께 부담이 되는 일이라면 저는 괜찮...”
“하지만 오늘 일을 봤다면 그 말을 한 사람들은 자기 혀를 뽑고 싶을 거다.”
‘그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너는 치유 마법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
“예... 그럴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해왔었습니다.”
“그 재능을 굳이 시간을 두고 썩게 할 필요는 없지. 내 손을 잡아라. 네 재능을 개화시켜주겠다.”
“......”
이한은 교수의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되는지 상당히 궁금해졌다.
구체적으로는 저기 뒤에 있는 선배들처럼 되는 건지 궁금했다.
저 선배들은 왜 방학 때 교수님과 같이 있단 말인가?
“저택에 가서 깊이 고민을...”
“...할 필요가 없지. 그럴 필요가 없는 재능이니까.”
“그러고 보니 제가 사제님들하고 이야기 할 게 있...”
“제자들을 보내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겠다.”
“생각해보니 사냥꾼들에게 전할 말도 있었습니다.”
교수의 제자들은 인간 벽을 만들어 사냥꾼들의 접근을 막았다.
두 사냥꾼은 치유 마법사들의 황당한 방해에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대체 무슨 추잡한...?
“이게 뭐하는 거요?”
“죄, 죄송합니다. 저희도 시켜서 하는 겁니다.”
이한은 교수의 압박을 뚫고 정면돌파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
어차피 2학기 때 이미 교수에게 갈려나갈 것 같은데, 굳이 방학 때부터 갈려나가야 하나?
‘2학기 때 보복 좀 당한다 하더라도 방학은 지키는 게 낫다.’
이한은 알카시스 교수가 차고 있는 검들을 보며 각오를 다졌다.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이한 또한 혹독하게 훈련 받은 사람.
쉽게 물러나지는 않으리라.
“끝났어?”
“......”
이한은 낯익은 다른 교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버두스 교수가 언제 왔는지 하품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교단에서 던전 확인하러 갔다길래 행사 끝내고 왔는데.”
버두스 교수는 지금 던전 근처에서 벌어진 난장판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부상자들이 붕대를 감고 누워 있는데도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혹시 던전에서 아티팩트 나온 거 있어?”
“제가 알기론 없는데요.”
“그래? 그럼 됐고. 가자. 작업해야지.”
버두스 교수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한을 끌고 마차에 가더니 출발해버렸다.
남은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잃어버리고 그 뒷모습만 빤히 쳐다보았다.
‘진짜...’
‘미친 사람인가???’
치유 마법을 전공하는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은 버두스 교수의 모습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알카시스 교수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사냥꾼들은 황당해하며 닐리아에게 물었다.
“아니... 쉬어야 하지 않나? 방금 작업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 네. 좀 특이한 분이셔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하시네.”
‘그러니까!’
닐리아는 속으로 외쳤다.
오죽하면 프리싱가 교단의 사제들도 수군거릴 정도였다.
* * *
이한은 저택으로 돌아와 버두스 교수와의 작업을 마치고 쓰러졌다.
그리고는 하루 가까이 잤다.
“...아침에 잔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아침이지??”
“하루 주무셨습니다.”
“......”
이한은 착잡한 얼굴로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버두스 교수가 양탄자 위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못 본 척 해야지.’
“그런데 도련님... 손님이 또 오셨는데요.”
이한은 순간 저택 앞에 <손님 사절>이라고 붙여야 하나 고민했다.
이쯤되면 손님인지 손놈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교수인가?”
“아닙니다.”
“친구인가?”
“아닙니다.”
“혹시 미친 사람 같... 아니다. 그럼 교수라고 했겠군. 누구지?”
“보가준 황자님이십니다.”
“아. 그...”
저번 황족 모임 때 이한이 바실리스크를 쓰러뜨린 덕분에 목숨 구한 황족 중 한 명이었다.
이것저것 말은 많이 했던 것 같은데 기억나는 건...
‘클드란 마을 역병 사건 해결하려다가 실패했다고 했었나?’
황족들이 서로 워낙 활기차게 비판을 해대니, 기억에 남는 게 서로에 대한 비판밖에 없었다.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소문은 들었습니다!”
“바실리스크를 잡은 것 말입니까?”
이한은 반쯤 포기하고 물었다.
사고라고 해봤자 사람들은 자기 좋을 대로 들을 것 아닌가.
“앗. 그 소문을 말한 게 아닙니다.”
“구울의 왕 토벌입니까?”
“구울의 왕을 토벌하셨습니까? 그 이야기도 자세히 들려주시죠.”
‘이런 젠장.’
이한은 그랑덴 시에 분노했다.
뭔 놈의 소문이 이렇게 많이 퍼져서 말하는 사람이 고민해야 한단 말인가?
“그럼 무슨 소문을...”
“홍련숲 토벌대의 기사들을 구해주셨다면서요! 저는 정말로 감동했습니다.”
“......”
“제국에 많은 마법사들이 있고, 그 중에 뛰어난 마법사들도 있지만, 부상당한 사람들을 위해 던전을 뛰어 내려가 목숨을 걸고...”
“목숨 안 걸었습니다. 호위 다 데리고 갔고 몬스터도 거의 전멸한 작은 던전이었는데요.”
보가준 황자는 스스로에게 잔뜩 취해 있는 상태라 이한의 말을 듣지 못했다.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라그린데 경께서도 칭찬이 자자하셨습니다. 치유 마법사로서 대성할 자질이 있으시다고 말입니다.”
이한은 씁쓸하게 웃었다.
황자한테 ‘농장의 돼지한테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고 말하는 건 칭찬이 아닙니다’라고 하고 싶었지만, 해봤자 이해도 못하는데 무엇하러 말하나 싶었다.
이한은 감정을 추스르고 가식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어쩌다 우연히 휘말리게 된 일에 지나칠 정도로 명성이 붙어서 당황스러울 뿐입니다.”
“무슨 말씀을... 명성이란 곧 영혼을 반영하는 것. 그럴 만한 영혼의 그릇을 가지고 계셔서 명성이 나오는 겁니다.”
보가준 황자는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워다나즈 님. 제안할 게 있습니다.”
“말해보시죠.”
‘무조건 거절해야지.’
“이번에 모임이 있는데 저와 함께...”
똑똑똑-
하인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손님이 또 오셔서요.”
“누구지?”
“가이난도 황자님이십니다.”
하인의 말에 보가준은 깊게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역시...!’
저번 저택에서 발톱을 숨긴 걸 봤을 때부터 수상하다 싶었는데, 역시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