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그래도 한 번쯤 들려도 되지 않나...”
가이난도가 옆에서 중얼거리는 건 못 들은 척 넘기고, 가르시아 교수는 이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들, 상점가를 구경할 생각이라면 내가 살게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이한은 의아해하며 가르시아 교수를 쳐다보았다.
에인로가드의 분위기를 봤을 때 교수가 제자에게 무언가를 사주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래도 되나?
“보통 그러진 않죠. 하지만 가끔 예외도 있는 법이니까요. 이번만 내가 사주는 거예요.”
가르시아 교수가 눈짓을 보내자 닐리아는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많이 뛰어난 학생이라 예외에 들어가는 거죠?”
“아니요. 많이 안타까운 학생이라 예외에 들어가는 건데요.”
“......”
이한은 침울해져서 가르시아 교수의 뒤를 따랐다. 닐리아는 괜히 미안해져서 이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 * *
수많은 종족들로 뒤섞인 인파가 오고 가는 그랑덴 시의 거리에서도 가르시아 교수는 유독 눈에 띄었다.
물론 대도시인 그랑덴 시의 사람들은 촌스럽게 가르시아 교수를 보고 도망치거나 ‘트롤이다! 트롤이 도시에 나타났다!’하고 울부짖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침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걸어 다니는 트롤이군.”
“아마 마법 실험을 받았거나 트롤로 변신한 마법사 아니겠나.”
“자네, 설마 겁을 먹은 건 아니겠지? 다리가 떨리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을? 자네야말로 왜 시선을 피하나?”
도망치거나 울부짖진 않아도 사람들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교수님.”
이한이 속삭이자 가르시아 교수가 괜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한 학생. 걱정 안 해줘도 괜찮아요. 사람들이 저렇게 반응하는 건 익숙해졌거든요.”
“아. 그게... 걱정이 아니라 저 사람들 입 닥치게 해도 되냐고 물으려고 했습니다.”
교수를 걱정하는 대신 교수를 모욕한 사람들을 입 닥치게 만드는 것이 진짜 제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가르시아 교수는 넘어가지 않았다.
“...안 됩니다.”
“안 됩니까?”
“안 됩니다. 지팡이에서 손 떼세요.”
가르시아 교수는 엄하게 말했다.
볼ㄹ... 아니, 누군지는 몰라도 제자가 지나치게 힘에 의존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하지만 저 자들은 계속 지껄일 텐데요.”
“상관없다고 말했잖아요. 자. 여기 레스토랑의 스테이크 샌드위치가 정말 맛있어요. 내가 사줄 테니까 다들 들어가요.”
가르시아 교수는 대로 옆에 위치한 3층짜리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붉은 벽돌로 단단하게 쌓아올린 건물의 입구에는 음식 그림이 새겨진 낡은 황동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 앞에는 긴 줄이 서있었다.
‘유명한 가게인가보군.’
그리고 가르시아 교수가 줄의 맨 끝에 서자 앞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친절하게 양보하기 시작했다.
“아, 아차... 갑자기 약속이... 먼저 드시지요.”
“제가 마법사 님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마법사 님들을 만나면 자리를 양보하는 습관이 생겼답니다.”
“......”
“......”
학생들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뭔 말도 안 되는...
그러나 가르시아 교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도 많이 봐서 별로 놀라지도 않는 태도였다.
“다들 양보해주시다니. 잘 됐네요. 들어갈까요?”
‘교수님도 은근히 에인로가드 출신 같으실 때가 있단 말이지.’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가 상처받을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교수의 말대로 스테이크 샌드위치는 맛있었다. 바삭바삭한 빵 사이에 잘 구워진 두툼한 스테이크와 양파, 토마토와 소스가 들어차있어서 한 입 먹을 때마다 묵직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가이난도는 이런 인기 있는 레스토랑에 줄도 서지 않고 손쉽게 들어온 가르시아 교수를 매우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교수님. 대단하십니다.”
‘이 새끼는 눈치가 없나.’
이한은 앞에 있는 음료라도 뿌려버릴까 생각했다.
다행히 가르시아 교수는 화를 내거나 하지 않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트롤 혼혈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죠.”
