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사실 교수님께서는 흑마법 모임에 참가하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세상 모든 교수들이 볼라디 교수 같지는 않았다.
교수들 중에는 학생들과 (눈치 없이) 어울리고 싶어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다.
특히 흑마법처럼 인기 없는 학파라면 더더욱 그랬다.
에인로가드의 다른 교수들과 친하게 지내기도 힘들 테니 외로움은 더욱 심하리라.
“뭐?”
그러나 디레트는 이한의 말에 깜짝 놀란 반응을 했다.
“그건 아니야. 그러실 분이 아니거든.”
“그렇습니까?”
“나도 몇 번 권한 적 있는데 괜찮다고 거절하셨거든.”
“으음.”
이한은 침음성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디레트는 뛰어난 흑마법사였고 훌륭한 선배였지만 이한처럼 교활한 제자는 아니었다.
특히 교수쯤 되면 입으로는 A라고 말해도 다른 전신으로는 B라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이 교수들의 언어를 이해할 줄 알아야 교활한 제자가 될 수 있었다.
“혹시 어떻게 거절하셨습니까?”
“으응? 내가 거기 참가해서 뭐하냐고, 학생들끼리 모이는데 방해될 거라고 하셨지.”
“과연.”
이한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형적인 가짜 말이었다.
“혹시 그 뒤에 마법 연구에 도움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라고 덧붙이셨습니까?”
“...!”
디레트는 눈을 크게 떴다.
“예지 마법?!”
“예지 마법이 아니라 예측일 뿐입니다. 선배. 괜찮으시다면 지금 모르툼 교수님의 공방에 방문해서 초대해드리고 싶은데요.”
“나야 상관없지만... 괜찮겠어? 교수님께서 자꾸 거절하신 일 쓸데없이 갖고 온다고 화내실 수도 있는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같이 갈래?”
“아닙니다.”
이한은 디레트를 말렸다.
디레트처럼 모르툼 교수 밑에서 오래 일한 제자가 옆에 있다면 쑥스러워서 고집을 부릴 수도 있었다.
“저 혼자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그, 그래. 조심해서 갔다 오고. ...잠깐만! 야! 후배! 교수님들이 길거리에서 싸웠다는 건 대체 뭐였는데!?”
뒤늦게 떠올린 디레트가 외쳤지만 이미 이한은 거리 저쪽으로 사라진 뒤였다.
* * *
에인로가드의 교수쯤 되면 경지에 오른 마법사들인 만큼 그랑덴 시에 저택이나 공방을 하나씩 두고 있었다.
그리고 모르툼 교수의 공방은 중앙 귀족 구역에 위치해있었다.
...구역 안의 묘지 옆에.
‘과연 괜찮은가?’
물론 도시 외곽의 이름 없는 공동묘지보다는 훨씬 더 품격 있는 공간이었다.
귀족 가문의 묘지인 만큼 잘 조각된 대리석 묘비들과 아름답게 묶인 꽃들이 산뜻하게 곳곳에 놓여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방으로 사용되는 묘지기의 탑은 어딘가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이쯤 되면 묘지가 문제가 아니라 흑마법이 문제 같았다.
“모르툼 교수님 계십니까?”
“콜록. 분명히 말했을 텐데. 다음 주까지 완성할 거라고. 한 번만 더 재촉하면 네놈의 장기를 뒤섞어버릴... 워다나즈 군인가?”
살벌하게 말하며 문을 열었던 모르툼 교수는 의외의 제자를 발견하자 놀라워했다.
“놀랍군!”
“다른 약속이 있으십니까?”
“콜록. 그것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널 잡으러 간 교수들이 많아서 지금쯤 몇 조각으로 쪼개졌을 줄 알았지.”
“......”
이한은 순간 교수에게 저주 마법을 날릴 뻔했다.
알면 말렸어야지!
‘침착하자. 모르툼 교수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이한 입장에서는 찾아와서 끌고 가려는 교수보다 모르툼 교수처럼 자기 할 일 하고 가끔씩 초대해주길 바라는 교수가 더 나았다.
둘 다 철 덜 든 아이 같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후자가 좀 더...
“방금 말은 누구한테?”
“아. 콜록. 의뢰를 하나 맡았는데 자꾸 귀찮게 재촉을 해서 말이야.”
가문의 귀족 하나가 죽었는데 그 귀족이 숨긴 유산을 찾고 싶어서 모르툼 교수에게 찾아온 모양이었다.
