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화
연락을 받은 요네르가 공방에 도착했을 때, 이한은 아직도 얼굴을 찌푸리고서 플라스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도 아니야.”
“이한. 점심 먹고 하자.”
“안 돼. 불순물이 아직 남아있어.”
“그 정도는 남아도 괜찮으니까 그냥 줘.”
“끓을 만큼 끓어야지 완성되는 거지, 그냥 완성되는 게 아니야.”
“일 시킨 사람이 괜찮다는데 무슨...!”
요네르는 기가 막혔지만 이한은 물러서지 않고 플라스크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요네르는 옆에 앉아 이한이 하는 꼴을 쳐다보기로 했다.
이한은 플라스크를 흔들어보고, 이리저리 돌려보고, 살짝 불에 노출시키기도 하는 등 고집스러운 모습으로 집중해나갔다.
그걸 보자 요네르는 언니인 요아넨이 저번에 이한의 일처리를 평가했던 게 떠올랐다.
참 깔끔하게 잘 해냈다고 야단을 떨면서, 전에 있던 조수들보다 몇 배는 낫다고 신나하던 모습.
요즘 연금술사들은 워낙 성격이 급하고 끈기가 없어서 같은 추출이라 하더라도 그 결과가 아쉽게 나오는 일이 많다고 요아넨은 말했었다.
불을 너무 세게 쓰면 미처 덜 녹은 앙금이 액체를 혼탁하게 하고 불을 너무 약하게 쓰면 도중에 성질이 변질되는데, 이렇게 딱 알맞게 일처리를 하는 연금술사는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걸 떠올리자 요네르는 마음이 조금 풀려서 이한에 대한 스스로의 태도를 뉘우치...
...진 않고 그냥 일어나서 강제로 이한을 끌어냈다.
요네르는 언니와 이한처럼 미친 완벽주의자들의 장단에 놀아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작작해 좀. 식사하고 해.”
“안 돼! 요네르! 한 번만! 한 번만 더 하면...!”
“여기 메이킨 가문 공방이거든. 워다나즈 가문 공방 아니거든.”
요네르는 화덕 옆에 꽂혀 있는 공방 열쇠를 빼서 주머니에 넣은 다음 이한의 등을 밀어버렸다.
* * *
“그런데 워다나즈 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요아넨뿐만 아니라 공방의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던 연금술사들도 이한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알아서 궁금한 질문들을 던져주는 부하들의 모습에 요아넨은 속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누구 부하 아니랄까봐 일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아.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지금 도브룩의 취옥몽 물약에 필요한 원료들을 준비중인데, 묵령은을 녹여서 용액화하는 과정에서 막혔습니다. 아무래도 불순물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아.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취옥몽 물약이 상당히 까다로운 놈이지요. 용액의 색이 은을 녹였는데도 탁한 진흙색이죠? 마법사의 마력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화염을 바꿔줘야 합니다. 공방에 옥화토가 있는데 그걸 뿌려가면서 불의 성질을 바꿔보십시오.”
“감사합니다. 아. 그런데 진흙색이 아니라 은색인데요.”
이한의 말에 연금술사는 당황했다.
“예? 그러면 잘 녹은 건데요?”
“알갱이가 몇 개 남아있던데...”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괜히 타협했다가 물약에 문제라도 생기면 고치기도 힘듭니다.”
“......”
“......”
공방 연금술사들은 요아넨을 빤히 쳐다보았다.
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지금 메이킨 님께서 젊은 마법사를 한 명 망친 거 아닙니까’하는 은근한 책망의 눈빛이었다.
물론 요아넨은 저런 눈빛에 흔들리지 않았다.
저런 눈빛에 흔들릴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공방을 광기와 집념으로 운영할 수 없었다.
‘난 분명히 완성도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적당히 해도 된다고 가르쳤는데 워다나즈가 성격이 너무 완벽주의적이라 그런 거지.’
요네르가 들었다면 뒷목 잡았을 생각을 하며 요아넨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교수님들께서 길거리에서...”
“참. 메이킨 님. 아까 시험 용액을 만들 때 하신 마법에 대해서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용액 회전 마법과 비슷하지만 다른 마법 같았는데.”
“아까 쓴 마법은 용액 회전 마법이 아니라 위아래로 역전시키는 마법인데...”
설명하던 요아넨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화제가 또 멀리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돌아가기도 전에 이한은 다른 연금술사를 붙잡고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꿀꺽. 이것 말입니다.”
