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저 어린놈이 자신과 거래하러 온 게 아니라 자신을 조종하러 왔을 줄이야.
이칼도렌 공작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
“괜찮으십니까?”
호위들은 주인의 상태가 갑작스럽게 변하자 당황해서 외쳤다.
온갖 비싼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공작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아무것도 아니다. 몸이.. 조금 좋지 않군.”
“바로 사제를 부르겠습니다.”
“됐다. 조금 쉬면 낫겠지. 미안하게 됐군. 먼저 일어나겠네.”
이칼도렌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잠깐 되짚어볼 시간이 필요했다.
정말로 믿기 힘든 일이었다.
공작 자신이 이렇게 겁을 먹고 먼저 꼬리를 빼게 되다니.
그 대단한 워다나즈 가문의 가주 앞에서도 이런 적 없었는데...
‘대체 무슨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냐, 워다나즈!’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을 나가자 이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러십니까?”
“이상하군. 공작 정도 되는 사람이 갑자기 몸이 안 좋을 리 없는데.”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물약과 마법 스크롤을 몸에 퍼부을 수 있는 위치였다.
성 하나 가격은 가뜬히 넘을 아티팩트들을 몸에 두르고 다니는 이칼도렌 공작이 마법을 아낄 리도 없었고.
“확, 확실히 그렇습니다.”
로웨나는 이한의 식견에 놀라워했다.
자신은 그저 공작이 몸이 안 좋나 했는데, 이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무언가를 눈치 챈 것이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군.”
“그게 무엇입니까!”
“기념품 주기 싫어서 아픈 척을 하는 거다.”
“...예?”
로웨나는 잔뜩 기대하고 듣다가 당황했다.
“그거 말고 이유가 없잖나.”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이한의 식견을 존중하는 로웨나라 하더라도 이건 좀 받아들이기 힘든 가설이었다.
* * *
아래 연회장에서 이한이 매우 무례한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공작은 휴식을 취했다.
서재에 설치된 마법진들이 정신을 환기시키고 기운을 북돋아주었지만, 원인이 남아있는 한 심란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에인로가드에서 손을 빼야 하는가?’
이쯤 되자 차라리 에인로가드를 건드리지 말았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공작 본인의 힘을 믿고 찔러봤지만 손을 넣으면 넣을수록 바닥없는 늪에 빠져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보낸 부하만 확실히 회수했다면 진지하게 고민했을 텐데...
“주인님.”
밖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랫동안 공작을 모신 이들은 공작의 심기가 거칠어진 걸 알 수 있었다.
다들 괜히 말을 전하다가 애꿎게 화를 입을까봐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다.
“기사단이 도착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공작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내려갔다. 서늘한 한기가 감돌 정도였다.
“오늘 이 저택에 방문할 기사단이 있었나?”
“그, 그게... 기사단 쪽에서 날을 착각하고 방문한 것 같습니다...”
“......”
공작이 앉아있는 의자의 팔걸이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힉!”
“기사 놈들은 모두 다 머저리 새끼들인가? 숫자를 세지도 못하는 건가?”
원래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날짜를 착각해서 방문하는 게 그리 큰 실수는 아니었으니까.
초대한 상대가 중요하지, 상대만 중요하면 며칠 먼저 방문하든 늦게 방문하든 공작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있었던 일들이 공작의 인내심을 바닥내고 있었다.
오전에는 짐승 같은 기사 가문의 학생들이 난장판을 만들더니 오후에는 기사 놈들이 숫자도 못 세고 초대받은 날과 다른 날짜에 찾아온 것이다.
“돌... 돌려보낼까요?”
“...됐다. 머저리 새끼들 훈계한다고 고쳐지지도 않겠지. 대접할 준비 해줘라. 조금 쉬고 나가겠다.”
그래도 공작은 냉정히 계산했다.
기사 놈들 망신 주고 쫓아내서 괜히 불평을 만드느니, 잘 처먹여서 내보낸 다음 칭송을 돌리는 게 나았으니까.
초대한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도 대귀족의 의무였다.
잠시 후.
