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되겠군!’
원래 황족들은 서로를 믿지 않았다.
온갖 음모와 계략이 판치는 곳이 제국 사교계.
그리고 황족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지독한 심계를 갖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황족들을 잠시나마 방심시키고 속여 넘기다니.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보가준은 가이난도에 대한 경계심을 급격히 끌어올렸다.
‘바보 연기로 경계를 회피하다니...’
말이 바보 연기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악명과 혹평을 견딜 수 있는 강철 같은 끈기가 있어야 했다.
그런 점을 생각하자 보가준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오랫동안 바보 연기로 다른 황족들의 경계심을 피하고, 뒤로는 자신의 힘이 될 수 있는 강력한 귀족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니...
어쩌면 이 어린 동생이 황족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경쟁자일지도 몰랐다.
“정말 오랜 고민 끝에 새 덱을 만들... 어?”
문을 열고 들어온 가이난도는 보가준을 보고 놀랐다.
“누구세요?”
“......”
이한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미친놈아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황족들이 만나면 서로 욕하는 게 취미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의범절을 지키면서의 이야기였다.
‘이번에 벌이신 일이 실패해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라고 놀려야지 ‘너 누구냐?’는 예의에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소리.
이한은 이 자리에 다른 귀족들이 없다는 것에 감사했다.
‘셋밖에 없어서 다행이군.’
“크... 크크크!”
본색을 드러낸 가이난도의 모습에, 보가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악하고 음습한 동생이 드디어 가면을 벗어 던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가이난도는 그 웃음에 당황했다.
‘미친 사람인가?’
“교수님이야?”
“...황자 전하시잖아 가이난도? 농담하지 마라.”
이한은 가이난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가이난도는 어깨뼈가 비틀리는 고통에 뇌세포가 활성화됐다.
“아! 아악! 기억났어! 황자! 황자 전하셨지!!”
“그래. 죄송합니다. 황자님. 가이난도가 농담을 좋아해서요.”
“더 이상 숨겨줄 필요 없습니다. 워다나즈 님.”
보가준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 눈빛에는 가이난도를 무시하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강력한 경쟁자로서 의욕을 불태우는 이글거림만 가득했다.
‘뭔지는 몰라도 좋지 않다.’
이한은 불안함을 느꼈다.
보가준 황자가 가이난도의 방문에서 이상한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내버려둬서 좋을 게 없었다.
가이난도는 말할 기회가 많아질수록 평판이 떨어지는 성질을 갖고 있었으니까.
-가이난도. 저번에 했던 것처럼 해라.
이한은 손가락 3개를 폈다.
대답을 ‘예’, ‘아니오’, ‘후후’로만 하란 뜻이었다. 가이난도는 어깨를 문지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난도 황자가 얼마나 커다란 야심을 품고 있는지는 이미 알아차렸으니 말입니다.”
“아니...”
이한은 황급히 시선을 보냈다.
빨리 부정하란 뜻이었다.
‘빨리 아니라고 말해!’
“후후.”
“......”
가이난도는 이한의 시선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보가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다나즈 님. 같은 에인로가드 출신으로서 친우 분을 지지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지지 안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워다나즈 님처럼 뛰어난 안목을 가지신 분이라면, 더 자격 있는 황족이 나타날 경우 그 황족을 지지할 거라는 걸.”
“아니 지지고 뭐고 별 관심이 없...”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곧 그 자격을 증명해보이겠습니다.”
보가준은 오연하게 선언했다.
물론 가이난도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이한은 어이없어했기 때문에 별 효과는 없었다.
“그럼 모임에서 보도록 합시다. 가이난도 황자.”
“예.”
“......”
이한은 깊은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대답을 3가지로 좁혔는데도 역효과가 나다니.
‘그냥 입을 꿰매버려야 하나?’
“저... 도련님. 손님이 또 오셨습니다.”
하인의 외침에 이한은 저택 정문에 <손님 사절>이라도 붙여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누구지?”
“주드란타스 황녀님께서...”
“흥. 한 발 늦었군.”
보가준은 주드란타스를 비웃었다.
