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맞습니다!”
“......”
로웨나가 대신 냉큼 대답하자 이한은 경악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로웨나는 이한의 시선은 눈치채지 못하고 기쁜 얼굴로 계속 말했다.
“여기 워다나즈는 다른 마법도 같이 공부하는데도 교수님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흰 호랑이 탑 놈들은 진짜 다 눈치가 없군.’
이한은 속으로 한탄했다.
상대가 버두스 교수의 원수인지 친구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대뜸 제자라고 해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그렇군.”
“푸요 님도 버두스 교수를 아십니까?”
“예전에 내 몸을 잘라가려고 한 적이 있네.”
“......”
“......”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황녀와 이한은 동시에 로웨나를 쳐다보았다.
‘이 분위기 어쩔 거냐’는 눈빛이었다.
지옥의 악마들 사이에서도 재빨리 중재에 나설 수 있는 이한과 달리 로웨나는 그런 재주가 없었다.
로웨나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결국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잘... 잘리셨습니까?”
“...야... 그건 진짜 아니다...”
클트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어이없는 소리였다.
보다 못한 이한이 끼어들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른 사람의 몸을 자르려고 하다니. 제가 교수님 밑에서 배우고 있긴 하지만, 저는 언제나 교수님의 그런 행동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맞, 맞아요. 그리고 워다나즈도 원해서 총애를 받는 게 아니라구요. 어떤 미친놈이 방학에 교수 밑에서 일하고 싶겠어요.”
클트란이 변명하자 푸요가 됐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스승과 원한이 있다고 해서 제자한테까지 원한을 품지는 않네. 그리고 버두스 교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나 같았어도 자르고 싶었을 걸세. 나무 정령 혼혈의 육체는 귀한 소재니까.”
보통 정령 혼혈은 선대 중에 정령과 계약한 이들이 있어서 나타나곤 했다.
핏줄에 깃든 힘이 후대에 발현되어 혼혈로 각성하곤 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정령 혼혈의 육체는 귀한 소재긴 했다.
‘음. 미친 사람이군.’
물론 그런 설명이 학생들의 속마음까지 설득하지는 못했다.
푸요가 ‘나 같았어도 자르고 싶었을 거다’라고 말하는 순간 학생들은 이미 푸요를 최소한 0.5 버두스 교수 정도 되는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 부여 마법사들은 다 미친 사람들인가?’
“나와 버두스 교수 사이에 있었던 일보다 다른 게 궁금하군. 버두스 교수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좀 과장된 면이 있습니다.”
“강의 시간 외에 따로 만난 적이 있나?”
“어... 예.”
“따로 만나서 같이 작업한 적이 있나?”
“그... 예.”
“혹시 버두스 교수의 공방에서 작업을 하게 해줬나?”
“아니... 그게...”
“그냥 ‘예’나 ‘아니오’로 대답하면 되는 질문 아닌가?”
“...예.”
“총애 받고 있는 게 맞군.”
이한은 진심으로 억울했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버두스 교수는 보통 제자들을 그런 식으로 대우해주지 않네. 정말 재능이 대단한가보군.”
“마력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한은 해명에 나섰다.
내가 마력이 많은데, 그래서 버두스 교수가 양아치처럼 그 마력을 노리고 있다고...
설명을 들은 푸요는 놀라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였군!”
“예. 버두스 교수님이...”
“아. 그 소리가 아니었네. 자네가 들어왔을 때 살벌한 위압감이 느껴졌거든.”
“......”
이한은 뒤늦게 푸요가 정령 혼혈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무 말도 없어서 문제없는 줄 알았는데...
“그랬습니까?”
“그랬지. 하지만 신경 쓸 거 없네. 자네보다 더 위험한 손님들도 많이 만나봤으니.”
“별로 위로가 안 됩니다.”
이한은 씁쓸해졌다.
흉악한 생김새를 가진 사람한테 ‘괜찮아! 제국 최고 범죄자들보단 나으니까!’라고 해봤자 위로가 되진 않았다.
