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콜록. 이상하군.”
선배들이 위엄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동안 모르툼 교수는 유적의 안쪽 통로를 확인하고 있었다.
파수꾼 골렘들이 나타나서 앞길을 막았지만 사실 그건 별로 대단한 장애물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봐왔던 유적들을 떠올려보면 훨씬 더 위험한 함정들이 많아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왜 그러시죠?”
“안에 별다른 게 없군.”
디레트는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정도로 멀쩡한 유적치고는 저항이 약했다. 입구에 배치된 파수꾼 골렘 말고는 별다른 적들이 보이지 않았다.
“암흑이여, 뻗어나가 공명하라... 이래도 없고. 콜록. 정말 이상하군.”
유적 안쪽 통로를 향해 마법을 뻗어서 각종 탐색 마법을 시전한 모르툼 교수는 어둠 속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혹시... 아니다.”
“무슨 생각을 하셨는데요?”
“혹시 이 유적에 주인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콜록. 아무래도 주인이 있는 유적이라면 쓸데없는 함정들을 깔지 않으니까.”
제국 마법사들이 발견할 수 있는 대부분의 유적들은 그 주인이 먼 옛날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가끔 주인이 남아 있는 유적들이 있었다.
그럴 경우 마법사는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남의 땅에 불법침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주인이 있었다면 이렇게 쉽게 들어올 수가 없었을 텐데요?”
디레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멀쩡하게 주인이 살아 있어서 관리가 되는 유적이라면 들어오기 전에 몇몇 징조들이 보여야 했다.
외부인들의 접근을 막는 경고는 물론이고 주변을 순찰하며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하수인들까지.
이런 식으로 유적 외곽이 텅 비어있고 입구로 들어왔는데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한 곳은 주인이 있을 가능성이 적었다.
“콜록. 그렇지. 네 말이 맞다. 주인이 있다면 이렇게 관리가 안 되진 않았겠지. 주인이 어디 갇혀 있거나 중상을 입어서 회복 중인 게 아니라면...”
출렁!
“!”
모르툼 교수와 이한은 가장 먼저 궁전 유적 안의 마력 흐름이 변화하는 걸 느꼈다.
이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궁전 입구 주변의 벽과 바닥, 천장이 마치 점액처럼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변환 마법으로 물질의 성질을 바꾸고 형태를 바꿀 수 있다지만,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모두 움직이지 마라!”
지금 벌어지는 상황에서 심상찮음을 느낀 모르툼 교수는 곧바로 대응에 나섰다.
평소의 콜록대던 병약한 모습은 어디 가고, 모르툼 교수는 안광을 빛내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내가 명하노니, 음(陰)의 길이여 열려라! 암흑의 밧줄이 속박하리라!”
순간 학생들 뒤로 음차원과 연결된 문이 생기고 그 안에서 암흑 원소로 된 밧줄이 튀어나왔다.
원래는 암흑 원소를 이용해 음차원의 문을 열어 적을 잠시 끌어들이는 마법이었지만 모르툼 교수는 이 마법을 응용해 공간 이동 마법으로 사용했다.
응용만 한다면 학생들을 일시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방어 마법이 되는 것이다.
음차원을 통과한 학생들이 모르툼 교수의 옆에서 튀어나왔다. 학생들은 갑작스러운 암흑 원소와의 접촉에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어지러워했다.
쿠르릉!
그러나 모르툼 교수의 판단이 옳았다는 게 금세 드러났다.
방금까지 멀쩡했던 바닥들이 저 밑으로 출렁이며 내려가기 시작하고, 벽들은 서로 부딪칠 듯 가까이 오며 공간을 지우고 바꿔버렸다.
직접 움직여서 데리고 오려고 했다면 도중에 몇 명은 떨어졌을 것이다.
“교, 교수님!”
우드드득!
모르툼 교수는 손바닥을 뻗어 두려워하는 학생을 달래고 주변의 뼈들을 자신의 통제 하에 넣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단단한 바닥이 있던 어두컴컴한 허공에 거대한 뼈 발판이 생겨났다. 남은 뼈들이 그 위를 벽처럼 감쌌다.