“아니, 그렇게 말하시면서 어떻게 음식은 다 드시고 계시는 겁니까? 네. 뭐가 궁금하신 거죠?”
이한이 세 번쯤 질문을 더 하고 나자 테이블 위의 그릇은 모두 비워지고 점심 식사 시간이 끝났다.
연금술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오늘은 산책하지 말고 바로 시작하자고.”
“가시죠. 메이킨 님. 오전에 끝내지 못한 작업을 마쳐야 합니다.”
요아넨은 살짝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뒤따라 걸어갔다.
* * *
일이 밀리자 요아넨은 질문은 미뤄두고 평소처럼 일에 집중했다.
미친 사람처럼 집요하게 다시 일을 시키는 요아넨의 모습에 요네르는 겁에 질렸다.
에인로가드에서도 그랬지만 요네르의 친구는 법 없이도 살 사람 아닌가.
요네르는 친구가 바로 멱살 잡고 물 구슬 불러낼까봐 움찔했다.
그러나 이한은 익숙하다는 듯이 모든 트집을 조금의 불만도 없이 바로 해결했다.
“고생했어요.”
“감사합니다.”
“참. 이제 슬슬 학교로 돌아갈 준비도 천천히 해야 할 텐데, 배우고 싶은 물약이라도 있나요?”
물약의 제조법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제국 전역에 널리 퍼진, 기초적이고 쉬운 물약들의 제조법은 도시의 아무 책방에 가도 구할 수 있었다.
<하급 체력 회복 물약> 같은 기초적인 물약과 제조법들.
그러나 이제 <도브룩의 취옥몽 물약>처럼 연금술사 개인의 노력과 연구가 들어간 물약의 제조법은 금화를 내더라도 연금술사 쪽이 허락하지 않으면 얻어낼 수 없었다.
연금술사들의 길드나 공방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철저했다.
이런 물약의 제조법을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비밀로 간주해서 잘못 건드리거나 베꼈다가는 바로 암살자가 찾아왔다.
그런 만큼 메이킨 가문의 공방에서 요아넨이 이한에게 여러 물약의 제조법을 알려준 건 분명 호의였다.
호의처럼 느껴지진 않았지만...
요아넨은 2학기 때 에인로가드에 돌아갈 학생으로서 필요한 물약을 하나 말해보라고 권했다.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이런저런 일들이 많을 테니 쓸만한 물약을 미리 알고 들어간다면 꽤나 도움이 되리라.
이한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아무 대가 없이 선물이 커서 오히려 조심스러울 정도였다.
‘설마 제조법 대신 보수를 안 주시려는 건 아니겠지.’
“요네르의 친구인데 이 정도 선물은 해줄 수 있지요. 그리고 그만큼 일을 잘 해준 것도 있고요.”
요아넨의 말은 진심이었다.
다른 조수들과 비교했을 때 이한은 이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요네르. 어떤 물약이 좋을 것 같아?”
“글, 글쎄... 요아넨 언니는 나한테도 이런 건 철저하거든.”
아무리 아끼는 동생이라 하더라도 공방의 모든 비밀들을 알려주진 않았다.
공은 공, 사는 사.
“투명화 물약은 필요 없겠지. 마법에 아티팩트까지 있는데.”
“생각 가속의 물약은 어때?”
“그것도 나쁘진 않네. 일단 적어둘게. 추적 방지나 교란이 가능한 물약도 나쁘지 않겠는데.”
“마법 향상의 물약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쫓아오는 놈들한테 던질 연막용 물약도 적어볼까.”
“...이한. 아까부터 조금 한정적인 상황의 물약만 이야기하고 있지 않아?”
“그런가?”
이한은 의아해했다.
일반적으로 쓸 수 있는 물약들 같은데...
“언니가 추천해주면 안 돼?”
“나한테 맡기는 거야?”
요아넨은 어이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도 동생의 어리광이 싫지 않다는 듯 고민에 잠겼다.
“마력 강화의 물...”
“괜찮습니다.”
“괜찮아.”
“...그, 그래. 그게 아니라면 이게 나을 거 같네.”
요아넨은 깃펜을 들고 재료 목록과 제조법을 일필휘지로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정갈한 글씨체가 흰 종이 위에 꽉 들어찼다.
“자. 받아.”
“이게 무슨 물약인데?”
“그건 직접 만들어보면 알게 될 거야. 비교적 구하기 쉬운 재료들을 쓰는 물약이니 어렵지 않을 거구.”