“저도 트롤 혼혈이 될 수 있을까요?”
“앞으로 변환 마법을 열심히 연습하면 가능하죠.”
가르시아 교수는 가이난도를 응원해줬다.
동기야 좀 이상하더라도 마법을 공부하려는 학생이 있다면 가르시아 교수는 언제나 응원했다.
“근데 전 변환 마법을 배울 생각이 없는데요.”
“그럼 힘들지 않을까요?”
“다른 마법은 정말 불가능한가요?”
가르시아 교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가이난도가 무슨 마법을 배웠는지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흑마법을 떠올린 가르시아 교수는 입을 다시 열었다.
“꼭 트롤 혼혈이 아니더라도 흑마법사는 사람들이 피ㅎ... 아. 아니다.”
가르시아 교수는 자기가 실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흑마법을 배우는 학생 앞에서 슬픈 흑마법사의 현실에 대해서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가이난도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한은 이미 눈치챈 뒤였다.
‘이해합니다. 교수님.’
이한은 다 안다는 눈빛을 보냈다. 가르시아 교수는 많이 미안해졌다.
“...샌드위치 먹어요. 이한 학생. 음료도 좀 마시고요. 바닐라 에그 크림 마실래요? 아니면 소다 아이스크림?”
“저 정말 괜찮습니다.”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가 미안해하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잘못은 다른 교수들이 했는데 왜 가르시아 교수가 저런단 말인가.
물론 가르시아 교수의 책임이 완전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교수들과 비교했을 때 가르시아 교수는 천사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너무 즐겁습니다. 그렇지? 닐리아?”
“어? 어. 즐, 즐겁지. 즐거운데? 와. 정말 즐거워.”
밀크셰이크를 마시고 있던 닐리아는 허둥대며 대답했다. 덕분에 잔을 쏟을 뻔했다.
그 때 갑자기 가르시아 교수의 안색이 변했다.
“여러분. 계속 드시고 계세요. 전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
가르시아 교수가 빠르게 가게 밖으로 걸어나가자 친구들은 닐리아를 보며 말했다.
“대답을 그렇게 하면 어떡해!”
“갑, 갑자기 물어보니까 그렇지! 생각이 안 났어!”
“교수님 화나신 거 아니지?”
“...요, 요네르. 나랑 자리 좀 바꾸자. 내가 이한 옆에 앉을래.”
“헛소리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라. 가이난도.”
이한은 궁금해졌다.
가르시아 교수는 왜 갑자기 밖으로 걸어나간 걸까?
‘아는 사람이라도 발견한 건가?’
그러나 그런 것치고 표정이 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 *
“크라어 교수. 어서. 응? 빨리.”
“아, 자꾸 지랄해대면 거래고 뭐고 나무껍질을 목구멍에 처박아버릴 줄 아니까 그렇게 아쇼!”
에인로가드에서 학생들에게 예지 마법을 가르치는 교수, 크라어 교수는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에도 버두스 교수와 친하진 않았지만 지금 크라어 교수는 성질 더러운 인격이 밖에 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버두스 교수의 칭얼거림을 참아줄 만한 인내심이 없었다.
그러나 버두스 교수도 만만치 않았다.
“알겠으니까 빨리. 처박아도 되니까 빨리 찾기나 해줘.”
“......”
크라어 교수는 욕설을 참으며 산통(算筒)에서 산가지를 뽑으려고 했다.
아까부터 점점 범위가 좁혀지고 있는 걸 보니 거의 다 와가고 있었다.
이제 한두번만 더 하면...
“지금 두 분께서 무슨 지랄을 하고 계시는 건가요?”
“......”
“......”
버두스 교수마저 움찔해서 쭈그러드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크라어 교수의 성질 더러운 인격은 재빨리 저 아래로 도망쳐버렸다.
억지로 끌려나온 소심한 인격은 다른 인격을 저주하며 변명에 나섰다.
“가, 가르시아 교수님...”
“당장 다른 인격 안 튀어나와요?”
“......”
다시 성질 더러운 인격이 튀어나왔다.
가르시아 교수는 둘을 노려보며 물었다.
