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화
물론 이한의 질문은 별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상식적으로 행동할 사람들이었다면 공작의 저택에서 대련을 벌이지 않았을 테니까.
“내 비기를 가르쳐드릴 테니 방금 배운 비기와 한 번 비교해주시오.”
“......”
이한은 벌써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정말 기사들하고는 엮이지 말아야지.’
* * *
귀찮게 생각한 것과 별개로 놀랍게도 기사들의 비기는 생각보다 쓸만했다.
외투 안에 숨겨둔 칼을 하나 더 빠르게 뽑아들어 순간적으로 찌르는 기술부터(빠르게 뽑는 것뿐만이 아니라 외투에 교묘하게 숨기는 것도 중요했다) 검을 순간적으로 채찍처럼 탄성 있게 만들어서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하는 기술까지.
물론 알라르롱 같은 기사가 보면 ‘저런 잡기 익히실 필요 없습니다!’하며 한탄하겠지만 이한은 알라르롱과는 사고방식이 달랐다.
물론 경지에 오르면 저런 잡다한 기술들은 쓸 필요가 없겠지만 그 전에는 유용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누구의 비기가 가장...?”
“음. 모두가 승리자라고 할 수 있겠군.”
“오오오!”
긴장한 채 이한의 평가를 기다리던 기사들은 박수를 치며 서로를 존중해줬다.
흐뭇하게 마무리된 것 같자 이한은 이제 정말로 떠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만...”
“아.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
기사들이 또 부르자 이한은 멈칫했다.
이제 기사들이 부를 때마다 겁이 날 정도였다.
또 뭔 소리를 하려고...
“곧 있으면 기사 가문들끼리 모임이 있는데 워다나즈 님을 초대하고 싶소. 오늘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면 다들 진심으로 감탄할 것이오.”
“......”
이렇게 가기 싫은 자리는 또 처음이었다.
이한은 순간 정색할 뻔했다.
‘거길 왜 가?’
애초에 기사 가문도 아닌데!
물론 기사들이야 오늘 있었던 일들을 다른 기사들한테도 알려줘서, 이한의 너그러움을 널리 알려보려는 순수한 선의였지만...
이한 입장에서는 민폐였다.
“저런. 아쉽게 됐군. 난 그 때 에인로가드 안에 있을 거라.”
“저런!”
기사들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말을 듣는다면 다른 가문의 기사들이 이한을 직접 보고 싶어 할 텐데...
“아! 고나달테스 공에게 직접 허가를 구해보겠소.”
“하하. 해보시지.”
“방금 뭐라고...?”
“해준다면 감사할 따름이지. 학생의 신분으로서 멋대로 나가겠다고 말할 순 없지만 외부인이 권한다면 교장 선생님께서도 생각이 달라지실 지도 몰라.”
“알겠소!”
기사들은 꼭 2학기 때 찾아가서 말해보겠다고 약속했다.
드디어 기사들에게서 해방되자 이한은 깊고 어두운 한숨을 내뱉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지젤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모임에 가고 싶지 않은 건가?”
“...?”
이한은 지젤이 뭔 소리를 하나 싶어서 빤히 쳐다보았다.
저 모임에 왜 가고 싶어 하겠는가.
최악의 경우에는 너도밤나무 기사단 기사들이 ‘큭큭 에인로가드에서 아직 덜 배웠군 이런 속임수에 넘어가다니!’하며 매복하고 있을 수도 있는데.
“가고 싶어 할 이유가 있나?”
“...가문들하고 친목을 다질 수 있는 기회잖아?”
너도밤나무 기사단은 무력은 조금 부족해도 다른 장점들이 있는 기사단이었다.
주최하는 모임에 나가는 기사 가문들의 이름을 생각해봤을 때, 그들과 안면을 터서 나쁠 게 없었다.
게다가 기사들이 말한 걸 보니 모임의 일개 참가자가 아닌 그 날 모임의 주연이 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그 정도로 각광을 받을 수 있는 자리라면 지젤이라면 두 다리가 부러져도 기어서 마법학교를 탈출할 것이다.
“내가 참가해서 뭐하는데?”
“필요한 일이 있으면 써먹을 수 있잖아.”
“...내가 그걸 어디에 쓰지?”
마법사 가문이나 하다못해 건축, 운송, 제빵 등 이런 길드 가문이었다면 이한도 솔깃했을 것이다.
