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이한은 왜 자신만 빠져야 하냐고 따지려다가 말았다.
어이가 없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 모임에 참가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저 사이에 끼고 싶진 않다.’
물론 친구들은 이한과 같이 깜짝 시련을 극복하고 싶겠지만...
이한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뭘 도와드리면 됩니까?”
“이야.”
“?”
쿠 교수가 감탄하자 이한은 의아해했다.
왜 저러시지?
“아. 교장 선생님께서 워다나즈 너라면 기쁘게 도와줄 거라고 하셨거든.”
“......”
해골 교장한테 속마음을 읽힌 이한은 기분이 복잡해졌다.
“이렇게 성실한 제자를 두다니. 저번에도 말했지만 배그렉 교수한테는 과분한 것 같다니까.”
“하하. 아닙니다.”
“아마 볼라디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러면 안 되는데 말이야.”
‘그럴 것 같아서 무섭군.’
이한이 속으로 생각하는 동안 쿠 교수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거대한 플레임 비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활활 타오르는 거대 맹수가 살벌한 눈동자로 노려보면 보통 사람의 경우 비명을 질렀겠지만 이한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무도회장에 어울리는 것 같지 않습니다.”
“확실히. 예리한 학생이라면 눈치를 채겠어.”
쿠 교수는 실수를 인정하고 선선히 환상을 치웠다.
이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학생들을 놀라게 할 만한 환상이 필요하신 거라면 단순히 위협적인 몬스터가 아니라 그럴듯한 몬스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럴듯하다?”
“예. 무도회장에서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은 몬스터 말입니다.”
“그런 게 있나?”
쿠 교수는 당황했다.
무도회장에서는 어떤 몬스터가 나와도 이상하게 느껴질 것 같았던 것이다.
“괜찮은 이유를 붙이면 이상한 몬스터라도 그럴듯해지죠. 예를 들어 교장 선생님께서 몬스터를 풀었다고 하면 학생들은 대부분 믿을 겁니다.”
“과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쿠 교수는 문득 속으로 의문을 품었다.
어떻게 보면 워다나즈의 친구들을 괴롭히는 일인데, 이렇게까지 진심을 낼 일인가?
‘과연 볼라디의 제자답다.’
마법과 관련된 일이라면 친구들이 힘들든 말든 단호하게 타협을 거부하는 워다나즈의 모습에서 쿠 교수는 볼라디를 떠올렸다.
결국 스승을 어느 정도 닮을 수밖에 없는 게 제자인 것이다.
쿠 교수가 사람 복장 뒤집는 생각하고 있는 것도 모르는 채 이한은 몬스터들의 목록을 꺼냈다.
“악마 계열 몬스터는 어떻습니까? 교장 선생님이 소환했다고 믿기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녀석은 어떻지?”
화염과 유황이 뒤섞인 숨결을 내뱉는, 날개 네 장 달린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위협적으로 생긴 게 교장 선생님과 잘 어울립니다.”
“과연. 그럼 준비하자.”
“예. ...잠깐. 뭘 말입니까?”
이한은 쿠 교수가 아무 설명도 없이 바로 준비하자고 하자 살짝 당황했다.
뭘 준비하자는 거지?
“당연히 악마의 환상이지?”
“저 아직 못 배웠습니다만.”
“아. 스스로 움직이면서 감각까지 조종할 수 있는 환상은 아니어도 괜찮다. 외형만 비슷해도 되거든.”
“...그러니까 그걸 아직 못 배웠다는 겁니다.”
이한은 쿠 교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슬슬 두려워졌다.
혹시 4학년 학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
“뭐?!”
쿠 교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새삼스럽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하긴. 워다나즈 넌 1학년이니 몰라도 이상하지 않겠구나.”
이한은 ‘그걸 이제 깨달으신 겁니까?’라고 물으려다가 참았다.
상대는 교수였다.
“예... 아무리 조악하더라도 악마 정도 되는 몬스터의 환상을 구현하는데, 제가 할 수준의 마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버두스 교수님은 네가 4서클 마법인 <아지르모 소환 부여>를 익혔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환상 마법 계열이잖아? 그걸 할 줄 알면 악마의 환상도 그럭저럭...”
빛으로 된 드래곤의 환상을 소환해내는 마법.
마법진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
악마의 환상도 도전해 볼 수 있을 정도로.
불리해진 이한은 못 들은 척 말을 돌렸다.
“그래서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됩니까?”
