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큰일났군.’
일이 안 풀리는 연구자에게 ‘요즘 연구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좀 볼까’라는 말만큼 공포스러운 말도 없었다.
실제로 알시클은 입에서 딱딱 소리를 낼 정도로 벌벌 떨고 있었다.
“알시클 펭에린. 정신 차려라. 검사관 앞에서 약점을 보일 셈이냐?”
“알... 알고 있습니다. 검, 검사관을 납치하면...”
“정신 차리라니까.”
“알, 알겠습니다.”
“네가 요즘 조금 헤맸지만 너는 뛰어난 연구자다. 잘 할 수 있을 거야. 네가 무엇을 시도하고 있는지만 정확히 말하렴.”
“예...”
유미디후스는 경험 많은 노마법사답게 검사관의 방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차분하게 알시클을 달래며 동굴 밖으로 향했다.
가이난도는 검사관을 보며 물었다.
“혹시 내가 악당을 구한...”
“악당 아닙니다!!”
검사관은 억울해했다.
물론 마법사들이 검사관 같은 사람을 꺼리는 건 잘 알았다.
-으아악 검사관이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이 마법이 완성되면 네놈한테 먼저 걸어버리겠어! 다시는 술을 마셔도 취하지 못할 거다!
-너 같은 놈이 마법에 대해 뭘 안다고! 위대한 마법은 원래 성 하나를 채울 정도의 금을 낭비해야 태어나는 법인데!
연구를 위해 투자받은 마법사들이 검사관을 좋아할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검사관 같은 이들도 제국에 꼭 필요한 이들이었다.
이런 감시의 눈이 없다면 누가 투자자를 보호해주겠는가.
“마법사들이 조금 꺼리는 것뿐입니다.”
“헉. 나도 마법산데.”
가이난도는 자기가 적을 구해줬나 싶었다. 검사관은 당황했지만 이미 가이난도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그만해. 가이난도. 저 분도 해야 할 일을 하시는 것뿐이다.”
“감, 감사합니다.”
검사관은 이한의 말에 감동했다.
저렇게라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한의 속마음은 달랐다.
‘큰일이군.’
생각해보니 안 그래도 연구가 막힌 알시클의 최고급 희귀 재료들을 이한이 막 사용하지 않았던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몰라도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매수까지는 불가능하더라도...’
이렇게 된 이상 검사관을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친해지면 이쪽에 조금 유리한 방식으로 봐주지 않겠는가!
“참. 황자 전하. 구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나가기 전에 검사관은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가이난도는 뿌듯한 얼굴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봐봐.”
“보긴 뭘 봐. 앞으로 말 안 하고 사라져서 친구들 걱정시키지 마라.”
“힝.”
가이난도는 투덜거리면서 이한의 뒤를 따라가다가 문득 떠올렸다.
‘잠깐. 생각해보니까 이한도 말없이 사라져서 걱정시키는 일 많았잖아!’
“이거 이한도 똑같았잖아!”
“그게 그거랑 같습니까?”
“헛소리 좀 하지 마.”
“......”
* * *
마탑으로 돌아온 알시클은 헛기침을 하며 검사관을 정식으로 맞이했다.
물론 눈빛은 검사관을 슬슬 피하고 있었다.
“알시클 펭에린 님. 저는 오늘 네 분의 대리인으로서 이 자리에 왔고, 이 편지는 네 분의 인장이 찍힌 편지입니다.”
“그... 그렇군.”
알시클은 편지를 입에 넣어서 삼켜버리고 싶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예. 혹시 폐가 되지 않는다면 지금 진행 중인 마법 연구에 대해...”
“잠깐! 저기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보이나?!”
알시클은 갑자기 이한을 가리켰다.
이한은 의아해했다.
‘압박감에 미쳐버리신 건가?’
“예? 보입니다만...”
“나는 이번에 저 소년을 가르칠 기회를 얻게 되었지. 그런데 저 소년이 정말 놀라워!”
“그렇습니까.”
수도에서 온 검사관은 아직 그랑덴 시의 소문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만큼 그냥 ‘워다나즈 가문이니까 역시 잘하나보다’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그 정도가 아니라니까. 나... 나보다 뛰어난 재능이야.”
