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이한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이상하게 시야가 흐릿했다.
‘비가 오나.’
“...뭐라도 좀 드시는 게 낫겠습니다. 제가 사오겠습니다.”
“아니야. 우리가 사줘야지.”
“안 그래도 후배들 안 들어오는데, 후배 은화 뺏어서 아이스크림 사먹었다가는 더 안 들어올 거야.”
선배들은 이한을 분수대 앞에 앉히고 아이스크림 가판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니까 싫다니까요...
-...이쪽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
걸어간 선배들이 아이스크림 장수와 말다툼을 하는 모습에 이한은 당황했다.
‘뭐지? 가격 흥정에 실패하신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이한은 가서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저러시는 겁니까?”
“아... 우리 아는 상인 분들은 우리한테 은화 안 받으려고 하시거든.”
“!”
-받을 수 없습니다. 안 받을 겁니다.
-허허. 치유 마법사 분들께서 잘못하셨습니다. 진 신세가 얼마인데 은화를 내려고 하십니까.
-맞습니다. 참. 여기 크레페 만들었는데 좀 드시고요.
-뭐라고? 에인로가드의 치유 마법사들이 오셨나?
말다툼이 길어지자 주변에 있던 상인들이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을 알아본 상인들은 자기가 팔고 있는 간식들을 한아름 싸들고 와서 차곡차곡 얹어주었다.
선배들은 어쩔 줄 몰라서 쩔쩔맸다.
-괜찮...
-세상에 삐쩍 말라서 뼈만 보이잖나!
-그건 편견...
-정말이야! 더 드셔야 해!
-저희가 치유 마법사인데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것도 가져가십시오!
몰려든 상인들한테 영혼까지 탈탈 털린 선배들은 반쯤 혼이 나간 얼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산더미 같은 간식들을 우르르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많이 먹어라. 후배.”
“...같, 같이 드실 거죠?”
“응. 근데 우린 일 너무 많이 해서 입맛이 없어. 네가 많이 먹어야 해.”
“......”
이한은 배가 터지더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인기라도 좋으셔서 다행이군.’
흑마법사도 가게 가면 은화 안 받으려고 할 때가 있었지만 그건 조금 의미가 달랐다.
여기 치유 마법사들은 정말로 은화 안 받고 대접해주려는 것에 가까웠다.
선배들은 아이스크림콘을 하나씩 들고 분수를 구경하거나 마법사 카드 게임을 하거나 판을 깔아놓고 주사위를 굴려 승마도를 했다.
모두의 얼굴에는 잔잔한 행복과 평화가 가득...
쿠르릉!
“무슨 소리야 이게?”
“길드 구역에서 사고 났나보다! 저거 그거잖아! 이번에 새로 짓던...”
“연기 올라오는데 불 난 거 아니야?!”
“......”
선배들은 묵묵히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배님들. 설마...”
“미안하다. 워다나즈.”
“혹시 모르잖아. 교수님이 우리 도움 필요할 수도 있어.”
“오늘 덕분에 너무 즐거웠다. 너 같은 후배가 들어와서 다행이야.”
“아니...!”
말리기도 전에 선배들은 도넛 하나씩 입에 물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버렸다.
“교장 선생님께서 계시니까 괜찮을...!”
이한이 안타깝게 외쳤지만 선배들은 손만 흔들어주고 가버렸다.
산더미처럼 쌓인 간식들만 남자 이한은 한숨을 쉬었다.
‘저렇게 몇 년 더 지내면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성질 더러워지겠다.’
상인들까지 사고 현장을 구경하러 간 탓에 광장이 한적해졌다.
그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혼자서 이렇게 먹고 있지?”
“...!”
이한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인자한 할머니 같은 인상을 하고 있는 노마법사가 뒤에 서있었다.
“유미디후스 님...!”
“오랜만이구나.”
제국에서 이름난 물 원소 마법사인 유미디후스는 이한 앞에 앉더니 와플을 가리켰다.
“당연히 드셔도 됩니다.”
“고마워라.”
유미디후스는 아무런 동작도 없었는데 탁자 위의 시럽들이 솟아올라서 와플 위에 살포시 덮였다.
한 입 베어 문 유미디후스는 이한을 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긴장하고 있니?”
“그야...”
유미디후스 자체는 그럭저럭 적당히 미친 마법사였지만 유미디후스의 등장 뒤에 올 마법사는 이야기가 달랐다.