“악마의 환상을 불러내면 내가 옆에서 보조해주려고 했는데... 지금 배워보는 게 어때? 워다나즈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음. 과연 볼라디 교수의 친구시군.’
유유상종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미친 사람의 친구치고는 너무 멀쩡해 보인다면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그 멀쩡한 외면 속에 광기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하지만 이한의 무례한 생각과 별개로 이번 일은 쿠 교수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건 애초에 버두스 교수부터 시작해서 다른 교수들이 ‘워다나즈는 이 정도는 하더라’ ‘워다나즈라면 이 정도도 하겠지’로 잔뜩 난이도를 올려놓은 탓이었다.
그런 말들을 들었으니 악마의 환상을 불러내는 주문을 배워보자고 제안하는 것도 당연했다.
악의라고는 조금도 없는 순수한 배려심에서 나온 제안.
물론 악의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돌멩이를 던져도 사람은 맞아 죽을 수 있었다.
“제가 지금 연습하고 있는 마법들이 많아서...”
이한은 슬슬 에인로가드의 교수들을 상대하는 요령을 익히고 있었다.
A 교수 상대로는 B 교수 핑계를 대고 B 교수 상대로는 C 교수 핑계를 대는 일종의 돌려막기.
들키면 귀찮아질 수도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안 했다가는 지금 죽게 생겼는데.
“하긴.”
쿠 교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1학기 때 들은 강의만 봐도 지금 워다나즈가 연습하고 있는 마법들이 많을 거라는 건 짐작이 갔다.
“어떤 걸 연습하고 있지? 궁금한데? 환상 마법도 있나?”
“환상 마법은... 오고닌 님의 환상 마법을 연습하고 있긴 합니다만.”
이한은 말을 하고서 멈칫했다.
쿠 교수가 너무 흥미로워하며 듣고 있었던 것이다.
“오고닌 님의? 어떤 마법을 어디까지 익혔지?”
“그렇게 대단한 정도는 아닙니다.”
“오고닌 님의 환상 마법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고전이자 정통이니까. 난이도 때문에 요즘은 익히는 사람이 워낙 줄긴 했지만, 워다나즈 네가 연습하고 있다니까 반가운데.”
“그러니까 그렇게 대단한...”
이한이 아무리 말하려고 해도 쿠 교수는 듣지 않았다.
심지어 지나가는 마법사까지 불렀다.
“다르아치. 여기 내 제자가 오고닌 님의 환상 마법을 직접 전수받아서 연습하고 있다는데?”
“뭐라고? 오늘 자리에 있는 학생들은 1학년 아니었나?”
“신입생 맞아. 대단하지 않나?”
“말이 안 되는데.”
생전 처음 보는 마법사까지 오자 이한은 쿠 교수를 한 대 치고 싶었다.
오고닌에게 배우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지나가는 사람까지 부른단 말인가.
“교수님. 왜 다른 분까지...”
“아. 여기는 밸러 가문의 다르아치. 이 친구도 오늘 일을 도우려고 온 마법사지.”
쿠 교수는 볼라디 교수와는 다르게 인맥이 넓었다. 상대 마법사도 쿠 교수의 친구인 모양이었다.
‘밸러 가문?’
이한은 상대의 가문 이름이 익숙하다는 점에 놀랐다.
어디서 들었더라?
“반갑소. 밸러 가문의 다르아치요.”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입니다.”
“...?”
다르아치는 인사를 나누다 말고 이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 소문은 들었는데, 1학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소.”
“......”
“도인 경이 신세를 졌었지.”
“!”
이한은 그제야 밸러 가문이 어떤 가문이었는지 떠올렸다.
모임 자리에서 이한과 가벼운 대결을 보여줬던, 발드로가드 출신의 도인 경.
그 도인 경의 가문이 밸러 가문이었던 것이다.
‘같은 가문이었나!’
“모임에서 있었던 일은 제가 이긴 게 아니라 도인 경이 실수를 해서...”
“그렇게 배려해서 말하지 않아도 괜찮소. 1학년 학생과 마법을 겨루면서 그런 실수를 한 게 머저리지.”
이한은 어떻게든 도인 경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이한의 마력이 너무 많아서 상대가 실수로 탈진 상태에 빠졌다는 것도 상당히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이한이 속으로 도인 경에게 미안해하고 있는 사이 쿠 교수와 다르아치는 대화를 나눴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오고닌 님의 마법을 배우고 있다는 게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겠군.”