“그렇습니까!?”
이 말에는 검사관도 좀 놀랐다.
그 펭에린 가문의 알시클이 저런 말을 할 줄이야.
실제로 알시클은 자존심이 상하고 분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한... 한 번 보라고...”
이한은 알시클이 뭘 하려는지 이해했다.
검사관을 피하고 싶어서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내 마음이 다 아프군.’
같은 마법사로서, 그리고 냉기 원소 마법을 배우느라 알시클 마탑 창고를 거덜낸 사람으로서 이한은 최선을 다해 도와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냉기여, 방패가 되어서 부유하라!”
이한은 부유하는 얼음 방패와 함께 안개까지 불러냈다.
“박무여, 퍼져라! 암흑이여, 여기에 모여라!”
“오... 오오오!”
검사관은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수많은 마법을 보고 확인한 만큼 지금 이한이 연속으로 마법을 시전하는 게 대단하다는 것 정도는 잘 알았다.
하물며 아직 어린 학생 아닌가!
“뼈여... 아니. 이건 아니고. 번쩍여라!”
이한은 갖고 있는 마법들을 살벌한 속도로 난사했다.
검사관은 연신 감탄했다.
“정말 대단...”
“뭘 얼마나 익힌 거야?!”
“알시클 펭에린 님?”
“아, 미, 미안.”
알시클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가 검사관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이한이 시선을 잘 끌어주긴 했는데, 너무 잘 끌어준 탓에 자신도 정신이 팔린 것이다.
‘대체 에인로가드는...?’
이쯤 되면 이한의 재능에 놀라워하는 게 아니라 에인로가드가 너무 가혹하게 가르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이래도 되나?
“에인로가드의 교육이... 아니... 어쨌든 대단하지 않나?”
“예. 대단합니다.”
“오늘 가르치느라...”
“알시클 펭에린 님. 그런데 전 연구를 보고 싶습니다만...”
“그, 그래야지. 오면서 혹시 주변 풍경은 잘 구경했나?”
“말에서 떨어져 발목이 부러진 탓에 구경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미... 미안. 내가 정령을 대기시켜놨어야 했는데. 손님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구해주셨으니.”
“그, 그렇지? 저기 황자 전하가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알아? 추종자들도 많고 제국 대귀족 가문들도 지지하고 있다고!”
“......”
이한과 요네르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정작 가이난도는 자기 이야기 하는지도 모르고 멀뚱멀뚱 서있었다.
“어? 잠깐. 내 이야기야?”
“...아닐걸...?”
검사관은 깜짝 놀랐다.
“그랬습니까? 하긴 보여주신 모습을 보면 명성이 없으실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그, 그래! 그렇지!”
“그런데 알시클 펭에린 님. 연구를 보고 싶...”
알시클은 울기 직전이 되었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거렸다.
보다 못한 이한이 헛기침을 했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다들 눈보라 치는 날에 돌아다니느라 몸이 상하셨을 텐데, 따뜻한 음료를 좀 내오겠습니다.”
“아. 전 괜찮습니다만.”
“검사관 님. 아닙니다. 강건하신 건 알지만 그렇게 구르셨는데 조금 쉬셔야 합니다. 게다가 다른 학생들도...”
이한은 눈짓했다.
그러자 요네르, 랫포드, 닐리아가 허겁지겁 기침을 했다.
“콜록콜록.”
“크헉! 크허헉!”
“손... 손 끝에 감각이...”
‘앞으로 닐리아는 시키지 말아야지.’
동상 연기를 너무 현실감 있게 해서 오히려 튀었다.
“보십시오. 여기 교수님도 지금 추위 때문에 창백해지셨잖습니까.”
“......”
유미디후스는 볼라디 배그렉 상대로 저딴 소리를 하는 이한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겁이 없는 건 알았지만...
놀라운 건 볼라디 배그렉도 가만히 서서 장단을 맞춰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알, 알겠습니다. 조금 쉬는 게 낫겠습니다.”
“예. 음료를 곧 내오겠습니다.”