“...배그렉 교수님께서 2학기 강의 때 필요한 걸 준비하시려고 유미디후스 님을 찾아가시지 않았습니까?”
“아하. 그랬지.”
유미디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볼라디 배그렉이 못 찾았을까봐 걱정한 거구나.”
“...아, 예.”
이한은 얼굴 근육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유미디후스는 괜찮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잘 찾았으니 걱정할 거 없단다.”
“예...”
으득.
“그나저나 물 원소 마법을 보고 싶은데. 보여줄 수 있느냐?”
이한은 지팡이를 붙잡았다. 유미디후스는 부드럽지만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띄워보렴.”
“샘솟아라!”
“형태 변환.”
“벽이 되어라!”
“슬슬 한 번에 할 때가 됐지. 한 번에 해보렴.”
이한의 주문 시전 속도는 다른 마법사들과 비해서 손꼽힐 정도로 빨랐다.
전투 마법사로 혹독하게 훈련 받고 있는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만큼 물 원소 마법을 쓸 때 각 과정을 나눠서 시전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미디후스는 슬슬 그것도 졸업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뛰어난 마법사처럼 한 번에.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할 때가 되긴 했다.’
물론 다른 친구들이 들었다면 ‘워다나즈 정신 차려 너 아직 1학년이야 무슨 할 때가 돼’라고 했겠지만 이한의 관념도 다른 교수들 때문에 살짝 무너진 상태였다.
“물이여, 방패로!”
물을 띄우고 방패로 변환시키는 동작을 주문 하나와 동작 하나로 깔끔하게 압축해냈다.
“훌륭하구나.”
“운이 좋았습니다. 가장 익숙한 원소라...”
“그 익숙함은 네 노력에서 나온 거니 운이라고 말하면 안 되지.”
유미디후스가 손을 휘두르자 분수의 물이 솟구쳐서 벽으로 변했다.
“회전 속성을 한 번 보자꾸나. 이 벽을 뚫을 수 있겠느냐?”
“해보겠습니다.”
물 원소의 고급 속성 중 회전 속성은 이한이 1학기 때부터 꾸준하게 연습해왔던 속성이었다.
물론 그만큼 쉽지 않았다.
나찰아귀를 상대할 때 몇 번 제한적으로 쓰긴 했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으니까.
지금 이한의 수준에서 회전 속성을 제대로 다루려면 위력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적당한 회전에서 끝내거나, 아니면 작정하고 시간을 갈아 넣어야 했다.
유미디후스는 이한이 이런 문제를 어디까지 극복했을지 궁금했다.
물론 평범한 학생이었다면 2, 3학년 넘게 노력을 해야 하겠지만 지금 앞에 있는 학생은 좀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촤르르르륵!
“?!”
유미디후스는 놀랐다.
이한이 물 구슬 수십 개를 불러낸 것이다.
‘무슨 생각이지?’
“돌아라!”
주문과 함께 물 구슬 수십 개 중 몇 개가 형태를 잃고 사라져버렸다.
회전 속성이 어설프게 부여된 탓에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마법이 취소된 것이다.
이한은 살아남은 물 구슬들 중 제대로 회전이 걸린 구슬들에 정신을 집중했다.
회전이 더욱 빨라지자 몇 개의 구슬들이 또 취소됐다. 이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구슬들을 가속시켰다.
“......”
유미디후스는 솔직히 감탄했다.
이한이 가진 마법의 재능에 감탄한 게 아니었다. 그건 이미 예전에 감탄한 뒤였다.
유미디후스가 감탄한 건 이한의 사고방식이었다.
마력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저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마법사는 흔치 않았다.
마법 하나를 완성시키기 위해 다른 마법 수십 개를 제물로 쓰다니.
마법사들이 보면 터무니없는 낭비였지만 이한에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채 몇 분도 되지 않아서 맹렬히 회전하는 물 구슬 하나가 완성되었다.
퍽!
그 구슬이 유미디후스가 세운 방벽을 손쉽게 관통하자, 노마법사는 박수를 쳤다.
“잘했구나. 솔직히 놀랐다.”
“그렇습니까?”
이한은 반색했다.
솔직히 하면서도 유미디후스가 ‘아직 그 정도밖에 안 되니’라고 할까봐 걱정했었다.
그런데 저렇게 만족스러워하니 안심이 됐다.
“당연히 잘한 거지. 왜 놀라는 거니?”
“아직 부족함이 많아서...”