“다르아치. 내 제자라서가 아니라, 워다나즈는 마법에 관해서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고.”
“못 믿는다는 게 아니다. 오고닌 님의 환상 마법은 워낙 난이도가 있는 만큼 배우고 익히려고 해도 수월하지 않으니 하는 말이지. 의욕은 있어도 성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잖나.”
“그거야 성과를 들어보면 되겠지. 혹시 익힌 마법이 있나?”
“<오고닌의 감정 인지>와 <오고닌의 차오르는 불안감> 계열의 마법들을 익혔고 이제 <오고닌의 박무(薄霧)>를 연습 중인데...”
“오오!”
“말도 안 돼!”
두 환상 마법사들은 깜짝 놀랐다.
벌써 <오고닌의 박무>를 연습하고 있다니.
제대로 된 제국의 환상 마법사라면 <오고닌의 박무>는 모를 수가 없는 마법이었다.
환영의 안개를 퍼뜨려 외부의 적들로부터 제대로 된 조준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방어 마법.
물론 저런 효과를 만드는 환영 마법은 여럿 있었다. 그 중에는 <오고닌의 박무>보다 쉽게 익힐 수 있는 마법들도 많았다.
하지만 <오고닌의 박무>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 완성도 때문이었다.
열기를 이용해 만드는 환상 마법은 냉기가 가득한 곳에서는 제대로 시전되지 않았고, 환각 효과가 있는 구름을 이용해 만드는 환상 마법은 후각을 막을 경우 효과가 급감했다.
그러나 <오고닌의 박무>처럼 순수한 전통파 환상 마법은 저런 약점이 없었다.
익히는 데에는 오래 걸리고 비효율적이더라도 한 번 익히면 약점이 없는 완성도 높은 마법.
괜히 쿠 교수와 다르아치가 높게 평가하는 게 아니었다.
“<오고닌의 감정 인지>와 <오고닌의 차오르는 불안감>을 벌써 익혔다니. 놀랍군.”
“말했잖나. 다르아치.”
“그 정도라면 <오고닌의 박무>도 충분히 익힐 준비가 된 것 같은데.”
“맞는 말이야. 워다나즈. 지금 연습 중이라고 했지? 다시 한 번 연습해봐. 우리가 봐주도록 하지.”
“아니... 교수님... 저희 준비 안 합니까?”
“그건 좀 나중에 해도 괜찮다.”
“쿠 교수의 말이 맞소. 그런 장난이 뭐 그리 중요하겠소. <오고닌의 박무>를 봅시다.”
“......”
정말 이래도 되나?
* * *
“무언가 이상하군.”
해골 교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옆에 있던 버두스 교수가 반색하며 물었다.
“이제 알았구나! 이 쓸데없는 헛짓거리의 무용함을...”
“그걸 말한 게 아니다.”
“아니야?”
“환상 마법사들이 왜 점점 줄어들고 있지?”
해골 교장은 쿠 교수한테만 일을 맡기지 않았다.
회장의 넓이와 신입생들의 숫자를 생각해봤을 때 애초에 쿠 교수한테만 시킬 수 없는 일이었다. 에인로가드의 교수가 가진 마력은 그렇게 싸구려가 아니었다.
다르아치는 물론이고 그랑덴 시에 있는 환상 마법사들을 여럿 불러서 대기시켜놨는데...
무도회장에 있던 환상 마법사들이 한 명씩 줄어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기 싫어서 탈주했나 싶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이상했다.
누가 납치라도 하는 게 아니라면...
“......”
해골 교장은 무도회장 중앙을 폭풍처럼 휘젓고 있는 가이난도에게서 시선을 떼고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생기(生氣)가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생기가 모여 있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지만, 해골 교장은 부정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환상 마법사들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자리를 비우고 멋대로 행동할 리가 있겠는가?
“힘들 것 같습니다만...”
“아닙니다! 워다나즈 님. 조금만 더 해보십시오.”
“맞습니다! <오고닌의 박무>는 이렇게 포기하기 아쉬운 마법입니다. 저도 한 번 배워보려고 했었지만 결국 실패했었지요. 워다나즈 님이라면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동의하오. 실패를 높게 평가하고 싶지는 않소만, 이 정도까지 완성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오. 여기서 멈추기는 아쉽지.”
“자.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
환상 마법사들이 이한을 둘러싸고 박수를 치는 모습에 해골 교장은 정말로 두통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