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왜 그러십니까?”
알시클은 멀뚱멀뚱한 눈빛으로 유미디후스를 쳐다보았다.
“알시클 펭에린. 여기 있는 시약들이 무슨 시약들이지?”
“유미디후스 님...”
스승의 너무나도 어이없는 질문에, 알시클은 안타깝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이 시약이 어떤 시약인지 못 알아보시는 겁니까...?”
“......”
유미디후스는 자신을 안타까워하는 제자를 개패듯이 팰까 고민하다가 참았다.
“...못 알아봐서 물어본 게 아니다. 서리노루의 뿔, 빙한산, 만년한설, 설황단이잖느냐.”
“그러면 왜 물어보신 겁니까?”
“네 주머니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을 텐데 이걸 써도 되느냐는 거다. 너도 연구를 해야 할 텐데.”
냉기 원소 마법을 배울 때 가장 큰 문제점은 냉기 원소의 속성 그 자체였다.
생명은 기본적으로 열을 내뿜는 존재였고 냉기를 거부하는 존재였다.
아무리 주변 환경을 춥고 혹독하게 만들어도 살아있는 마법사가 냉기를 몸에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냉기 원소 마법사들은 시약을 사용해 냉기의 속성을 변환시키곤 했다.
냉기의 차가움은 갖고 있되 마법사의 몸을 상하게 하지 않는 냉기로.
물론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었고 비싼 시약들이 들어갔다.
비싸고 희귀한 시약일수록 더 성능이 좋았으니 알시클이 저렇게 비싼 시약들을 꺼내놓은 건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알시클의 전재산처럼 보여서 그렇지.
‘아차!’
알시클은 그제야 자기의 상황을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보는 모습이 한심해서 유미디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라도...”
“분명 펭에린 님에게는 이런 시약이 별로 필요하지 않아서일 겁니다.”
“......”
“......”
유미디후스와 알시클이 동시에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한은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뛰어난 마법사는 지팡이를 가리지 않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알시클이 하려는 건...”
“그렇죠? 펭에린 님?”
“물, 물론이지.”
이한의 질문에 알시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저런 시약은 그냥... 장식품 같은 거지. 저런 거 필요 없이 나가서 눈송이 하나 주워 와도 충분하다고 해야 하나...”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자. 진행해주시죠.”
“......”
유미디후스는 앞으로 이한을 알시클과 단둘이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알시클이 이한을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지금 보니 단둘이 두면 이한이 알시클을 그냥 잡아먹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 * *
휘이이이잉!
분명 밀폐된 마탑 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밖의 설산보다 더 차가운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이 차가운 눈보라가 이한의 몸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차갑되 차갑지 않은 눈.
마법만이 만들 수 있는 기현상이었다.
“원래 냉기 원소는 특정한 환경이 아니라면 쓰기 힘든 편이야.”
알시클은 뒤뚱거리며 천장을 가리켰다.
탑의 천장에 배치된 거대한 마법의 핵이 냉기를 흩뿌려대고 있었다.
냉기 원소는 원소들 중에서도 자연적으로 유지하기 힘든 만큼 특정 자연 환경이나 이런 마법 장치가 아니라면 사용이 불편한 게 현실이었다.
경지에 오른 마법사라면 저런 불편함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문제는 새로 배우는 마법사들.
알시클은 구석을 뒤적거리더니 지팡이 하나를 꺼내왔다. 그 표정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자. 이걸 봐. 보여?”
“이건...”
“그래. 프로스트아곤의 알이야.”
지팡이 끝에 박힌 곤충의 거대한 알은 푸른 냉기를 흩뿌리며 기묘하게 빛을 발했다.
이런 냉기 속성을 가진 지팡이는 새로 배우는 마법사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됐다.
“이게 얼마나 귀한 지팡이냐면, 이게 나왔던 북부에서 있었던 냉기 마법사들 경매 모임에서 세 명이 중상을 입고 일곱 명이 다쳤을 정도야.”
“...?”
듣고 있던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경매 모임에 왜 부상자가?
“이 지팡이를 너한테 빌려줄게. 워다나즈. 나보다 더 ㄷ... 나보다 못... 끙... 그러니까 너처럼 뛰어난 인재라면 잘 어울릴 거야.”