“그렇지만 조금 이상하군. 버두스 교수 성격에 아무리 마력이 많다 하더라도 실력 없는 제자를 작업에 참가시키지는 않을 텐데.”
“마력이 그만큼 필요하셨나봅니다.”
이한이 냉소적으로 투덜거렸지만 푸요는 받아들이는 대신 궁금해 했다.
“신입생이라고 했지? 몇 서클 부여 마법까지 성공했었나?”
“...4...”
“뭐라고? 잘 못 들었네.”
“4... 서클...”
잠시 침묵이 돌았다.
이한의 친구부터 푸요까지 이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입생이 벌써 성공시킬 수준의 마법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군.”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아니. 그것까진 말 안 해줘도 괜찮네.”
뒷사정까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푸요는 이한의 말을 잘랐다.
버두스 교수가 강제로 시켰든 이한이 운이 좋아서 해냈든 중요한 건 성공했다는 점이었다.
그것만 알면 됐지 거기에 엮인 사정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버두스 교수와 같이 작업을 하고 있다면 간단한 아티팩트들을 몇 개 만들어봤겠군. 뭘 만들었나?”
푸요는 본격적으로 흥미가 올라왔는지 종이와 깃펜을 들고 질문을 던졌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마법 폭죽들을 만들었습니다.”
“마법 폭죽. 신입생치고는 어려웠을 텐데.”
“??”
듣고 있던 클트란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강의에 그런 게 있었나?”
“따로 불려가서 만들었어.”
“......”
‘워다나즈 이 자식 대체 몇 번을 불려간 거야?’
분명 서로 하루는 24시간으로 똑같을 텐데 뭔가 이상했다.
왜 워다나즈의 하루는 남들보다 몇 배는 되는 것 같지?
“마법 폭죽... 그게 끝이었나?”
“방패 있잖습니까. 워다나즈 님.”
로웨나가 소곤거렸다. 이한은 부드럽게 대답해줬다.
“더럽게 고맙다.”
“...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방패? 무슨 방패지?”
“그, 부유에 자동 방어에...”
“반사도 했잖아.”
“반사를?!”
클트란이 끼어들자 이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왜 푸른 용의 탑과 흰 호랑이 탑이 매번 싸우는지 알 것 같다.’
“반사는 따로 했습니...”
“반사 속성까지... 솔직히 놀랐네.”
푸요의 깃펜이 빠르게 움직여질수록 이한은 불안해졌다.
보통 교수들이 저런 짓을 자주 했는데, 하고 나서 이한에게 좋은 적이 별로 없었다.
푸요는 끈질기게 마저 캐묻고 나서 만족스럽게 깃펜을 내려놓았다.
“과연. 버두스 교수가 같이 작업한 이유를 알겠네.”
“교수님께서는 좋은 말씀을 해주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만...”
“그건 버두스 교수의 성격이 원래 그래서 그런 걸세.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봐야 알 수 있지.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이 뛰어나단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정말 놀랍군. 흠... 이쪽으로 와보겠나?”
푸요는 아까는 허락하지 않았던 공방의 안쪽을 가리켰다.
그걸 본 이한은 불길함을 느꼈다.
마치 버두스 교수가 이한을 불렀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푸요 님. 여기 황녀님도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
이한이 공방 안쪽에 갔다오나보다 생각하고 있던 황녀는 당황했다.
“워다나즈 님...!”
“워다나즈 이 자식이 배려심이 있다니까.”
로웨나와 클트란은 이한의 배려심에 감탄했다.
푸요의 공방을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친구와 함께 하다니.
그러나 황녀는 둘과 생각이 달랐다.
뭔가 이한이 혼자 끌려가기 싫어서 부른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마음대로 하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실력이 없지는 않겠지.”
“괜찮답니다. 가시죠.”
황녀는 이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살짝 반성했다.
순전히 느낌 때문에 친절을 베풀고 있는 친구의 선의를 의심하다니.
황족으로서 있을 수 없는 오만한 행동이었다.
“...불러줘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대신 푸요 님이 일 시키시면 같이 좀 하죠.”
“...!!”
황녀는 경악에 찬 얼굴로 앞장서서 걸어가는 이한을 쳐다보았다.