“여기서 뭐하고 계셨어요?”
“점치고 있었어...”
버두스 교수는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무슨 점이요?”
“산통점(算筒占)...”
산통에 든 산가지를 뽑아서 미래를 읽어내는 점으로, 뛰어난 예지 마법사는 이 산통점으로 온갖 징조들을 읽어내곤 했다.
달인 중의 달인인 파셀레트 크라어 교수라면 학생 한 명의 위치도 충분히 찾아낼 수 있을 터.
“내가 잘못했소! 내가 잘못했소! 가르시아 교수! 한 번만 용서해주시오! 우린 친구 아니오!”
“내 친구는 다른 인격이지 그쪽 아니니까 입 다물고 있어요.”
크라어 교수는 입을 다물었다. 가르시아 교수의 꽉 쥐어진 주먹이 무서웠던 것이다.
“지금 혹시 보수를 약속받고 학생을 찾고 있었던 건가요?”
가르시아 교수는 이미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버두스 교수는 에인로가드 안에서도 손꼽힐 만큼 아티팩트를 많이 갖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 그 중 하나를 걸고 크라어 교수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크라어 교수의 멀쩡한 인격은 그런 위험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다른 인격들 모두가 그럴 수는 없었다.
아마 저 성질 더러운 인격이 제안을 덥썩 받아들인 게 분명했다.
“응...”
“저번에 돌려보낼 때 제가 뭐라고 했나요?”
“학기 시작하고 만나라고...”
“그런데 왜?”
“나도 모르게...”
“......”
버두스 교수의 뻔뻔한 대답에 가르시아 교수는 할 말을 잃었다.
하긴 해골 교장 앞에서도 자기 할 말 하는 미치광이한테 협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 가르시아 교수의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해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돌아가세요. 학기 시작하고 만나시면 되잖아요.”
“근데 그럼 다른 놈들이 시간을 나눠쓰려고 하잖아.”
“다른 놈이 아니라 다른 교수들이고요, 시간을 나눠 쓰는 건 원래 당연한 거잖아요?”
“하지만 다른 놈들의 마법보다 내 마법이 중요...”
“제발 아가리 좀 닥쳐주시오.”
크라어 교수의 성질 더러운 인격이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버두스 교수는 목숨이 안 아까울 수 있어도, 크라어 교수의 성질 더러운 인격은 목숨이 매우 소중했다.
“정말 부탁 좀 드릴게요. 두 분. 빨리 돌아가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크라어 교수는 재빨리 버두스 교수를 데리고 돌아섰다.
언제 가르시아 교수가 생각을 바꿔서 분노의 철권을 휘두르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르시아 교수는 그 뒷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버두스 교수가 말을 안 들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무슨 며칠도 안 되서 저렇게 바로 움직일 줄이야.
‘...설마 다른 교수님들도 저러시는 건 아니겠지.’
* * *
“아. 돌아오셨군요. 가르시아 교수님. 무슨 일 있으셨나요?”
학생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가르시아 교수는 거짓말을 했다.
“아는 사람을 잠깐 발견해서 이야기하고 왔어요.”
“와. 교수님은 역시 친구도 많으시군요.”
닐리아는 감탄했다.
교수 정도 되면 그랑덴 시 대로에 지나가는 사람들 중 아는 사람이 한 명씩 나오는 걸까?
“그 정도는 아니에요. 다들 먹었으면 일어날까요? 뭐 마실래요? 술? 커피? 차?”
“차가 좋겠습니다.”
“잘됐네요. 좋은 찻집을 하나 소개해줄게요.”
가르시아 교수는 학생들을 데리고 단골 찻집으로 이동했다.
아까 레스토랑과 달리 골목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해서 비교적 한적한 느낌이 감돌았고, 담쟁이덩굴이 우거진 나무벽 너머로 다향(茶香)이 짙게 흘러나왔다.
“전 여기서 청차(靑茶)를 좋아해요. 다들 한 번... 잠깐. 여러분. 계속 드시고 계세요. 전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
가르시아 교수가 또다시 일어나서 밖으로 향하자 학생들은 의혹과 당황의 눈빛을 보냈다.
대체 무슨 일이신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