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왜 그러나?”
“화염의 기운을 증폭시켜서 억누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알겠네.”
푸요는 이한이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단순한 방법이라서 마음에 들지 않는 거로군.”
“...아닙니다.”
이한은 순간 울컥할 뻔했다.
부여 마법사로서의 독특한 미의식 같은 건 지금 상황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제가 화염 마법 관련해서는 통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자네 정도 되는 마법사가 말인가?”
푸요는 이한의 말에 당황했다.
화염 원소는 여러 원소 중 난이도가 쉬운 편에 속했다.
다른 원소들과 달리 살면서 화염은 접하기 쉬운 원소였으니까.
지금 이한의 말은 복잡한 미적분이 가능한 사람이 덧셈에 어려움이 있다는 말과 비슷했다.
“마력이 많아서...”
“아무리 많아도 그렇지 화염을 통제하기 힘들 정도인가?”
“예.”
“......”
이한의 즉답에 푸요는 다시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
“정말 놀라운 일이군... 정말 놀라운 일이야.”
‘두 번이나 강조하실 필요는 없는데.’
“그렇다면 이해가 가네. 괜히 화염의 기운을 증폭시켰다가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겠군.”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렵게 됐군.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는데.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한은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비용이 많이 드는 방법입니까?”
“아닐세. 난이도가 높은 방법이라서 고민한 거라네. 단순히 마법을 부여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마법사의 실력도 필요한 방법이라서.”
푸요는 종이 위에 간단한 도식을 그렸다.
서리거인의 왕이 남긴 돌.
이 돌의 힘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상극의 속성인 화염을 배치하거나, 아니면 제어 가능한 다른 속성을 배치해야 했다.
화염이 아니라면 그 다음으로 좋은 속성은 바로...
“암흑 원소지. 문제는 암흑 원소를 다룰 줄 모르는 마법사의 지팡이에 암흑 원소 속성 보석을 꽂아 넣어도 되느냐인데...”
암흑 원소는 화염 원소와 달리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축에 들어가는 원소였다.
이런 원소의 힘을 가진 보석을 지팡이에 추가했다가는 나중에 마법사가 주문을 외울 때 영향을 받을 수도 있었다.
“저 암흑 원소 다룰 줄 압니다.”
“...그, 그런가. 그러면 그렇게 작업하도록 하겠네.”
푸요는 경악이 서린 눈빛으로 이한을 보며 말했다.
* * *
요네르는 신중하게 주사위를 굴렸다.
이번에 3이 나올 경우 ‘마법 시험 실패’ 칸에 걸려서 한 턴 동안 쉬어야 했다.
지금도 불리한 상황인 만큼 그럴 경우 역전은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후후후후.”
옆에서 가이난도가 음침하게 웃었다.
8판이나 지고 나서 드디어 이길 때가 온 것이다.
“야. 조용히 입 다물고 해.”
“맞습니다. 조용히 좀 하십시오.”
닐리아와 랫포드가 바로 구박을 날렸다.
둘은 <친구에게 속아서 마법 시약을 뺏김> 칸과 <유물을 훔치려다가 체포됨> 칸에 걸려서 매우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가이난도는 입 다물고 속으로 전략을 세웠다.
‘이번에 요네르가 굴리고 나면 <흑마법사들의 묘지 대모임>을 발동해서...’
“어? 워다나즈다!”
닐리아는 창밖으로 이한이 정문에 들어오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일어섰다.
그 서슬에 승마도 판이 기울어지고 말들이 넘어졌다. 가이난도는 울부짖으며 말들을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랫포드와 요네르도 뒤이어 일어섰다. 판은 완전히 넘어가고 말들은 바닥에 흩어졌다.
“워다나즈!”
“애들아. 소리지르지 마. 머리 울리니까. ...가이난도는 왜 울고 있지?”
“네... 네가 돌아온 게 기뻐서...”
이한은 바닥에 흩어진 말들을 힐끗 보고 물었다.
“혹시 주사위 게임 이길 뻔한 거 져서...”
“아, 아닌데? 아닌데?”