알시클은 차마 자기보다 재능이 높다고 말하지도, 낮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결국 돌려서 표현했다.
“감사합...”
“워다나즈. 네겐 서리거인의 왕이 준 돌이 있을 텐데.”
“......”
이한은 볼라디 교수를 밖에 내보내지 않은 자신을 욕했다.
‘젠장. 안일했군. 방심하면 안 됐는데.’
볼라디 교수는 자기 강의 아니라 남의 강의에서도 분위기를 깨는 재주가 있었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한 알시클은 눈을 끔벅거리며 물었다.
“서리거인의 왕이 준 돌이라니?”
“그게... 음...”
아무리 말재주가 뛰어난 이한이라 하더라도 지금 상황에서 적절한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친절한 볼라디 교수가 대신 대답해줬다.
“서리거인의 왕과 대결해서 받은 돌이 지팡이에 있다. 프로스트아곤의 알보다 낫지.”
“......”
이한은 알시클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알시클은 잠깐 고개를 돌리고 훌쩍이더니 다시 돌아왔다. 표정은 고고했지만 눈은 붉어진 뒤였다.
“그럼... 지팡이는 필요 없겠군.”
“그렇지.”
“...넌 좀 나가있으면 안 되나? 볼라디 배그렉?”
알시클은 잔뜩 심술이 난 목소리로 볼라디 교수에게 말했다.
그러나 볼라디 교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교육에 틀린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야 한다.”
“크윽...”
알시클은 볼라디 교수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에인로가드의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많은 볼라디 배그렉과 달리, 알시클은 가르친 경험이 없었으니까.
물론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양심이 없으시단 건 알았지만 정말 대단하시군!’
에인로가드에 대해 증언할 사람이 없다고 저렇게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다니.
“...냉기부터 불러와.”
“얼어붙어라.”
이한의 주문과 함께 지팡이 끝에 냉기의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기가 더욱 차가워지고 이한의 피부에도 소름이 돋았다.
“기초는 잡혀있네. 형태 변환부터 시작하자. 원뿔 형태.”
“냉기여, 원뿔로!”
“화살 형태.”
“냉기여, 화살로!”
“...방패 형태로.”
“냉기여, 방패로!”
“......”
알시클이 갑자기 말이 없어지자 이한은 자신이 실수라도 한 줄 알았다.
“...지금 냉기 마법을 처음 배우는 거지?”
“예? 아닙니다. 볼라디 교수님에게 배운 적 있습니다.”
“뭐야!”
알시클은 환해진 얼굴로 외쳤다.
“그러면 그렇다고 하지 그랬어! 깜짝 놀랐잖아!”
이한이 한 번에 익힌 줄 알고 경악했던 알시클이었다.
아니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졌다.
옆에서 보고 있던 볼라디 교수가 입을 열었다.
“저런 식의 다양한 형태 변환은 하지 않...”
“자. 다음 가르침은 뭡니까?”
“발사.”
알시클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에 떠있는 얼음 조각이 귀를 찢는 소리를 내며 빠르게 날아갔다.
캉!
“아마 이런 것 때문에 유미디후스 님이 냉기 원소 마법을 배우게 한 거겠지. 물은 발사에 적합한 원소가 아니거든.”
“하지만 운용으로 사용한다면 괜찮지 않습니까?”
이한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발사’와 ‘운용’은 비슷해보였지만 그 원리가 달랐다.
방금 알시클이 보여준 것은 정확한 궤도 계산을 끝낸 뒤 강력한 힘을 한 번 투입해 얼음 조각을 쏘아 보낸 것이었다.
그에 비해 이한이 자주 사용하는 물 구슬이나 쇠구슬은 마법사가 직접 타겟을 잡고 일일이 통제하는 방식이었다.
세심한 조종이 가능했지만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되려면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했다.
“뭐하러 그렇게까지 해? 그냥 다른 원소를 익혀서 발사 마법을 배우면 되는 일인데.”
“...긴급상황에서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서요?”
제자의 말에 볼라디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알시클은 이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 처할 일이 별로 없지 않나? 애초에 그런 상황에 안 빠지도록 행동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다 대비하려고 하면 모든 걸 대비해야 하잖아. 무엇보다 운용으로 쓸만한 위력을 내려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볼라디 교수를 쳐다보았다. 볼라디 교수는 왜 그러느냐는 듯이 의아해했다.