아마 주드란타스도 여기 오면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보가준이나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정말 위험한 경쟁자는 저 어린 황족 중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 * *
“!!!”
예상대로 주드란타스는 보가준과 똑같이 놀라고 똑같이 행동했다.
그리고 말까지 똑같았다.
“워다나즈 님처럼 뛰어난 안목을 가지신 분이라면...”
“...더 자격 있는 황족이 나타날 경우 그 황족을 지지한다는 겁니까?”
“역시!”
“제가 거기에 동의한다는 게 아니라...”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곧 그 자격을 증명해보이겠습니다.”
‘사실 저 둘이 친한 거 아닌가?’
똑같은 말을 하는 두 황족의 모습에 이한은 이제 대꾸하기도 귀찮아졌다.
“알겠습니다.”
“그럼 모임에서 보도록...”
황족들이 모두 떠나고 나자 가이난도는 해맑은 모습으로 덱을 꺼냈다.
“새 덱 만들어왔는데 붙... 악! 왜 때려!”
이한은 지팡이를 들고 가이난도의 등짝을 때리기 시작했다. 가이난도는 비명을 지르며 방 안을 빙글빙글 도망쳤다.
한 시간 후.
이한은 한숨을 쉬며 마법사 카드를 손에 쥐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등짝 수십 대 맞은 친구 소원 정도야 들어줄 수 있었다.
“후후. 이번에는 다를 거야.”
“입 다물고 조용히 해라.”
“응...”
가이난도는 조용히 카드를 뽑았다.
마법사 카드라고 불리는 이 게임은 자기 차례마다 하수인을 내고 마법 주문을 사용해 상대 마법사의 생명을 0으로 만드는 게 승리 조건.
당연히 초반에는 마력이 없으니 약한 하수인과 주문밖에 쓰지 못했고, 후반에는 마력이 넘쳐나니 강한 하수인과 주문을 쓰는 게 가능했다.
즉 초반에 쓸 수 있는 약한 하수인과 주문, 후반에 쓸 수 있는 강한 하수인과 주문 모두 균형 잡히게 넣어야 좋은 덱이 되는 것!
물론 법칙이고 뭐고 가이난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강한 카드로만 덱을 꽉꽉 채워왔었다.
‘후후.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지.’
가이난도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카드를 내려놓았다.
이한은 그 카드를 보고 의아해했다.
‘잠깐. 이거 설마...’
승리조건에 상대 마법사의 생명을 0으로 만드는 것만 있지는 않았다.
상대방 덱에 남은 카드가 완전히 사라져도 승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 가이난도가 낸 흑마법 주문 카드는 상대 덱의 카드를 세 장 날리는 카드.
“가이난도. 혹시 덱 파괴 덱을 만들어 온 거냐?”
“아, 아닌데?”
허를 찔린 가이난도가 시선을 피하며 부정했다.
“예전에 그 이상한 덱보다는 낫긴 한데... 이거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나?”
세상에는 언제나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마법사 카드 게임도 마찬가지였다.
저런 식의 덱 파괴로 이기는 건 서로 교양 있게 노는 즐거운 자리에서 반칙에 가까운 짓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한이 보기에는 알 게 뭐냐 싶었지만...
“알 게 뭐야! 난 이길 거라고!”
“그, 그래라.”
이한은 말과 함께 카드를 준비했다.
가이난도가 자기 차례를 끝내는 즉시 마법사에게 직접 데미지를 주는 주문들을 난사해 게임을 끝낼 생각이었다.
자기가 몇 초 후면 죽는다는 것도 모르고 가이난도는 매우 진지하게 고민했다.
“둘이 놀고 있었어?”
요네르가 닐리아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둘은 마법사 카드 게임을 둘러보더니 멈칫했다.
“혹시 이거 흑마법 저주 덱이야?”
“그런데?”
“...와. 가이난도. 이건 아니지. 진짜 아니지.”
요네르는 경악한 시선으로 가이난도를 쳐다보았다.
이제까지 가이난도가 뭔 짓을 했어도 친척으로서 편을 들어줬지만 이건 좀 심했다.
“아, 아니...! 이기면 그만이지! 왜!!”