눈을 감고 쉬고 있던 공작에게 다시 시종이 찾아왔다.
시종은 온몸을 벌벌 떨면서 정말 전하기 싫다는 듯이 말했다.
“기사들이 공작 전하를 직접 뵙고 감사드리고 싶다고...”
“...죽여 버리기 전에 가만히 앉아서 처먹으라고 전해라.”
“......”
시종은 차마 전하러 가지 못하고 기다렸다. 공작은 한숨을 얕게 뱉으며 말했다.
“더 쉬고 나가겠다고 확실하게 전하도록. 이제 또 와서 부르는 놈이 있으면 맹세코 파묻어버리겠다. 알겠나?”
“...예!”
* * *
백양목 기사단은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약자를 돕고 위험에 뛰어들며 기사로서의 명예를 추구하는 기사들의 모임이었지만, 사실 백양목 기사단 같은 경우는 기사단 중에서 특이한 축에 속했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는 일을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아무리 기사라고 하더라도 그건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다.
제국의 기사단 대부분은 그 지역 기사 가문들끼리 모여서 지역을 지키기 위해, 혹은 친목을 위해 만들어진 훨씬 더 편안하고 이익집단적인 모임이었다.
너도밤나무 기사단도 후자에 속했다.
그랑덴 시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서 활동하는 너도밤나무 기사단의 기사들은 공작의 초대에 매우 기세등등해져 있었다.
“제국의 대귀족, 이칼도렌 공작 전하의 초대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지. 너도밤나무의 이름이 가진 영광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는 것도 없는 새끼들이...”
“영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모여서 마법사 카드나 했겠지.”
“쉿. 조용히 해라.”
너도밤나무 기사들과 같이 움직이고 있던 백양목 기사단의 젊은 견습기사들은 투덜거렸다.
이들을 데리고 온 평기사는 조심하라는 듯이 주의를 줬다.
“다른 기사단의 기사들에게 무례하게 군다면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하지만 저 자식들이 너무 오만하지 않습니까...”
“그만하라고 했을 텐데!”
평기사가 노기를 표하자 견습기사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평기사도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너도밤나무 기사단은 재산이 많은 기사단이 대개 그렇듯 기사보다는 귀족에 가깝게 행동하려고 했다.
백양목 기사단의 견습기사들과 같이 행동하게 됐으면 서로 존중하고 경의를 표해야 하는데 복장과 무기를 보고 자꾸 깔보는 태도를 취하니 견습기사들이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왜 이쪽으로 안내하는 것이오?”
너도밤나무 기사단의 기사 한 명이 이상함을 눈치 채고 물었다.
도시에 있는 공작의 저택은 크고 넓어서 연회장으로 쓸 수 있는 공간이 여럿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연회장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듯이 중앙에 위치한 홀이었다.
그런데 지금 하인들이 안내하고 있는 곳은 좌측에 위치한 연회장 아닌가?
“선객이 와계십니다.”
“선객이?”
기사들은 웅성거렸다.
자신들보다 먼저 온 손님들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들이 더 좋은 연회장을 차지하고 있다니.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어떤 분이시오?”
“에인로가드의 학생분들이십니다.”
“......”
기사들의 표정에 불만이 차올랐다.
다른 가문의 가주들이라도 방문한 거면 모를까 고작 마법학교의 학생들에게 자리를 뺏기다니.
물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 마법학교 학생들의 신분이 평균적으로 어떨지 계산할 수 있었지만, 기사들은 계산하는 대신 따지기 시작했다.
“공작 전하께서 배정해주신 것이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인들 입장에서 이런 질문에 공작의 핑계를 댈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목이 몇 개라도 부족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거란 말이오?”
“저희도 잘 모르겠습...”
“학생들이 먼저 들어간 모양이군.”
하인들의 조심스러운 대답을 기사들은 다른 뜻으로 이해했다.
“아직 어리니 착각할 수도 있겠지.”
“그냥 좌측의 연회장을 써도 되지 않겠습니까?”