“전투에 쓰려면 전투에 맞는 속성을 익히는 게 낫지. 잠깐 쉬고 발사를 연습해보자고.”
“아. 전 괜찮습니다만.”
“아니. 지금은 괜찮아보여도 분명 마력 소모가 있을 거야.”
알시클은 마력 회복 물약의 코르크 마개를 뽑고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이한에게도 물약을 던졌다.
“마시고 마력을 회복시켜. 냉기 원소가 생각보다 마력 소모가 심하거든. 다른 원소처럼 생각하다가는 크게 다칠 수 있지. 후후. 이것까지는 몰랐지?”
알시클은 이한에게 가르칠 수 있어서 매우 신이 난 기색이었다.
“쓸ㄷ...”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볼라디 교수가 쓸데없는 말로 방의 온도를 더 낮추기 전에 이한은 말을 끊고 물약을 마셨다.
물론 아무 효과도 없었다.
* * *
발사는 수많은 원소 마법에서 사용되는 개념이었다.
화염 화살, 냉기 화살, 암석 화살 등 무언가 형태를 갖춰서 쏘아 보내려면 이 발사 속성을 익혀야 했다.
물론 이걸 익히는 건 간단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거리 감각, 방향 감각이 있어야 했고 어느 정도의 마력을 투입해야 적당한 힘을 얻을 수 있는지도 익혀야...
캉!
“맞습니까?”
이한이 쏘아 보낸 얼음 조각이 정확히 표적을 관통했다.
발사 속성이 쉬운 건 아니었지만 이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운용도 해낸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쉬울 수밖에 없었다.
알시클은 입을 뻐끔거렸다.
형태 변환은 이미 연습해왔다지만 발사 속성은 분명 아닐 텐데...
“평, 평범하군. 보통 정도인데.”
“그렇습니까?”
이한은 의아해했다.
딱히 실수한 게 없어보였는데 보통이라니.
“어떤 점을 고쳐야 하죠?”
“...물 원소와 냉기 원소는 꽤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했지?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거야.”
알시클은 한 번 꺼낸 말을 되돌릴 수 없어서 밀고 나갔다.
쩍!
지팡이를 휘두르자 벽에 꽂혀 있던 얼음 조각이 증발하면서 주변의 열을 강하게 흡수했다.
그러자 얼음 조각 주변으로 퍼져있던 냉기가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증발 속성까지 결합시켜서 폭발 얼음 화살 정도는 써줘야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거지.”
알시클은 말하면서 볼라디 배그렉의 눈치를 슬쩍 봤다.
자기가 말해도 너무 개소리였던 것이다.
이미 얼음 화살 발사 마법부터가 3서클이었는데 여기에 증발이란 속성까지 넣다니.
증발 속성의 난이도를 감안해보면 4서클 마법 중에서도 손꼽히는 난...
쩍!
이한이 마법을 시전하자 날아간 얼음 조각이 벽에 적중한 뒤 증발해 데미지를 입혔다.
한 번에 성공하자 이한은 매우 기뻐했다.
물 원소로 증발 속성을 익혔다지만 냉기 원소에도 이렇게 수월하게 응용이 될 줄이야.
“성공했습니다!”
“아... 아... 아직 조, 조금 모자른데?”
“그렇습니까?”
이한은 뭔가 좀 미심쩍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평균 이상 같은데...
‘냉기 원소 마법사들 기준이 너무 높지 않나?’
“교수님. 원래 냉기 원소 마법이 이렇게 엄ㄱ... 아, 아닙니다.”
“?”
볼라디 교수한테 물으려던 이한은 빠르게 포기했다.
물어봤자 별 의미가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뭘 고치면 됩니까?”
“과정 하나하나를 압축해서 한 번에 시전할 수 있어야지!”
알시클은 밝은 얼굴로 외쳤다.
제법 그럴듯한 조건을 떠올린 것이다.
확실히 능숙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마법의 과정을 하나하나 나눠서 시전하는 게 아니라 한 번에 시전할 수 있어야 했다.
“확실히 그건 좀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그렇지? 그렇지?! 그렇지??!”
알시클은 매우 기뻐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이렇게 기뻐하실 일인가?’
볼라디 교수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도와주겠다.”
“하하.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