예지 마법사 몇몇한테 맡겼지만 단서가 부족해서 실패한 상황.
흑마법으로 죽은 자가 가진 기억의 파편이라도 건져봐야 했다.
“그런 의뢰도 가능하군요!”
이한은 마법사의 일자리는 참으로 넓다는 걸 새삼 느꼈다.
어쩌면 나중에 스켈레톤들을 조종해서 운송 길드의 일거리를 싹쓸이하거나 길거리 공연을 시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보였다.
“좋은 의뢰는 아니지. 콜록. 하지만 흑마법사는 이런 의뢰를 받아두는 게 좋다.”
“귀족 가문들과의 연줄 때문입니까?”
“아니. 콜록. 이런 비싼 의뢰는 잘 안 오거든.”
“......”
“그래서... 무슨 일이냐? 다른 교수들이 쫓아오는 걸 막아달라는 거면 무리다. 내가 막을 숫자가 아니야.”
‘그건 압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리고 교수님들께서 절 찾아와주시는 건 영광일 뿐입니다. 제가 부탁드려도 모자랄 판에 부족한 제자한테 직접 와주시다니요.”
“콜록. 넌 참 흑마법사치고는 성격이 좋다. 나였다면 독을 다 풀어버렸을 텐데. 학생의 방학에...”
이한은 순간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늘 온 건 교수님께서 모임에 참가해주셨으면 해서입니다.”
“...무슨 모임?”
모르툼 교수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한은 상대가 오늘이 흑마법 학파 학생들의 모임 날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흑마법을 배우는 선배들이 모여서 후배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모임 말입니다.”
“아. 아...! 콜록. 그거 말이지?”
“예.”
“난 됐다.”
모르툼 교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콜록. 마법 연구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와서 물어봐도 되지만... 뭐... 잘 물어보지도 않더군.”
모르툼 교수의 눈에 서운함이 일순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이한은 단호하게 말했다.
“교수님!”
“...왜,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거냐?”
“선배들은 교수님께 언제나 질문을 하고 싶어하십니다. 하지만 교수님이 언제나 격무와 과로에 시달리시는 걸 알고 있어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교수님께서 아무리 괜찮다고 하시더라도, 모임에 직접 참가해주지 않으신다면 선배들로서는 묻지 못하실 겁니다.”
“무슨 그런 겁쟁이 같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해해주십시오.”
말은 퉁명스럽게 해도 모르툼 교수의 얼굴은 살짝 풀려 있었다.
“저도 그렇고 가이난도나 라파드엘 모두 교수님이 흑마법사로서 쌓아 오신 황금 같은 연륜을 언제나 궁금해 했습니다. 학기 도중에는 강의로 바빠 들을 수 없었지만 방학 때 모임에는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해서 갔는데 교수님이 계시지 않아 모두 실망했습니다.”
“그... 그렇단 말이냐?”
“예. 저희가 실망하자 선배님들께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자, 선배님들도 ‘우리도 모시고 싶은데 죄송해서 그럴 수 없다’고 하신 겁니다.”
“그런...!”
모르툼 교수는 탄식을 내뱉었다.
제자들이 겁이 많은 건 알았지만 이렇게 겁이 많을 줄이야.
그렇게까지 겁을 낼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제가 용기를 내서 찾아온 겁니다. 1학년이니 조금 너그럽게 봐주시지 않을까 싶어서.”
“콜록. 당연히 그래야지. 1학년의 실수에 화내는 마법사가 어디 있겠느냐.”
이한은 해골 교장이 바로 떠올랐지만 가만히 있었다.
“...좋다. 콜록.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구나. 안 그래도 적은 신입생들이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
“맞습니다. 교수님께서 모임에 참가하신다면 신입생들이 다른 학파로 빠지겠습니까.”
모르툼 교수는 지팡이를 챙기고 일어섰다.
그리고 이한의 등을 두드리고 걸어갔다.
“콜록. 워다나즈 군. 난 참 좋은 제자를 뒀군.”
“아닙니다. 교수님. 부끄러울 뿐입니다.”
이한은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의 미소를 속으로 삼켰다.
‘다른 교수들도 이렇게 쉬우면 좋을 텐데.’
다들 모르툼 교수처럼 기분 좋아진다면 얼마나 편하겠는가.
왜 기분 좋아지면 ‘기분 좋아졌으니까 네게 마법을 더 가르쳐주마’하는 교수들밖에 없는지...
