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괜찮은데?”
“!?!”
이한의 말에 닐리아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순간 친구가 놀리나 싶었는데 이한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산고리아 꽃은 겨울 아닌 계절에 구하기 쉽지. 그림자 순찰대는 겨울 아닌 계절에 비교적 여유가 있고. 잘 선택했군. 나는 길드들과 교섭해서 휴양기를 가지고 마법사들을 지원하는 게 어떨까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는 그림자 순찰대를 동원하는 게 훨씬 더 나은 방법 같군.”
“아니... 왜... 미쳤...?”
닐리아는 학년 수석까지 한 친구가 과도한 노동과 수련으로 정신이 나갔나 싶었다.
제국 남부 해안가의 정치적 불안정을 해결하려면 그... 뭔... 하여간 좀 영리한 방법을 써야지 북부 사냥꾼들을 왜 부른단 말인가.
“요네르. 이거 봐.”
“야!!”
닐리아는 비명을 질렀다.
이한이 자기 혼자 보는 대신 요네르를 불렀던 것이다.
‘이래서 귀족 놈들은 믿지 말라고 했구나 다들!’
“어때?”
“괜찮은데? 마법사들을 동원하는 건 너무 비싸고, 무엇보다 바로 가능하다는 확신이 없잖아.”
“그렇지. 그림자 순찰대는 그에 비해 훨씬 더 믿음직스럽지.”
“활동 지역이 달라서 적응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건 괜찮을까?”
“그런 문제가 있다면 닐리아가 쓰지도 않았겠지.”
“하긴.”
“...어?”
닐리아는 듣다가 흠칫했다.
...그냥 별생각 없이 썼는데...
“그게 아니라.”
“이걸 보니까 내가 너무 생각이 많았던 것 같아. 가장 직관적인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확실히. 나도 동감해.”
“애들아? 애들아??”
닐리아가 부르거나 말거나 이한과 요네르는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서 닐리아의 계획을 보완해나가고 있었다.
“지역 길드들을 포섭할 때도 사냥꾼들이 나을지 모르겠어.”
“마력이 거칠어지고 정령들이 분노했을 때 괜히 마법사들이 찾아가면 더 꺼림칙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
“......”
하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추가해나가는 두 친구의 모습에 닐리아는 경악했다.
“다 봤다. 닐리아. 과연 메이킨 가문에서 1등을 줄 만하군.”
“네가 내 친구인 게 자랑스러워.”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닐리아의 말에 두 친구는 알겠다는 미소를 지었다.
“겸손하기는.”
“원래 한 방울의 겸손함이 천재를 더 돋보이게 만들어.”
“하지만 너무 겸손해하지는 말라고. 닐리아. 1등이 너무 겸손해하면 그 밑의 사람들이 힘드니까.”
자신은 맨날 겸손해하는 학년 수석의 뻔뻔한 말에 닐리아는 어이가 없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대꾸를 하지 못하는 사이 두 친구는 알아서 이야기를 끝내버렸다.
“메이킨 가문에서 채택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정도로 좋은 방법은 실제로 해볼 가능성이 높아. 아마 닐리아를 불러서 묻지 않을까?”
“과연. 결과가 기대되는군.”
멍하니 듣고 있던 닐리아는 맹수가 으르렁대듯이 속삭였다.
“...둘 다 도와.”
“우리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까? 별로 도움 안 될 것 같은데.”
“맞아.”
닐리아는 무심코 허리춤에 찬 활을 꺼내려다가 사교 모임에 걸맞은 복장을 하고 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 복장 진짜 짜증나!’
“영 어색한데. 내가 제대로 입은 거 맞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와. 잠깐. 닐리아 봐. 어떻게 저렇게 완벽하게 입은 거지?”
“닐리아는 여기저기 친구 많잖아. 모임에 참가할 일이 많으니까 이런 복잡한 옷도 잘 입겠지.”
“????”
뒤에서 검은 거북이 탑 친구들이 떠들며 지나가는 소리에 닐리아는 고개를 홱 돌렸다.
‘이 새끼들이 뭐라고?!’
* * *
“어? 저 분 교수님 아니야?”
요네르는 의아해하며 앞을 가리켰다.