가이난도가 발로 말들을 밀어놓는 사이 이한은 소파에 털썩 드러누웠다.
랫포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왜 며칠 동안 저택에 오지 않으셨던 겁니까? 설마 공방에서 가두지는 않았을 테고.”
“가뒀는데.”
“......”
“......”
“직접 가두진 않았지만 사실상 가둔 거나 마찬가지지.”
이한은 신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양의 과제를 내놓고 제한시간을 걸어버리면 저택에 갈 수가 없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저택 갈 시간은 어디 있었겠는가.
닐리아는 너덜너덜해진 친구의 모습에 분개했다.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며칠 동안 가둬놓고 일만 시키다니. 그림자 순찰대에서도 이러진... 이러긴 했는데, 제국의 도시에서 이런 짓을 하다니!”
“괜찮아. 닐리아.”
“뭐가 괜찮은 건데?”
“보수가 좋아.”
“......”
“......”
이한은 가이난도가 마시던 코코아를 뺏어서 들이켰다. 그걸 보던 랫포드가 입을 열었다.
“공방도 공방인데 애초에 거길 데리고 간 놈들이 나쁜 놈들 아닙니까? 그 놈들 흰 호랑이 탑 놈들이었죠?”
“하여간 흰 호랑이 탑 놈들은!”
이번에는 딱히 흰 호랑이 탑 잘못이 아니었지만 두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흰 호랑이 탑을 욕했다.
옆에서 그러는 사이 이한은 요네르에게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그래서 그 수수께끼를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 공방에 들리게 된 거지. 그런데 공방에서 일하면 금화를 준다길래...”
“잠깐.”
듣고 있던 요네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이난도도 동감한다는 듯이 말했다.
“아무리 금화가 중요해도 그렇지, 그런 식으로 친구도 못 만나게 일을 시키는 곳은 좋은 곳이 아니야. 그렇지? 그걸 말하려는 거였지?”
“아닌데.”
“...아니야?”
요네르가 고개를 갸웃거린 건 그 수수께끼 때문이었다.
‘지팡이를 만들어오라는 게 아니라, 진짜 수수께끼 같은데...?’
요네르가 보기엔 아무리 봐도 정말 수수께끼 같았다.
만약 추측이 맞았다면 저건 달을 비유하는 수수께끼였다.
예전에 이칼도렌 공작이 달의 힘이 깃든 고대 유물을 아주 힘들게 얻어서 귀하게 여기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만큼, 그걸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럼 뭘 말하려는 건데?”
“...별로. 아무것도 아니야.”
“뭐야.”
가이난도가 투덜댔지만 요네르는 말을 삼켰다.
일단 황녀의 추종자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정말로 수수께끼가 아니었을 가능성도 높았고, 무엇보다...
‘이제와서 말하면 너무 불쌍해.’
친구가 기껏 고생해서 끝내고 돌아왔는데 사실 그게 아니라고 말하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말을 들어보니 이칼도렌 공작은 저번에도 정답이라고 인정해줬다고 했다. 아마 황녀의 체면을 존중해서 어떤 대답을 내놓든 간에 인정해주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괜찮으리라.
“참. 버두스 교수님은?”
이한은 오면서 궁금했던 걸 물었다.
버두스 교수의 성격에 이한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뭔 난리를 쳤어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이상할 정도로 잠잠했다.
그리고 그게 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가셨는데?”
“나가셨다고?”
이한은 놀랐다.
“어디 가시는지 혹시 물어봤어?”
“그런 짓을 어떻게 해?”
닐리아가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버두스 교수가 나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해야지, 어디 가냐고 물어봤다가 다시 돌아오기라도 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이한은 닐리아의 말에 납득했다.
‘하긴 맞는 말이군.’
“그래도 다행입니다. 이제 교수님들은 다 돌아가셨잖습니까.”
랫포드의 말에 이한은 쓸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른 교수들이 올 수도 있지.”
“그건 말도 안 됩...”
“이한 학생 있어요?”
“......”
랫포드는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저택 정문 앞에 덩치 큰 트롤 혼혈 교수가 예의바르게 서있었다.
