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이런 뻔뻔한 놈. 위기에서 벗어나니 못 내겠다는 거냐?”
이한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라파드엘을 쳐다보았다.
“세상에 저런 양심없는 놈이... 너 기사 맞아?”
가이난도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라파드엘을 쳐다보았다. 라파드엘은 폭발해서 외쳤다.
“누가 안 갚는다고 했냐! 갚는다! 갚는다고!”
“저렇게 강하게 부정하니까 오히려 더 이상한데.”
“닥쳐!”
라파드엘은 가이난도한테 쏘아붙이고 홱 돌아섰다.
“역시 흰 호랑이 탑 놈들은 성질머리가...”
“걔네는 수틀리면 선배도 패더라.”
흑마법 학파 선배들의 수군거림에 이한은 멈칫했다.
예전에 유미디후스와 같이 산맥 뒤쪽에 물 원소 마법 배우러 갔을 때 3학년 선배들을 기습해 물건을 뺏었던 게 떠오른 것이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습니다.”
“같은 친구라고 감싸주는 거야? 착하네.”
“그런데 워다나즈 너는 어떻게 푸른 용의 탑 학생이 흰 호랑이 탑하고 친하게 지내는 거지?”
이한은 가식적인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다 같이 마법을 배우기 위해 들어온 처지인데 다른 탑이라고 서로 싸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얘 에인로가드 학생 맞냐?”
“이상한데? 혹시 올해부터 규칙 바뀌었어?”
이한은 교과서적인 정답을 내놓았지만 선배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선배들은 에인로가드 생활로 인해 이미 단단히 비뚤어져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다. 다들 비뚤어지셨군.’
매우 정상인 자신과 달리 비뚤어진 선배들을 이한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 * *
모르툼 교수의 일장연설(흑마법사라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인생사로 시작해, 수많은 흑마법사들의 눈물이 묻혀 있는 묏부리 요새의 비극으로 끝났다)이 끝나자 흑마법 학파 학생들은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흐뢰칼을 소환해보려고 노력 중인데 어렵더라고. 아무래도 물속에 사는 언데드라.”
“수중 언데드는 더 어렵지. 독이 강해서 방어도 힘들고. 미끼로는 뭘 쓰고 있어?”
“썩은 고기를 던져주고 있는데 이 자식이 받아먹기만 하고 절대 나하고 계약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야. 아. 다른 언데드 계를 찾아야 하나...”
“디레트 선배. 선배는 5학년 가실 겁니까?”
“고민 중이야. 아무래도 지금 연구를 계속하려면 에인로가드가 좋을 거 같아서.”
디레트는 대답해주고 이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후배. 교수님들이 길거리에서 싸웠다는 게 대체...”
“디레트 선배! 고민이 있습니다. 다음 학년 때도 에인로가드에 있어야 할까요?”
“...나중에 따로 상담할까?”
“원래 제 목표는 마을 주변의 묘지기를 이어받는 거였거든요. 그런데 지금 수준으로도 충분히 이어받을 수 있을 것 같고, 부모님께서는 와서 자리 잡길 원하시는 것 같은데... 거기서도 연구는 할 수 있긴 하지만... 아. 어렵네요. 정말.”
디레트는 아쉬움을 삼키며 진로 고민을 하는 후배를 달랬다.
“네가 지금 하려는 마법연구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선배. 이번에 좀 수상한 제안을 받았거든요. 저주 마법에 뛰어난 흑마법사를 찾는데 어디에 저주를 걸지는 말을 안 해주더라구요. 이 제안 받는 게 좋을까요?”
“안 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제안은 받는 게 아니야. 특히 흑마법사는 더욱...”
“선배. 지금 제가 새 지팡이를 사느라 은화가 급한데 랑옌의 모험가들이 흑마법사를 구하더라고요. 여기 참가해도 괜찮을까요?”
‘흥미롭군.’
이한은 선배들이 나누는 대화를 귀 기울여 들었다.
옆에서 가이난도는 이미르그와 마법사 카드를 하다가 정신없이 두들겨 맞고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이... 이거 속임수 쓴 거 아니야!? 속임수 썼지?!”
“내, 내가 속임수 썼으면 넌 이것보다 더 형편없이 졌어...”
“이한! 이한! 심판 좀 봐줘! 이거 속임수 아니야?”
