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이한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황녀 일행의 사치스러운 금전감각이 아찔하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확실히 도움이 됐으니까.
‘하긴 교수님들한테 가서 부탁해봤자 좋을 게 없지.’
버ㄷ... 아니, 교수들에게 부탁한다고 하더라도 순순히 응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후원자들의 호의를 받는 게 편했다.
“그러면 지팡이 받으러 가자고.”
그러나 이한의 얼굴은 일그러져있었다.
그걸 본 로웨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까 있었던 전투의 영향이 남은 게 아닐까 걱정됩니다.”
“하긴 워다나즈 성격에 힘들어도 말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가는 길에 들려서 진찰을 받게 해야겠습니다.”
* * *
지팡이 가게에 도착한 이한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물었다.
“방금 치유 마법사는 왜 만난 거지?”
“그,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서 한 번...”
“몸이 안 좋나? 쉬는 게 낫지 않겠어?”
이한은 로웨나가 과로했나 싶었다.
그래서 클트란에게만 들리게 살짝 말했다.
“황녀님이 일을 좀 심하게 시키는 편인가?”
“?!”
황녀의 눈동자가 억울함으로 크게 떠졌다.
“그, 그런 거 아니야.”
“말을 더듬는 거 보니 수상한데.”
“아니라니까?!”
아까 만난 치유 마법사는 이한을 훑어보고 더 이상 건강할 수 없다고 확인해줬다.
로웨나나 클트란이 ‘맹독 오염체하고 싸웠습니다!’ ‘맞습니다 좀 더 자세히 봐주십시오!’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정말 아무 이상 없는데 뭘 어떡한단 말인가.
오히려 다른 셋이 한 소리를 들었다.
-최근에 마법을 무리해서 많이 쓴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력 고갈 직전까지 간 탓에 아직 데미지가 남아있군요.
-밤새 연금술을 연습하신 모양인데, 환기를 제대로 하지 않고 시약들을 다루면 아무리 마법사라 하더라도 중독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클트란은 더 이상 말해봤자 이상한 오해만 받을 것 같아서 급히 문을 열었다.
<푸요의 반얀나무 지팡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 빙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푸요 님은 그랑덴 시에서 가장 뛰어난 지팡이 장인이십니다.”
시 중앙 구역에 위치한데다가 가게의 외관도 꽤나 고풍스러운 게, 역사가 짧아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경력 많은 아티팩트 장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버두스 교수님을 알려나?”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로웨나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녀 일행이 푸요의 가게에 방문할 수 있었던 건 후원자들이 푸요와 친분이 있어서지, 그들이 푸요와 친해서는 아니었다.
사실 푸요는 신입생들이 친해지기 좋은 상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경력 많은 아티팩트 장인은 곧 노련한 부여 마법사라는 뜻.
자기보다 몇십년은 나이가 많은 마법사들과 친하게 지내는 건 쉽지 않았다.
“혹시 처음 만나보나?”
“저번에 밖에서 한 번 인사만 드리긴 했는데 이렇게 찾아뵙는 건 처음...”
“다들 왔나?”
안에서 나무가 걸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푸요는 나무 정령 혼혈이었다. 얼굴과 손, 팔이 나뭇가지처럼 되어 있어 나무로 착각한 거였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푸요 님.”
“쓸데없는 인사는 됐네.”
푸요는 귀찮은 허례허식을 싫어했다.
애초에 후원자들의 간곡한 부탁이 아니었다면 어린 학생들을 자신의 공방에 들여보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 마법도 걸리지 않은 지팡이들이 필요하다고 했지?”
“앗, 그렇습니다.”
푸요의 기세에 압도된 로웨나는 살짝 말을 더듬었다.
물론 이한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교수들 중에서는 푸요보다 미친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단 것이다.
사실 푸요처럼 퉁명스러워도 바로 할 말만 해주는 사람이라면 상위 5% 인성에 속했다.
와르르-
푸요가 손짓하자 선반 위에 쌓여 있던 상자 몇 개가 열리더니 길쭉한 지팡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아직 아무런 마법이 걸리지 않은, 순수히 나무로만 만들어진 지팡이였다.