“감사합니다. 메이킨 님.”
이한은 종이를 받고 생각에 잠겼다.
‘뭐지? 강화 계열 같은데... 마력 강화는 아닐 테고...’
“그런데 혹시 교수님들이 길거리에서 싸웠다는 소문에 대해 말해줄 수 있어요? 일도 끝났으니 천천히...”
“아. 그게 궁금하셨던 겁니까?”
아까부터 요아넨이 뭔가 물으려던 것 같았는데 이거였다니.
이한은 미친 교수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려고 준비했다.
“메이킨 님! 지금 바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7번 솥이 완전히 끓어 넘치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들어간 재료를 다 버리게 생겼습니다!”
“......다들 다음에 보도록 하죠. 가세요!”
요아넨은 빠르게 인사하더니 연금술사를 따라 공방의 안쪽으로 걸어가버렸다.
이한은 왠지 모르게 그 뒷모습에 분노가 가득한 것 같다고 느꼈다.
“혹시 화나신 건가?”
“응. 그런데 이한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다 자업자득이지.”
* * *
“으으으끄으으으으으끄으으...”
닐리아는 몸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린 것 같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가이난도가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괜찮아? 왜 그러는데?”
“하필 왜 1등을 해서... 미안. 다른 생각하느라 못 들었어. 뭐라고?”
그러나 이미 가이난도는 경멸 섞인 표정으로 친구를 노려보고 돌아선 뒤였다.
‘잘난척을 하려고 나를 속이다니!’
“다들 공부하고 있었나?”
푸요의 마법지팡이 공방에서 일을 끝내고 돌아온 이한은 드넓은 응접실에서 굴러다니는 친구들을 보고 의아해했다.
가이난도는 교과서를 들어 잡지를 가리고 말했다.
“응.”
“넌 왜 매번 1페이지를 펴고 있지?”
“......”
“그래... 간식이나 먹어라. 그보다 닐리아는 왜 저래?”
“1등해서 괴롭대. 흥. 뭐 저런 게 다 있어.”
가이난도는 슈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 투덜거렸다.
“아. 혹시 저택에서 했던 이야기가 진전된 건가?”
이한은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 때 닐리아의 의견은 상당히 훌륭해서, 1등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진행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역시 그럴 것 같았...”
“그럴 거 같긴 뭐가 그럴 거 같은데!”
“무슨 일이야?”
뒤늦게 들어온 요네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닐리아가 낸 답변을 실제로 해보는 건가?”
“아. 그거? 응. 한 번 해볼 거 같더라.”
“이야...”
“대단하지?”
“대단한데.”
이한과 요네르, 랫포드는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닐리아를 쳐다보았다.
물론 닐리아는 초조해서 잠도 안 올 지경이었다.
“실패하면 어떡해! 어떡하냐고!”
“메이킨 가문은 돈 많아서 상관없지 않나...?”
“맞아. 그 정도 실패는 상관없어. 괜찮아.”
“요네르가 곤란해지면!”
“안 곤란해져. 만약 실패해도 고른 사람들 잘못이지.”
요네르의 말에 이한은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하면 메이킨 가문이 감사의 뜻으로 뭐라도 줘야 하지 않나?”
“그러게. 한 번 말해봐야겠다.”
“...둘 다 쏴버리기 전에 그만해.”
닐리아는 지금 시작도 안 했는데 성공을 가정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위장이 따끔거렸다.
물론 메이킨 가문이 닐리아한테 책임지고 진행하라고 할 만큼 무례하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닐리아의 의견을 갖고 가서 메이킨 가문의 실무자들이 직접 하는 것이었다.
정말 부담 가질 필요가 없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실패하면 내가 낸 의견 때문에... 실패하면 내가 낸 의견 때문에...’
닐리아가 너무 불안해하자 이한은 요네르에게 물었다.
“정말 메이킨 가문이라면 알아서 잘 했을 텐데... 그렇지?”
“응. 아. 에인로가드 교수님도 초빙하는 게 어떠냐고 말 나왔었어.”
“오. 닐리아. 들었지? 에인로가드 교수님도...”
“어? 그럼 2학기 때 강의 하나 안 들어도 돼?”
“그럴 리가 있겠어.”
가이난도와 요네르의 대화를 듣던 이한은 멈칫했다.
‘잠깐. 지금 준비해도 일의 시작은 학기 도중일 텐데, 멋대로 나갈 수 있나? 해골 교장이 허락을 해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