“볼라디 배그렉 때문에 네가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있구나. 잘하고 있는 거 맞단다.”
“감사합니다.”
볼라디 교수의 욕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이한은 고개를 숙였다.
“원래 막혀 있으면 조언을 해주려고 했는데, 저런 방식이라니... 내가 조언을 해줄 것도 없겠구나.”
“예? 아닙니다. 조언 해주시죠.”
이한은 억울했다.
저런 구슬 수십 개 띄워서 하는 방식이 좋을 리 없지 않은가.
유미디후스 같은 대마법사의 훌륭한 조언이라면 저런 무식한 방식보다 훨씬 더 효과적일 텐데...
“아니야. 잘 하고 있다.”
유미디후스는 이한의 방식이 매우 좋다고 생각했다.
원래 마법에는 왕도가 없는 법.
특히 회전 속성처럼 미묘한 감각이 중요한 마법은 계속해서 경험해보고 쌓아나가는 게 중요했다.
지금 이한처럼 구슬 수십 개를 미친놈처럼 띄워놓고 전부 회전 먹이는 방법은 의외로 매우 효과적이었다.
저대로 계속한다면 곧 회전 속성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볼라디 교수가 걸어오자 이한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교수의 옷매무새가 무슨 전쟁터에서 바로 걸어온 것마냥 너덜너덜 해져있었던 것이다.
‘대체 뭘 잡아온 거지?’
볼라디 교수가 잡아온 걸 2학기 때 바로 상대하게 되는 만큼 이한의 영혼 속에서 두려움이 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왜 늦은 거지?”
“다른 교수들이 사고 현장 수습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네가 거절을 안 하다니 신기한 일이구나.”
“고나달테스 님께서도 요청하셔서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고나달테스?”
유미디후스는 깜짝 놀랐다.
해골 교장이 저런 걸 직접 해결하려고 나서는 성격은 아니었다.
보통 제자들이나 교수들을 시키면 시켰는데...
“그 정도로 심각한 일이었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을 쉬게 하려고 그런 것 같습니다.”
듣고 있던 이한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혹시 학생들이 결국 참가했습니까?”
“아니. 가르시아 교수께서 쉬게 하시더군.”
이한은 감동했다.
유미디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휴식도 중요하지. 솔직히 에인로가드의 어린 치유 마법사들은 너무 과로에 시달리고 있어.”
“예. 휴식은 중요합니다.”
“???”
이한은 볼라디 교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걸 아는 사람이 이제까지 그렇게 굴었단 말인가?
“볼라디 배그렉까지 왔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자꾸나. 내가 온 건 네가 냉기 원소에 적성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란다.”
이한은 볼라디 교수를 다시 쳐다보았다.
볼라디 교수는 그 시선의 뜻을 이해했는지 작게 끄덕였다.
이한은 대체 상대가 무슨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건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적성까진 아니고...”
“냉기 불러낼 수 있으면 적성이란다. 희귀 원소는 적성 안 맞으면 불러내기도 힘들거든. 어쨌든 냉기 원소는 물 원소와도 관련이 깊고, 둘을 서로 같이 응용하는 것도 여러모로 배움이 되지. 그래서 2학기 때 쓸... 아. 이름 말하면 안 되는 거였지?”
볼라디 교수가 다시 끄덕였다.
이한은 교수의 멱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괜히 한 번 잡고 싶었다.
“그걸 잡은 다음에 이렇게 찾아온 거란다.”
“감사합니다.”
유미디후스의 제안에는 이한도 크게 불만이 없었다.
다른 교수들과 달리 유미디후스는 비교적 상식적으로 가르쳤으니까.
저택에 머무르면서 냉기 원소 마법에 대해 배움을 받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게다가 다른 교수들이 왔을 때 핑계도 되겠군.’
“그러면 출발할까?”
“아. 저택에서 배우는 게 아닙니까?”
“저택에서 배우기는 조금 애매하지. 나한테 신세를 진 마법사가 머무르는 탑이 있단다.”
“제자십니까?”
“제자는 아니고 나한테 몇 가지 가르침을 받긴 했지.”
‘그게 제자 아닌가?’
속으로 생각하던 이한은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볼라디 교수도 유미디후스의 제자 아니었던가.
“혹시 그 분이 배그렉 교수님 같은 분이십니까?”
“아니.”
“아. 그렇군요.”
이한은 안심했다.
유미디후스의 다음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더 무례한 놈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