* * *
“세, 세상에. 모르툼 교수님이 저렇게 기분 좋아하시는 건 처음 봅니다.”
“독 먹인 거 아닌가?”
“아니. 저주야. 웃음 저주에 도취감 저주, 또 뭘 섞어야 저렇게 좋아하시지?”
몇몇 선배들은 평소에 인상 찌푸리고 기침하고 불만 많은 모르툼 교수가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에 경악했다.
물론 디레트도 마찬가지였다.
“대, 대체...”
“선배. 교수님은 그저 모임에 참가하고 싶으셨던 겁니다.”
“...!”
디레트는 전율에 찬 시선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1학년 후배가 갑자기 든든한 동료처럼 느껴졌다.
이 후배라면 미친 교수를 상대할 때 등 뒤를 맡겨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미쳤나? 무슨 1학년한테...’
“콜록. 도적들이 요새 안에서 완강하게 버티더군. 그래서 붙잡은 도적들을 언데드로 바꿔서 돌격시켰지. 그 와중에 붙잡은 도적들을 또 언데드로 바꿔서 돌격시키고. 또... 그러다보니 놈들이 항복하더군.”
“실로 교훈적인 이야기입니다!”
“저도 한 번 해보고 싶네요!”
이한이 바람을 잡을 필요도 없이 흑마법 학파 학생들은 모르툼 교수의 일장연설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덕분에 모르툼 교수는 대만족해서 말을 끝내고 휴식 시간을 취했다.
“그래서... 황자 전하시라고?”
“네!”
그 사이 선배들의 관심은 이한을 제외한 다른 후배들에게 향했다.
“황족께서 흑마법에 관심 가지면 욕먹는 거 아닌가?”
“어? 그래요?”
“......”
이한은 슬쩍 끼어들었다.
“저번에 바실리스크 나왔을 때 귀족들 앞에서 흑마법 쓴 것도 말씀드려.”
“그건 이한 네가 도중에 멈ㅊ...”
이한은 가이난도의 손등을 꼬집었다. 가이난도는 바로 이해했다.
“바실리스크가 나왔을 때 흑마법으로 귀족들을 지켰습니다!”
“!”
“오...”
선배들은 가이난도의 말에 놀랐다.
귀족들 앞에서 별다른 계산 없이 흑마법을 꺼낼 줄이야.
“마법에 귀천은 없다, 스스로가 당당하다면 세간의 시선은 뭐 그리 중요하겠나, 이런 생각이지?”
“귀천? 세간?”
이한은 다시 가이난도를 꼬집었다. 가이난도는 다시 이해했다.
“응!”
“이번 1학년 후배들은 정말 놀랍네.”
선배들은 놀라워하며 수군거렸다.
그러나 시선은 매우 호의적으로 변해 있었다.
흑마법에 진심이 아니라면 저런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흰 호랑이 탑 후배... 넌 왜 듣는 거지? 흰 호랑이 탑도 흑마법에서는 상당히 드문 탑인데.”
“설마 흑마법 파훼법이라도 익히려고 듣는 건 아니겠지?”
“......”
라파드엘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저, 그게, 그것이...”
“라파드엘이 기사 가문 출신이라 그런 오해를 받고 있지만 사실 라파드엘만큼 흑마법에 진심인 놈도 없습니다.”
“그래?”
“예. 매번 저희가 언데드 계(界)를 탐험할 때마다 가장 앞장서서 움직였으니까요.”
“그건 그냥... 변태 아니냐?”
선배들은 좀 다른 의미로 놀라서 라파드엘을 쳐다보았다.
언데드 계가 뭐 좋다고?
“그냥 언데드들을 좋아해서 솔선수범한 걸 겁니다.”
‘그게 변태잖아?’
라파드엘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그걸 다른 뜻으로 이해했는지 선배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그래. 다들 특이하지만 흑마법에는 진심이구나.”
“너희 같은 후배들이 들어와서 기쁘다. ...물론 한 명 취향은 좀 이상하긴 한데 존중해주마.”
“이미르그는 안 물어봐요?”
“쟤는 검은 거북이 탑이잖아.”
“맞아.”
“......”
가이난도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뻐끔거렸다.
뭐 이런 치사한 선배들이...?
선배들의 질문 공세가 끝나자 이한이 라파드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라파드엘은 잠시 이한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감사하다고 해두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워다나즈가 라파드엘을 감싸준 건 사실이었다.
아니었다면 아까 상황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 감사는 됐고 은화로 갚아라.”
“...아니 미친놈아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