-제빵사로 이름 높은 가문이라니... 혹시 화력 하나에는 자신 있는, 아프하 교단의 허가장도 있는 에인로가드 출신 수석 마법사가 일할 만한 단기 일자리는 없으신가?
그런데 기사 가문은 정말로 이한이 볼 일 없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이한이 검술 스승이 더 필요한 것도 아니고...
이한의 질문에 지젤은 보기 드물게 당황했다.
지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이라 무슨 의도로 묻는지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뭔...? 제국의 안건에 개입하거나 필요한 이권이 있을 때 정치적으로 개입할 수 있잖아?”
“그, 그렇게까지?”
“......”
당연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상대가 순진한 척을 하자 지젤은 분노했다.
“뭘 모르는 척이야?”
“...농담 좀 해봤다.”
상대가 뭔 소리를 해도 안 믿어줄 것 같아서 이한은 그냥 넘기기로 했다.
“그럴 줄 알았지.”
‘그럴 줄 알긴 뭘 그럴 줄 알아.’
이한은 지젤과 같이 연회장으로 돌아가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그런데 혹시 기사 모임도 여기처럼 환금성 높은 기념품을 주나?”
* * *
“다들 고생 많았다.”
“고생은 뭘.”
“맛있게 먹고 이런 것까지 받았는데 무슨 고생이야.”
“워다나즈. 넌... 상단을 차려야 해.”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오랜만에 대만족한 얼굴로 이한을 칭찬했다.
그리고 은화 한 개씩 건넸다.
“그래. 다들 잘 가라.”
배불리 먹고 금으로 된 장신구까지 받은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행복해져서 돌아갔다.
“......”
“......”
그걸 본 불사조 탑 사제들은 당황해서 말했다.
“저희 은화 없...”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냥 초대한 건데?”
“방금 은화 받으셨잖습니까?”
“잘못 본 거겠지.”
“은화 주머니에...”
“빌린 돈 갚은 걸 잘못 본 거 아닌가? 자. 빨리 돌아가라고. 너무 늦게 돌아오면 신전에서 걱정할 테니까.”
사제들은 자기들만 공짜로 대접받은 건가 싶어서 머뭇거렸지만 이한은 그들을 빠르게 밀어냈다.
‘소득이 괜찮군.’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물론이고 금으로 된 기념품까지.
이한은 공작에 대한 평가를 살짝 올렸다.
여러모로 괴팍하고 이상하게 굴긴 했지만 찾아온 학생들에게 정성을 다해 대접하는 건 잊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나쁘게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기본은 되어있는 사람일지도.’
“워다나즈 님.”
“아.”
로웨나를 발견한 이한은 손부터 내밀었다.
“???”
검은 머리칼을 한 엘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손을 잡고 악수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니. 공작한테 받은 돈 내놓으라고.”
“아.”
수수께끼를 풀면 공작이 황녀한테 선물로 바치는 금화.
그 금화를 추종자들끼리 나눠서 가질 수 있다고 해서 참가했지, 아니라면 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황녀님께서 아까 왜 부르셨는지 궁금해하신...”
“뭐? 모르겠는데. 그런 적이 있었나?”
“아까 부르셨습...”
“잠깐만. 확인 좀 해보고.”
이한은 로웨나가 건넨 주머니에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금화를 확인했다.
볼라디 교수의 공격을 피할 때와 비슷한 집중력이었다.
‘분노가 풀리는 액수군.’
수수께끼고 귀찮은 허례허식이고 모두 다 ‘제국의 관습에는 의미가 있는 법이지’하고 존중할 수 있는 액수였다.
이한은 외투 속에 주머니를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너도 고생 많았군.”
“저는 별로 한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지팡이는 정말 왜 안 꺼내신...?”
진실을 말해주면 추종자들이 상처 입을 것 같아 이한은 거짓말을 했다.
“공작 전하께서 지팡이 공포증이 생기셨다는군. 그래서 무슨 지팡이인지 설명만 해드렸다.”
“...정말 믿기 힘든 일입니다!”
“그렇지. 세상 일이 대개 그런 법이잖나.”
“어쩐지 아까 안색이 좀 안 좋으셨던 것 같았는데... 그런데도 그렇게 침착하게 끝내시다니 실로 대단하십니다.”
“공작 전하께서 부끄러워하시니 소문내지 말고. 알겠지?”