“작업은 이쪽에서만 하도록. 안에는 들어오지 말게. 가게에 있는 건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에인로가드 학생들이니 부여 마법의 기초에 대해서는 배웠겠지.”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쓸데없는 사고는 치지 않으리라 믿네.”
푸요는 그 말을 끝으로 공방의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로웨나와 클트란은 그제야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긴장했습니다.”
“맞아. 숨 막히는 줄 알았다고. ...워다나즈. 뭐하고 있냐?”
“어? 아. 쓸만한 지팡이 없나 보고 있었는데.”
이한은 둘이 푸요에 대해 말하거나 말거나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괜찮은 게 있으면 가져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푸요 님에 대해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
“딱히 별 생각 안 했는데. 필요한 말만 하시지 않았나?”
작업 여기서 해라, 사고치지 마라, 다른 거 건드리지 마라.
정말 필요한 말만 해줬는데 괜히 겁먹을 이유가 없었다.
“일단 지팡이부터 분류하자고. 긴 놈은 이쪽으로. 짧은 놈은 저쪽으로.”
“알겠다. 어. 근데 워다나즈. 이건 왜 분류하는 거지?”
클트란의 질문에 이한은 가이난도 보듯이 클트란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긴 지팡이일수록 좀 더 효과가 강한 편이잖나.”
“아... 그, 그랬지!”
마법사의 마법 시전을 가장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아티팩트인 지팡이.
그런 만큼 지팡이는 재료의 사소한 변화만으로도 성능이 크게 달라지는 편이었다.
대체적으로 길이가 길어질수록 지팡이의 힘이 커지고, 강도가 높아질수록 마법이 완고해졌다.
당연히 지팡이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반적인 경향성들을 법칙처럼 외우고 있어야 했다.
물론 클트란은 딱히 몰랐지만 알고 있었던 것처럼 대답했다.
“그랬던 것 같다!”
“클트란.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말해라.”
“...미안. 몰랐다.”
“넌 부여 마법 시간에 잤나? 책에 나오는 내용이잖아.”
“......”
클트란은 억울함이 차올랐다.
‘말하라고 해놓고...!’
푸른 용의 탑 학생이었다면 이런 간단한 속임수에 속지 않았겠지만, 경험이 부족한 클트란은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 * *
푸요는 작업에 집중하려다가 도구를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공방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 만큼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 푸요의 후원자들이 간곡하게 부탁한 만큼 거절할 수는 없었지만 후회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공방에 들어와서 꺼림칙한 게 아니었다.
아무리 에인로가드 학생이라 하더라도 신입생들.
부여 마법을 배웠다 하더라도 그 시간이 짧고 경험이 부족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학생들에게 질 좋은 지팡이들을 주는 건 낭비에 가까웠다.
아직 제대로 가공되지 않아 잠재력이 무궁무진한데, 그 잠재력이 학생들의 서투른 마법에 깎여나가 실패작이 될 거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아팠다.
‘도저히 못 참겠군.’
푸요는 문으로 다가가 학생들이 어떻게 작업하고 있나 슬쩍 쳐다보았다.
아무리 황녀에 후원자들이 부탁했다고 하지만 너무 터무니없이 작업하고 있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떤 핑계를 대고서라도 작업을 멈추고 내보낼...
“자. 클트란. 알았다고 했으니 이제 말해봐라. 여기 화염 원소 마법과 소환 마법을 전문으로 하는 마법사가 찾아왔다. 이 마법사의 종족은 드워프고, 이전에 썼던 지팡이는 단풍나무에 화령석을 박아넣은 지팡이였다. 그러면 너는 어떤 지팡이를 추천할 거냐?”
“어... 어...”
“길이부터.”
“일, 일단 화염 원소 마법이니까 위력을 중요시해서 길게...”
“틀렸다. 화염 원소 마법이라고 해도 꼭 위력이 중요하진 않아. 오히려 통제가 더 중요할 수도 있지. 무엇보다 상대가 드워프니까 괜히 긴 지팡이를 추천해봤자 들고 다니기만 불편할 수 있다. 너 부여 마법 배운 거 맞냐?”