백양목 기사단의 평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에인로가드 학생들의 신분과 위치를 생각해봤을 때 굳이 연회장 하나 때문에 드잡이질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너도밤나무 기사단의 기사들이 발끈해서 대답했다.
“마땅히 우리가 써야 할 연회장을 왜 양보해야 하오?”
“학생들이라고 해서 내버려두는 건 좋은 일이 아니오! 틀린 건 틀렸다고 말해줘야지. 백양목 기사단의 견습기사들은 이런 대우에 만족할지 몰라도 우리는 아니오.”
“......”
견습기사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발언에 평기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험악한 인상의 평기사가 기세를 뿜어내자 너도밤나무 기사단의 기사들도 아차 싶었는지 화제를 돌렸다.
“가서 말을 전하시오.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고.”
* * *
“워다나즈 놈이 즐거운 파티를 망쳤어.”
“맞아. 정말 자유롭기 그지없는 즐거움이었는데...”
“자꾸 중얼대는 놈들 있으면 술통에 거꾸로 처박아버릴 테니까 입 다물고 먹어라.”
깨어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투덜거리면서 음식을 먹자 이한은 경고했다.
아까 벌인 일들만 생각해도 음식을 주는 것 자체가 아까울 정도였다.
“저, 워다나즈 님.”
“??”
하인이 달려와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속삭이자 이한은 의아해했다.
뭐지?
‘설마 은화라도 받아야 한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이미 이한 안에서 공작의 평가는 그만큼 내려와 있었다.
“기사단 분들이...”
“...?”
상황 설명을 들은 이한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걸 깨달은 친구들도 웅성대며 모여들었다.
“기사단이 왜 와? 그것도 오늘?”
“이상한데?”
귀족 가문 출신 학생들이라면 같은 날에 여러 집단을 초대하지는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혹시 날짜를 착각하고 온 것 아닌가?”
“설마. 그 정도로 미친놈들이겠어.”
“흰 호랑이 탑 놈들을 봐. 멍청하긴 하지만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투탄타. 죽고 싶나!”
“닥쳐라. 남의 연회장에서 술에 만취해 쓰러진 새끼들이.”
“쓰러진 게 아니라 워다나즈 놈한테 맞아서 기절한 거야!”
“야... 창피하니까 작게 말해...”
친구들이 떠드는 동안 이한은 하인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 연회장을 양보하라고?”
“절대 안 된다! 워다나즈!”
“미친 소리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가장 격렬하게 반응했다.
기사 가문들끼리 모인 경험이 많은 이들이었기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귀족 가문의 모임과 달리 기사 가문의 모임은 난폭한 신경전이 벌어질 때가 많았다.
이런 식으로 남이 먼저 사용하고 있는 연회장에 들어가려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기사 가문 출신으로서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양보해도 되지 않나? 식사 다 했는데?”
“안 된다니까 워다나즈!”
“정신 차려! 네놈은 원래 그런 놈이 아니잖나! 시비를 거는 놈이 있으면 뼈까지 부숴버리는 놈이었잖나!”
“...너희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겠군.”
흰 호랑이 탑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이한도 더 말하지 않고 순순히 수긍했다.
“그래. 너희들이 나가기 싫다면야. 거절하겠다고 전하도록.”
괜히 사이에 끼인 하인은 안쓰러울 정도로 고개를 숙이더니 달려 나갔다.
그리고 돌아와서 말했다.
“저, 워다나즈 님. 기사님들이 혹시 가볍게 실력을 겨뤄서 결정하지 않겠냐고...”
‘혹시 연회장에 꿀이라도 발라져있나?’
이한은 미친놈처럼 연회장에 집착하는 기사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기에 무슨 마력의 맥이라도 흐르나?
왜 저렇게까지?
“크... 크하하하하! 스스로 무덤을 파는구나, 머저리 같은 놈들!”
“너도밤나무 기사단 놈들. 아직 제국이 넓은 걸 모르는군! 너희들은 오늘 죽었다!”
“????”
말을 전한 하인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반응에 당황했다.
말도 안 되는 무례한 제안에 거절할 줄 알았던 것이다.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