“물론입니다.”
로웨나는 이한이 믿고 말해준 것에 감격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황녀의 추종자들 중에 로웨나에게만 말했다는 건, 가장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해서 아니겠는가!
* * *
“꼭 이런 복장을 해야 해?”
가이난도는 울상이 되어서 물었다.
모르툼 교수가 초대한 언데드 계 중첩 현상.
선배들은 1학년 학생들이 참가하는 게 매우 신경이 쓰였는지 몇 가지 조언을 던졌다.
-다음과 같은 복장으로 참가해. 그리고 또 뭐가 필요하지... 배낭하고, 신선한 물 좀 많이 챙겨.
-(이한이) 물 소환하면 안 되나요?
-마력 부족해서 물 소환하기도 힘들 거고, 계에 퍼져 있는 마력 때문에 금세 상해버릴 걸. 그거 정화시키려면 마력이 몇 배로는 들어.
-앗. 그럼 안 챙겨도 될 것 같은데.
-너 지금 선배한테 반항하냐?
-?!
여러 유용한 조언들이 있었고 그 중 하나는 복장에 대한 조언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농부 같잖아.”
“나쁘지 않아.”
사실 도시를 걸어 다닐 때는 농부처럼 하고 다니는 게 흑마법사처럼 하고 다니는 것보다 나았다.
농부가 돌아다니면 사람들은 ‘쌀과 밀을 가지고 도시에 왔나보군’하며 흐뭇해하지만 흑마법사가 돌아다니면 사람들은 ‘시체를 가지고 도시에 왔나보군’하며 경악해할 테니까.
“다 이유가 있는 복장이야.”
디레트가 뒤에서 하품을 하며 걸어왔다.
허름한 모자를 쓰고, 뒤에는 마법으로 움직이게 만든 수레를 질질 끌고 오는 모습이 경력 이십년은 된 농부처럼 보였다.
“들어가서 흑마법사 티내는 순간 언데드들이 바로 공격하기 시작하거든. 필요한 순간까지는 최대한 흑마법을 쓰지 않을 거야.”
지금 들어가려는 차원의 언데드들은 침입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흑마법사들은 자신의 정체를 최대한 숨겨야 유리했다.
언데드 계에 들어가는 이유는 쓸만한 재료와 시약들을 챙겨서 나오는 거였지, 언데드들과 싸워서 사생결단을 벌이는 게 목표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왜 농부처럼?”
이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다른 무해해 보이는 복장도 여럿 있을 것 같은데?
“옷이 싸잖아. 무거운 거 들기도 좋고, 더러워져도 괜찮고.”
“과연.”
“뭐가 과연이야!”
가이난도는 투덜댔지만 이한과 디레트는 무시했다.
“참. 너희들은 이례적으로 허락해준 거니까... 1구역까지만 들어가서 챙기는 거야. 알겠지?”
“네.”
원래 1학년 학생들은 언데드 계가 열렸을 때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라 특별히 모르툼 교수가 허락해 준 거지만, 그래도 깊숙한 곳까지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1구역이면 어느 정도입니까?”
“글쎄? 말로 설명하는 건 좀 어려워서... 들어가 보면 알게 될 거야. 확실하게 느낄 수 있거든.”
디레트의 설명에 따르면, 마법사라면 확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차원의 최외곽 영역을 지나 그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 달라지는 분위기.
그걸 흑마법사들은 편의상 1구역, 2구역으로 분류했다.
“겁은 안 나지?”
디레트의 질문에 가이난도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이한이 있는데요 뭘.”
“......”
“...그, 그래. 잠깐. 여기 후배는 2구역에도 들어갈 건데.”
“네?”
가이난도는 깜짝 놀랐다.
“이한 1학년이잖아요? 헉. 설마...?”
어쩐지 너무 마법을 잘하더라!
“이 후배는 모르툼 교수님한테 특별하게 허가를 받았다고 했잖아.”
“그러면 저희는요?”
“그러니까 1구역에만 있으라고...”
“......”
가이난도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쳐다보자 디레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너희들 나갈 때까지 지켜봐줄게.”
“감사합니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이한은 디레트에게 판 초콜릿을 건넸다.
“...?”
“드시죠. 정말 노고가 많으십니다.”
“...이번만 해주는 거니까 오해하지 마.”
‘아닌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