“힝...”
클트란은 완전히 기가 죽었다. 옆에 있던 로웨나도 겁에 질려서 황녀 옆에 붙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클트란처럼 질문 세례를 받을 것 같았다.
‘????’
보고 있던 푸요는 예상과 다른 상황에 놀라워했다.
학생들이 철없이 지팡이를 만지고 쓸데없이 낭비할 줄 알았는데, 나름 체계적으로 준비부터 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냥 하나씩 해보면서 감을 잡으면 안 ㄷ...”
딱!
이한은 지팡이로 클트란을 한 대 때렸다.
“지팡이가 남아도나?”
‘남아돌잖아...’
클트란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이한의 지팡이가 무서워서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하기 전에 완벽하게 계산하고 들어가야지. 자. 클트란. 대답해봐라. 물 원소와 바람 원소, 빛 원소 중 뭐부터 부여해야 할까. 그리고 이 중에서 어떤 지팡이가 어울릴까?”
“...로, 로웨나한테도 물어보면 안 되냐?”
“!!”
로웨나는 긴 귀가 삐쭉 솟을 정도로 놀랐다.
배신감 가득한 눈동자로 클트란을 쳐다보았지만, 클트란은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나부터 살고 보자!’
“어, 그, 황녀님?”
“......”
아덴아르트는 로웨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로웨나는 민망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덴아르트는 추종자들한테 더 이상 뭐라고 하는 대신 지팡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느티나무 지팡이. 잘 고르셨습니다. 클트란. 물 원소를 가장 먼저 부여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원소에 비해 더 안정적이라...”
“크윽...! 그냥 말해볼걸! 맞출 수 있었는데! 진짜!”
“듣기나 해라.”
학생들의 대화에 푸요는 방금까지 했던 생각을 바꿔야 하나 고민했다.
황녀의 재능이 그렇게 뛰어나다고 추종자들에게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보니 확실히 그 뛰어난 천재들을 모아놓은 에인로가드에서도 남달랐다.
게다가 저기 있는 소년도 대단했다.
단순히 부여 마법에 대한 지식뿐만이 아니었다.
뛰어난 장인인 푸요는 작업에 앞서서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걸 보면 그 사람의 실력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저 소년은 이런 작업을 한두번 해본 게 아닌 것처럼 익숙해보였다.
아무리 에인로가드에서 배웠다지만 저렇게 빨리 익숙해지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배웠을 것 아닌가.
타고난 재능이 분명했다.
‘정말 놀랍군. 저런 게 가능한 재능이라니.’
이한이 다른 교수들 밑에서 혹사당한 걸 모르는 푸요는 재능으로 저런 게 된다는 것에 순수히 감탄했다.
“자. 오늘 물 원소에 쓸 마법진은 이거다.”
푸요가 감탄하고 있는 사이 이한은 책을 뒤져서 마법진을 하나 골랐다.
클트란은 소심하게 물었다.
“워다나즈. 물 원소 마법 중에 이걸 고른 이유가 있나?”
“많이 해봐서 익숙한 마법진이야.”
“그렇군. ...어? 이거 과제로 나온 적 없었잖아?”
“버두스 교수님하고 따로 했었다.”
그 말에 클트란은 감탄했다.
교수와 따로 작업할 정도라니.
역시 워다나즈였다.
“대단하다. 워다나즈. 부럽...”
“클트란. 부럽다고 말하기 전에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보고 말해라.”
“......”
클트란은 다시 생각해봤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별로 부럽지 않았다.
이한만큼은 아니어도 부여 마법을 배우는 학생들이라면 버두스 교수의 광기를 다들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로웨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데 학기 도중에 언제 시간을 내신 겁니까?”
“방학 때 같이 했지...”
“아...”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원래 침묵에 익숙한 황녀도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버두스 교수의 제자였나?”
침묵을 깬 건 푸요였다.
안에서 푸요가 걸어 나오자 이한은 멈칫했다.
‘...제자라고 말하면 공격받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버두스 교수를 아는 사람이라면 사이가 안 좋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