* * *
시간을 번 이한은 유미디후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펭에린 님이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 겁니까?”
“알시클 펭에린은 극한의 냉기에 도전하고 있지.”
유미디후스는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쳤다. 그러자 마탑 바닥에 깔린 얼음 조각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의외로 냉기 원소 마법사들도 냉기 원소의 진정한 특징에 대해서는 잘 모를 때가 많다는 걸 아느냐?”
“그렇습니까?”
“그렇단다. 원래 모든 마법이 극한으로 파고들면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아직 극한의 냉기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 비슷한 언저리에 도달하면 특이한 현상을 볼 수 있다.”
마법사들의 기준에서 지금 밖에서 휘몰아치는 살을 에는 눈보라도 평범한 냉기에 속했다.
저 정도 눈보라는 따뜻한 봄바람처럼 느껴질 정도의 냉기로 내려가면 이제 특이한 현상들을 볼 수 있었다.
마력이 어떠한 소모나 손실도 없이 자유롭게 이동하거나, 물질이 점성을 잃어버리고 특이한 형태로 변화하거나...
“혹은 시간이 정지하거나... 별로 놀라지 않는구나?”
“아. 놀라워하며 듣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한은 저런 것들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언제나 극한으로 가면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는 세계가 펼쳐지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마법이라면 더더욱.
“물론 이런 걸 도전하려면 아무래도 마법사 혼자만의 힘으로는 무리라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시도하고 있긴 한데...”
유미디후스가 그렇게 말하자 알시클의 시약을 뺏어 쓴 이한은 상당히 미안해졌다.
아마 그 시약이 이런저런 방법에 들어갈 테니까.
“그래도 꾸준히 연구하셨다면 검사관도 뭐라고 하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기록도 있을 테고...”
“알시클 성격에 귀찮아서 연구일지를 그렇게 세세히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
이한은 볼라디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혹시 펭에린 님에게 해줄 만한 조언이 있습니까?”
“흠.”
볼라디 교수는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주할 때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게 좋다.”
“......”
이한은 대체 무슨 경험으로 저런 조언을 하는 거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그런 거 말고 말입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가장 좋은 방법 같군.”
볼라디 교수는 눈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시선을 돌린 이한은 경악했다.
알시클이 주변을 둘러보며 주섬주섬 짐을 싸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뭐하시는 겁니까?!”
“으, 으응?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그, 그냥 갑자기 좀 모아보고 싶어서...”
“아무리 그래도 도주는 안 됩니다!”
“도, 도주라니. 무슨 소리야. 도주하려는 거 아니라니까.”
그러나 알시클의 눈동자는 양옆으로 왔다갔다 정신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이한은 알시클을 설득했다.
“검사관은 어차피 마법에 대해 잘 모르지 않습니까. 펭에린 님이 성실히 연구했고 다른 낭비를 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게 나을 겁니다.”
“정어리를 좀 많이 사긴 했는데...”
이한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일지 적으신 거 있습니까? 자료는?”
“저기.”
“...쓰레기장이 아니었습니까?”
이한의 말에 알시클은 살짝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검사관은 가이난도가 상대하고 있을 테니 최대한 빨리 찾아내봅시다.”
이한은 쓰레기장, 아니, 일지와 자료가 쌓인 창고를 빠르게 분류하기 시작했다.
먼지 털고 종이에 적힌 날짜별로 나누고 빠르게 정리하는 모습에 알시클은 감동 받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에인로가드 안 보내고 제 밑에서 제자로 삼으면 안 됩니까?”
알시클의 질문에 유미디후스는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다가는 에인로가드 교수들이 알시클의 마탑을 습격할지도 몰랐으니까.
“해보고 싶으면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닙니다. 친구들하고 같이 에인로가드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지내고 싶겠죠. 저는 그런 게 필요 없었지만 말이죠.”
알시클은 이한을 배려해주기로 했다.
물론 알시클은 친구 같은 게 필요 없어서 혼자서 마법을 익혔지만 귀족들 중에는 친구들과 같이 우정을 갈고 닦는 걸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 이한도 그런 경우리라.
“행복하고 즐겁게?”
“예?”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