“물론 이기면 그만이긴 한데 흑마법 저주 덱은 조금 예외지...”
요네르가 편을 들어주지 않자 가이난도는 닐리아를 보며 물었다.
“이게 그렇게 큰 잘못이야!?”
“흑마법 저주 덱은 좀...”
“......”
가이난도는 매우 억울해졌다.
“사냥꾼들 사이에서 이런 덱 하면 등 뒤에서 화살 맞아.”
“그 정도는 아니잖아!”
“진짠데.”
“그렇다는군.”
이한은 자기 차례가 되자 주문을 난사해 가이난도를 거꾸러뜨렸다. 가이난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눈만 끔벅거렸다.
“그래서 요네르. 무슨 일이야?”
“아. 이번에 그랑덴 시에서 사교 모임 열리잖아?”
사교 모임은 여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장 이한도 친구들 몇 명 부른 다음에 먹고 마시고 놀면 그것도 사교 모임에 들어갔다.
그런 만큼 그랑덴 시 정도 되는 규모의 도시라면 하루에도 수십 곳 넘게 사교 모임이 열렸다.
그러나 요네르가 말하는 이번 사교 모임은 그런 소규모 친목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도시의 유력 가문들은 물론이고 제국 관료들까지 참가하는, 실질적으로는 그랑덴 시의 이름으로 여는 모임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 모임의 주요 참가자들은 마법학교의 1학년 학생들.
‘아까 황족들이 말한 모임이 이 모임이었군.’
이한은 아까 황족들이 왜 찾아왔는지 이해했다.
저런 자리인 만큼 유망한 마법학교 학생과 같이 입장하고 싶어하는 게 당연했다.
다른 이들에게 ‘우리 친합니다’하고 선언하는 자리나 마찬가지였으니...
“가이난도랑 같이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긴 해.”
다른 황족들의 태도를 봤을 때 가이난도와 같이 들어갔다가는 괜히 서로 귀찮아질 것 같았다.
“왜!? 내가 흑마법 저주 덱을 갖고 와서?!”
가이난도는 충격 받은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같이 가면 괜히 파벌 오해 받을 수 있으니...”
“그냥 카드 때문이라고 생각해.”
요네르의 냉정한 말에 가이난도는 투덜거렸다.
“다들 내 덱이 강해서 질투하는 거야.”
“근데 졌잖...”
“시끄러!”
* * *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게 됐습니다.”
이한은 버두스 교수를 보며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사교 모임에 참가하는 걸 좋아하진 않았지만 버두스 교수를 따돌릴 핑계로 쓸 수 있다면 안 쓸 이유가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버두스 교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대체 그런 쓸데없는 모임에 왜 참석하는 거지?”
“1학년 학생들은 다 초대받는다는데요. 마법학교 학생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듣고 싶어하는 모양입니다.”
“대체 그런 쓸데없는 모임에 왜 참석하는 거지?”
‘음. 괜히 설명했군.’
버두스 교수는 이한이 설명하거나 말거나 계속 툴툴댔다.
“마법학교에 춤추는 법을 가르치는 강의는 왜 있는지 모르겠어. 그럴 바에는 부여 마법의 이론이나 하나 더 가르쳐야 하는데.”
“그건 저도 그렇게... 잠깐. 이번 사교 모임에 춤이 있습니까?”
“그 정도 규모면 무조건 있겠지?”
버두스 교수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소규모 사교 모임이면 모를까 저 정도 사교 모임은 무도회가 없을 수가 없었다.
이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살면서 춤이 필요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다른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사교춤 강의를 들을 때 이한은 마법 학파 하나를 더 들은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워다나즈 가문에 있었을 때도 딱히 춤은 연습하지 않았었고...
‘지금부터 최대한 빠르게 속성으로 기초만 연습해야겠군.’
목표는 망신당하지 않을 정도만.
이한은 결심하고서 버두스 교수를 쳐다보았다.
“교수님 혹시 춤 잘 추십니까?”
“아니?”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전 가르쳐 줄 사람 좀 찾고 오겠습니다.”
“...??”
혼자 남은 버두스 교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