“아니야. 네가 못해서 진 거야.”
“보지도 않았잖아!”
이한은 가이난도의 말은 귓등으로 흘리고 깃펜을 놀렸다.
열심히 적는 이한의 모습에 모르툼 교수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콜록. 워다나즈 군. 네가 방학에 의뢰를 받을 것도 아니고 그런 건 왜 적지?”
“받을 겁니다만?”
“......”
모르툼 교수는 이한을 ‘참 괴상망측한 녀석이야’하는 시선으로 보았다.
“교장 선생님이 널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콜록. 닮았군그래.”
“아니 말씀이 너무...!”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격분해서 외쳤다.
감정 조절에 능한 이한도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다.
“너무?”
“...과분하십니다!”
“그런가? 콜록.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긴, 그걸 감안해도 고나달테스 님은 워낙 대마법사긴 하시지.”
모르툼 교수는 해골 교장의 괴팍한 성격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같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지.’
눈이 있다면, 아니 눈이 없어도 알 수밖에 없는 성격이었다.
“콜록. 방학에 일하는 걸 좋아한다면... 곧 있으면 중첩 현상이 일어날 텐데 거기 같이 참가하는 건 어떻지?”
“교수님?!”
이한보다 흑마법 학파 선배들이 더 깜짝 놀랐다.
“교수님! 1학년이에요!”
“서리거인의 왕을 상대하고 살아나온 1학년이면... 콜록. 참가해도 상관없지.”
“서리거인의 왕이라니요?”
“그걸 1학년이 왜 상대... 어떻게 상대... 에인로가드가 미쳤...? 아니 원래 미치긴 했는데...”
웅성거리는 후배들의 모습에 디레트는 창피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날개로 가렸다.
학교로 돌아가면 코홀티와 쿠만다스를 묘지에 거꾸로 묻어버려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중첩이 혹시 계가 겹치는 현상을 말하는 겁니까?”
“맞아. 이야. 너 진짜 대단하다.”
선배 중 한 명이 감탄하며 설명에 나섰다.
원래 마법사들이 다른 계(界)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복잡한 마법들이 필요했다.
소환 마법을 가르치는 밀레이 교수가 설치한 마법진들은 간단해보여도 고도의 지혜가 담긴 마법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방문하고 나서도 제약은 상당했다. 애초에 자신이 속한 세계가 아닌 세계를 강제로 방문하는 셈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수단이나 제약이 없어지는 순간이 존재했다.
상대 차원이 이쪽 차원과 중첩되어서 섞일 때.
이한도 짚이는 게 있었다.
‘서리거인의 왕 때처럼 변하는 건가.’
그 때 에인로가드 상층 복도는 학교면서 학교가 아닌 다른 곳이었다.
서리거인들의 차원이 중첩되어 있어서 칼날 같은 추위가 주변까지 퍼져나갔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언데드 계에도 일어날 수 있었다.
“최근에 언데드 계가 곧 중첩될 장소를 하나 찾았거든. 마력이 아주 고여 있더라고.”
“고여 있으면 풀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한은 저번에 묘지기 의뢰를 수행하면서 경험했던 걸 떠올리며 물었다.
마력이 고여 있다는 건 그만큼 이상현상이 벌어지기 쉽다는 것.
“원칙적으로는 그런데 저 정도까지 쌓였으면 그냥 풀기는 아쉽지. 저것도 기회거든.”
“......”
이한은 수상쩍다는 듯이 선배들을 쳐다보았다.
선배들은 그 시선의 뜻을 깨닫고 급히 설명했다.
“다 제국에 허가받고 하는 거야!”
“아. 그렇다면야...”
모르툼 교수가 콜록이며 설명을 이어받았다.
“흑마법사들에게 이렇게 언데드 계가 중첩되는 기회는 아주 좋은 기회다.”
“강력한 소환수와 계약할 기회입니까?”
“응?”
자리에 모인 흑마법사들은 이한의 말에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하하하. 강력한 소환수는 그렇게 무작정 들어가서 계약하는 게 아니라 사전조사가 필요해.”
하급 소환수라면 무작정 들어가서 주변을 훑어도 됐지만, 이름 있는 강력한 언데드는 우악스러운 방식으로는 힘들었다.
먼저 그 언데드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어떻게 접촉할 수 있는지, 어떤 식으로 계약이 가능한지를 면밀히 조사해야 했다.