이한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요네르. 아니야.”
“으응? 비버 수인... 맞는데? 버두스 교수님이시잖아?”
“닮은 사람이겠지.”
버두스 교수는 이한을 발견하더니 시무룩한 표정으로 걸어왔다.
이한은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요네르는 어이없다는 듯이 친구를 쳐다보았다.
‘알아본 거 맞잖아!’
“교수님.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부당한 지시 때문에.”
버두스 교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옆을 지나가던 학생의 옷에 잡혀 있던 주름이 펴지고 매듭이 완벽하게 묶였다.
“부당한 지시 때문이라니요?”
“교장 선생님이 나와서 애들 도우라고 하신 거겠지.”
이한은 바로 알아맞혔다.
해골 교장 성격에 버두스 교수가 근처에서 헛짓거리 하고 있는 걸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대체 왜 춤을... 시간을... 비용을... 아티팩트가...”
버두스 교수는 투덜투덜대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이한은 요네르에게 눈짓했다.
‘빨리 피하자.’
그러나 심심하고 지루한 버두스 교수는 이한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
“이거 써볼래?”
“이게 뭡니까?”
“춤 잘 추게 만들어주는 구두.”
버두스 교수는 마력이 느껴지는 구두를 내밀었다.
요네르는 놀라워하며 물었다.
“그런 아티팩트도 있나요?”
“쉿. 요네르. 멀쩡한 아티팩트면 우리한테 줄 이유가 없어.”
이한은 버두스 교수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분명 이 자리가 너무 심심하고 지루해서 아티팩트를 만들었을 테니, 그 아티팩트는 무난하고 멀쩡할 가능성이 낮았다.
아마 어딘가 이상하거나 단점이 있으리라.
“이런 아티팩트 만들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춤 잘 추게 만들어주는 쓰레기 같은 아티팩트를 왜 만들어.”
‘음. 역시 위험하겠군.’
아무리 춤을 잘 추게 만들어주는 구두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다룰 수 없는 아티팩트를 착용하는 건 위험했다.
검 한 번 휘둘러 본 적 없는 사람이 고대의 검술을 쓰게 해주는 검을 들어봤자 근육만 다치는 것처럼 저 구두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저게 뭐야?”
뒤늦게 도착한 가이난도가 질문을 던졌다.
이한은 시간을 확인하고 물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후후. 세 명이나 이기고 왔지.”
“흑마법 결투라도 했나?”
“마법사 카드 대결이거든!”
가이난도는 발끈했다.
새 덱을 만든 뒤 가이난도는 그야말로 힘에 취해 있었다.
전능하다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스스로 고민할 정도로.
“춤 잘 추게 만들어주는 구두야.”
“앗. 감사합니다.”
가이난도는 버두스 교수의 제안에 냉큼 챙겼다.
이한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위험해 보이는데. 그냥 없이 추는 게 낫지 않나?”
“나 연습 안 해서 안 돼.”
이한은 ‘카드놀이 할 시간에 연습을 했어야지’라고 하지 않았다.
너무 잔소리를 많이 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핑계를 대고 빠지는 건?”
“엄마 귀에 들어가면 혼나잖아.”
“카드놀이 할 시간에 연습을 했어야지.”
결심한지 1초만에 생각과 다른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 * *
연회는 평소 사교 모임을 즐기던 푸른 용의 탑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른 탑 학생들도 매우 즐거워했다.
그랑덴 시의 사람들은 딱딱하고 격식 있는 분위기로 신입생의 숨통을 조이는 대신 부드럽고 즐거운 분위기로 환영해줬던 것이다.
덕분에 이런 자리를 잘 모르는 학생들도 즐겁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춤을 추었다.
“마법사 님. 에인로가드에서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어... 음...”
“하하하! 엄청나게 좋으신 모양이군요! 하긴 제국 최고의 마법학교에서 배우시는 건데, 불만이 있을 리 없겠죠! 저도 들어가서 배울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텐데 말입니다.”
“......”
물론 가끔 학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고의는 아니었다.
‘괜찮은데?’