“봐라.”
이한은 놀라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랫포드는 다급하게 속삭였다.
“없다고 할까요?”
“별로 효과 없을 걸. 내가 도착한 시간에 맞춰서 오신 걸 보면 어디선가 정보를 얻고 오신 걸 거다.”
“그, 그런...”
“가르시아 교수님마저 이러신다고?!”
닐리아는 배신감을 가득 담아 내뱉었다.
다른 교수들은 몰라도 가르시아 교수마저 방학 때 이렇게 찾아와서 학생을 괴롭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
“닐리아. 교수님들은 다 똑같아. 너무 실망하지 마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르시아 교수님은 믿었는데!”
* * *
“다른 교수님들이 이한 학생을 방문해서 괴롭히고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 막아주려고 찾아왔어요. 버두스 교수님이 잘 납득하고 떠나주셔서 다행이에요.”
“......”
“......”
“으아앙! 가르시아 교수님!”
닐리아는 참회의 울음을 터뜨리며 가르시아 교수를 끌어안았다. 가르시아 교수는 당황해서 다른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왜 이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르시아 교수님.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한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저런 교수님을 의심하다니.
스스로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교수들을 상대하는 동안 나는 양심마저 잃어버린 것인가?’
“그런데 진짜 아무것도 안 시키실 거예요?”
가이난도는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가이난도는 아직 의심을 풀지 않고 있었다.
만나는 교수란 교수마다 이한을 데리고 가서 추가 강의를 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르시아 교수도 이렇게 경계심을 푼 다음 이한을 몰래 데리고 갈 수도 있었다.
“너! 가르시아 교수님한테 그게 무슨 건방진 소리야!”
“너야말로 가르시아 교수님이 몰래 이한 납치해가지고 가버리면 어떡할 건데!”
“......”
학생들이 서로 손가락질하며 싸우는 모습에 가르시아 교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른 교수들이 워다나즈 가문의 저택에서 얼마나 행패를 부렸으면 학생들이 이런단 말인가.
‘교장 선생님의 탓이야, 이건!’
학생이 방학 동안 어디서 머무르는지 알려주는 것 자체는 잘못된 일이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해골 교장이 알려준 건 사악한 의도가 분명했다.
말을 들은 교수마다 차례대로 한 명씩 방문하면서 저택을 뒤집어놓고 있지 않던가.
당장 버두스 교수도 그랬다.
가르시아 교수가 밀린 업무를 끝내고 올 때까지 손님용 객실에 자리 잡고 자기 공방처럼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버두스 교수를 내보내기 위해 얼마나 어르고 달래야 했는지...
“저는 정말 아무것도 시킬 생각이 없어요.”
“거짓말 같은데요.”
가이난도의 퉁명스러운 말에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나도 그렇다.’
아무것도 시킬 생각이 없는 교수라니.
너무 초월적인 개념이라 도저히 이한의 사고능력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냥 이한 학생이 좀 쉬었으면 좋겠어요. 원하는 거 하고요. 교수님들이 찾아와서 괴롭히기 전에는 원래 뭐 하려고 그랬어요?”
“금화 벌...”
일하려고 했다는 이한의 말이 나오기 전에 요네르가 허벅지를 쿡 찔렀다.
여기서 진실을 말해봤자 가르시아 교수는 쓸데없이 더 걱정할 가능성이 높았다.
-휴식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지!
-그렇군.
이한은 요네르의 뜻을 알아차렸다.
-...어. 휴식과 관련된 이야기는 뭐가 있지?
-......
마법이나 작업에 관련된 일이라면 어떤 질문을 받아도 막힘없이 대답하는 학년 수석 친구가, 휴식과 관련된 이야기는 바로 짜내지 못하자 요네르는 눈물이 올라올 것 같았다.
-뭐라도 사러 간다고 하면?
-나쁘지 않군.
“상점가를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살 생각이었습니다.”
이한의 모범적인 대답에 가르시아 교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행이다!’
그래도 이한 학생이 나름 생각해놓은 휴식이 있었던 것이다.
“설마 마법사 카드야?!”
“아니. 그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