저...?!
* * *
“이 지팡이들을 한 번 다듬어보게.”
푸요는 그림이 그려진 종이와 함께 목재들을 내밀었다.
이한과 황녀는 공방 안쪽 의자에 앉아 묵묵히 작업에 들어갔다.
이한은 황녀가 옆에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못 본 척 무시했다.
‘나갈 때까지 시선 피해야겠군.’
원래 교수가 불렀을 때는 다른 친구와 같이 가는 게 좋았다.
일을 나눠서 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경우 친구를 희생양으로 두고 자신은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물론 친구가 원망할 수도 있다는 사소한 문제점이 있긴 했다.
“훌륭하군.”
푸요는 두 학생의 작업에 만족스러워했다.
이한 같은 경우는 방금 들은 사실은 물론이고 버두스 교수가 보증한 만큼 기대가 컸는데, 그 기대를 전혀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 정도면 어중간한 신참 부여 마법사보다 훨씬 뛰어난 편이었다.
황녀의 경우도 그랬다.
다른 추종자들의 말만 들어서 괜찮을지 걱정했는데, 손을 놀리는 걸 보니 마법 재능을 타고났다는 게 느껴졌다.
지팡이를 깎는 건 그냥 그림을 보고 똑같이 따라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깎을 때마다 느껴지는 지팡이 주변의 마력 흐름을 파악하고,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게 모양을 맞춰나가야 했다.
감각이 부족한 마법사는 아무리 시켜도 따라하지 못하는 일인 만큼, 둘의 결과물은 더욱 만족스러웠다.
푸요는 그 뒤로도 몇 개의 과제를 더 내줬고 둘은 훌륭하게 해냈다.
마침내 확신이 선 푸요가 입을 열었다.
“혹시 남은 방학 동안 내 공방에서 부여 마법을 좀 배워볼 생각 있는가?”
“!”
푸요의 제안은 단순한 일자리 제안이 아니었다.
그랑덴 시뿐만이 아니라 제국에서도 알아주는 아티팩트 장인인 푸요였다.
게다가 푸요는 어지간한 마법사들은 공방의 제자로 받지도 않는 까다로움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 푸요의 밑에서 일할 제안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명성이 올라가는 일이었다. 하물며 둘은 아직 신입생이었다.
황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푸요는 고맙다는 듯이 마저 대답했다.
“일이 쉽다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분명 배우는 게 많을 걸ㅅ...”
말하던 푸요는 이상함을 깨달았다.
황녀만 대답한 것이다.
“혹시 다른 계획이 있나?”
이한이 대답을 망설이자 푸요 뿐만 아니라 황녀도 황당해했다.
자기가 데리고 와놓고 자기만 빠진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란 말인가.
툭툭툭툭툭!
황녀가 옆에서 치는 건 무시하고, 이한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물어보게.”
“보수도 나옵니까?”
이한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미 버두스 교수 같은 사람은 금화 한 푼 내지 않고 이한을 착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대단한 부여 마법사라도 그런 착취자를 더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오지. 지금 농담한 건가?”
푸요는 이한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한 정도 되는 학생이 저런 질문을 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예. 농담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일하고 싶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이한은 푸요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보수만 나온다면 푸요의 공방은 정말 괜찮은 일자리였다.
무엇보다 희귀한 재료들을 마음껏 접할 수 있다는 게 컸다.
이 중에서 버려지는 게 한두개 정도는 있을 것 아닌가.
‘가져가서 연습하겠다고 하면 설마 뭐라고 하시겠어?’
속으로 기뻐하던 이한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서 물었다.
“그런데 버두스 교수님께서 제가 여기서 일하시는 걸 알면 불만을 가지실까요?”
“그건 걱정 안 해도 되네.”
푸요의 즉답에 이한은 안심했다.
부여 마법사들끼리 이 정도 일은 서로 암묵적으로 넘어가주는 게 틀림없었다.
“아. 역시 부여 마법사들끼리 이런 부분은 서로 존중을...”
“원래 뺏긴 놈이 머저리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