이한은 이런 분위기에 안심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사교 모임 경험이 적은 이한이라도 무난히 넘어갈 수 있을...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발드로가드 출신의 도인 경을 상대로 보여주신 마법은 정말 감탄했습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아, 예.”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메이킨 가문의 요아넨 님께서 칭찬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예.”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보가준 황자 전하께서...”
“바실리스크를...”
“구울의 왕...”
“이번에 공동묘지에서 언데드 키메라...”
“기사들을 구해주셨다면서요.”
이한은 알라르롱이나 잉걸델 밑에서 검술을 배웠을 때가 차라리 나았던 것 같았다.
그 때는 상대의 발을 밟을까봐 이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환장하겠군.’
제국의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핑계는 술꾼이 술을 마시는 이유와 비슷했다.
날이 좋으면 날이 좋아서 한 곡 추고, 날이 나쁘면 날이 나빠서 한 곡 추고, 상대방이 무슨 일을 해냈으면 그걸 핑계로 또 한 곡 추고...
그리고 이한은 걸어 다니는 핑계 그 자체였다.
털썩-
마지막 핑계까지 춤을 추고 나서야 이한은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뭐지?’
옆에 먼저 앉아 있던 지젤이 빤히 쳐다보자 이한은 의아해했다.
“춤에 실수라도 있었나?”
“아니.”
“괜찮은 의뢰라도 있었나?”
“아니.”
“날 쳐다보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신입생 중에 자기가 모라디 가문의 가이난도라고 하는 놈이 있다던데. 알고 있는 게 있는지 궁금하군.”
지젤은 싸늘하게 말했다. 이한은 즉시 대답했다.
“내가 가이난도한테 따끔하게 말해두도록 하지. 자기 가문을 착각하다니. 어이가 없는 실수로군.”
“흑발이라고 들었는데.”
“가이난도가 요즘 머리카락 색깔 변환 마법에 관심이 많더군.”
“2학년보다 마법을 더 잘 쓴다던데.”
“가이난도가 마법에 재능이 있잖나.”
“평생 안 만날 자신 있다?”
지젤은 협박하듯이 물었다.
흰 호랑이 탑의 2학년 선배인 알파 가문의 발가로를 데리고 와서 만나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이한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피하면 그만이지.’
저런 것에 겁먹는다면 교수 밑에서 지낼 수 없었다.
나중에 거짓말이 발각되더라도 지금 당장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우길 수 있어야 제자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뭐 이런 새끼가 있어 진짜?’
지젤은 말문이 막혔다.
제국 대귀족 가문 출신이 무슨 시정잡배보다 더 뻔뻔하게 우겨대니 할 말이 없었다.
대체 이 새끼는 뭐지?
“워다나즈?”
“앗. 교수님이 부르시는군. 이만 가보겠다.”
“너 진ㅉ...”
이한을 부른 건 환상 마법을 가르치고 있는 키르민 쿠 교수였다.
쿠 교수는 이한을 보더니 눈을 깜박이고 말했다.
“한창 즐거울 텐데 불러서 미안해.”
“아닙니다.”
이한은 진심이었다.
사실 쿠 교수가 돌려보낸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느리게 회장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도움이 필요해서 불렀어. 아무래도 혼자 하기에는 좀 힘든 일이라서 말이야.”
“짐이라도 옮겨야 합니까?”
버두스 교수도 그랬으니 이 자리에 마법학교의 교수 몇몇이 더 있어도 놀랍지 않았다.
이한은 만약 잡일이 있다면 버두스 교수도 부를 생각이었다.
심심해하는 교수님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러면요?”
“학생들을 겁먹게 해야 해.”
“...????”
* * *
드디어 최초로(최초가 아닐지도 몰랐다) 미친 교수가 나온 건가 싶었지만, 쿠 교수는 매우 제정신이었다.
“연례행사야. 학생들을 놀라게 해서 대응하는 걸 보는 거지.”
“그걸 대체 왜 무도회에서?”
“워다나즈. 마법사는 언제나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법이야. ...라고 교장 선생님께서 하셨지.”
‘저러니까 기부금이 안 모이지.’
이한은 누가 범인인지 깨닫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 그런데 저는 참가 안 해도 됩니까?”
“교장 선생님이 넌 무조건 빼라고 하시던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