‘페르쿤트라는 그렇게 강력한 존재가 아닌가?’
“계약보다는 다른 게 더 중요하지.”
“어떤...?”
“모든 것.”
모르툼 교수가 주스로 목을 축이더니 말했다.
“흙, 흙 위에 박힌 뼈, 그 뼈에서 자라고 있는 버섯, 그 버섯을 먹는 벌레, 그 벌레들이 자라는 나무... 언데드 계의 모든 것들이 다 좋은 소재고 시약이다. 콜록. 원래라면 여러 제약이 많아서 채집하기 쉽지 않지만 중첩 때는 이야기가 다르지.”
“물론 아무거나 다 캐내와도 되는 건 아니야. 보는 눈이 필요하지.”
“정말 운이 좋으면 단 한 개만으로 1년은 놀 수 있을 걸.”
“!”
이한은 갑자기 흥미로워지는 주제에 눈을 빛냈다.
“그 정도입니까?”
“응. 나오는 것들 중 상당수가 흑마법사들만 쓰는 시약이지만, 가끔 다른 마법사들이 쓰는 시약이나 귀족들이 탐내는 소재도 있거든. 그런 건 가격이 확 뛰지. 여기 디레트 선배가 전설이야. 2학년 때 불하초(不夏草)를 찾으셨는데...”
이한은 평소보다 몇 배는 강한 존경심을 담아 디레트를 쳐다보았다.
물론 디레트는 기쁘기보다는 어이없었다.
‘이거 때문에 저렇게 쳐다본다고?’
“...어쨌든 이게 좋아보여도 중첩된 언데드 계에 들어가는 거라 꽤 위험하거든. 아무래도 언데드를 상대할 줄 아는 흑마법사가 아니라면 힘들지. 1학년은 원래 좀 그렇긴 한데...”
“교수님께서도 말씀해주셨듯이, 기회를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이한의 말에 선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모르툼 교수가 보장했는데 말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진짜 괜찮으려나...?”
“그런데 서리거인의 왕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저번에 그 눈보라 쳤던 그거지?”
“코홀티 선배가 욕 배부르게 먹고 해결하신 줄 알았는데.”
듣고 있던 이한은 문득 의아해져서 물었다.
“그런데 선배님들. 혹시 그... 바실리스크나, 도인 가문의 마법사나 구울... 하여간 뭐 이런 것들에 대해 들어보신 적 없으십니까?”
“어? 난 3일 전에 들어와서.”
“난 시내 잘 안 돌아다니는데.”
“숙소에서 책만 읽었는데 무슨 일 있었어?”
이한은 감동했다.
흑마법사들만큼 소박하고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이들도 드물리라!
* * *
“...정말 평소에 이런 말은 하지 않아요.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요.”
요아넨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너무 많지 않나요?”
“예? 그렇습니까?”
옆에서 유백색 금속을 조심스럽게 초록 불꽃으로 녹여서 추출하고 있던 이한은 놀라서 되물었다.
“오히려 교수님들이 안 오셔서 최근 몇 주는 여유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 그래요. 추출이나 계속하죠.”
사람은 자기보다 더 미친 사람을 만나면 상대적으로 정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원래 조수가 말을 하면 ‘일에 좀 집중합시다’하는 요아넨이었지만...
‘솔직히 궁금해...!’
지금 이한에게 직접 들은 것들만 해도 마법 공부는 물론이고 푸요의 지팡이 공방 일과 언데드 계 방문 등이 예정에 잡혀 있었고, 소문으로 들은 것까지 합치면 한낮의 교수 난투극부터 구울의 왕 토벌까지 있었다.
원래 일을 할 때는 일체의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요아넨이었지만, 이번 경우는 없던 호기심도 샘솟게 만들었다.
“이 정도까지만 할까요? 공방의 연금술사들도 불러서 같이 식사를...”
“아. 성분에 불순물이 있습니다. 다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을지도?”
요네르가 봤다면 기절했을 정도로 놀라운 소리였지만 이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식사 하고 나서 해도 되지 않...”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추출에 낭비가 생길 겁니다.”
요아넨은 저 모든 걸 철저하게 가르친 과거의 자신을 잠시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뒤로 걸어가서 하인을 불렀다.
“저기?”
“예. 요아넨 님.”
“요네르 불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