그제야 학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교수님!”
“진정해라. 바닥이 사라지는 것 정도는 별로 위험한 함정도 아니니까.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걸 보면 이 유적도 그리 위험한 유적은...”
“아니, 후배가 사라졌다고요!”
“!!!”
* * *
처음에 자신만 빼놓고 선배들이 음차원으로 순간이동할 때, 이한은 자신이 모르툼 교수한테 무슨 잘못을 한 줄 알았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건가?’
그러나 자신의 몸을 감싸려다가 튕겨나가는 암흑 원소와 차원의 틈새를 보고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교수님...! 공격 마법 아무데나 응용하시면...!’
독이나 다른 저주들이 튕겨나갔던 것처럼 모르툼 교수의 마법도 튕겨나가자, 공포보다는 황당함이 몰려올 정도였다.
바닥이 사라지고 아래로 낙하하는 감각을 느끼면서 이한은 바로 쇠구슬을 띄웠다.
“움직여라!”
원래 낙하할 때 버티는 용도의 마법도 아니었고, 이한 정도의 무게를 버틸 정도의 마법도 아니었지만, 이한의 무식한 마력은 쇠구슬을 공중에 못박은 것처럼 고정시켰다.
강한 충격이 어깨로 올라왔다.
이한은 마력을 육체에 퍼부으며 버텼다.
“발이여, 땅을 주름잡아라... 공간이여, 인지되어라!”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강화 마법과 공간 인지 마법을 걸었다. 아직도 사방이 출렁이고 있었지만 마법 덕분에 거리감각이 돌아왔다.
‘바닥이 있다!’
이한은 빛의 구체를 띄웠다. 그런 다음 쇠구슬의 위치를 바꿔가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법학교로 돌아가면 반드시 저속 낙하 마법부터 배우겠다고 다짐하면서.
‘록 드레이크 잡고 나서 바로 배웠어야 했는데... 공부를 하지 않아서 이렇게 고통을 겪는군.’
이한은 한탄했다.
괜히 교수들이 ‘공부해서 남 줄 거냐,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2학기 때는 더 성실하게 공부하리라.
쿵!
“?!”
안전하게 내려오는 사이 옆에서 무언가 휙 떨어지자 이한은 당황해서 시선을 돌렸다.
“뭔...”
“팔, 팔이...”
“선배!”
2학년 선배, 오골도스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와 함께 옆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이한과 달리 오골도스는 허공에서 낙하하는 동안 주문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담대하지 못했다.
미리 불러놓은 언데드 소환수를 쿠션처럼 깔아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팔이 아니라 온몸이 박살났을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됐, 됐어. 괜찮아.”
오골도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한 학년 선배인 만큼 후배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오골도스는 이한이나 가이난도 같은 다른 탑 후배들을 흑마법에 진심이 아닌 것 같다고 의심하지 않았던가.
그런 말을 한 후배한테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팔이 부러지셨는데요?”
“괜찮다니까. 부목을...”
에인로가드의 2학년쯤 되면 학생들은 즉사를 제외한 어느 정도 상처에는 응급대처가 가능해졌다.
오골도스는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외우려고 했다. 그러나 통증 때문에 쉽지 않았다. 주문이 몇 번이고 빗나가고 마력이 흩어졌다.
“선배. 그냥 제가 하겠습니다.”
“됐...”
슬슬 귀찮아진 이한은 잠깐 고민하다가 오골도스의 어깨를 붙잡고 힘으로 제압했다.
해골 교장한테 찍히면 마법학교 몇 년 내내 고달프겠지만 기껏해봤자 다른 탑 2학년 선배한테 찍혀봤자 뭐 그리 고달프겠는가.
“너 지금 뭐하는... 으아악!”
“붙어라!”
놀랍게도 후배는 부목을 대고 응급처치를 하는 대신 지팡이를 휘두르고 마법을 시전했다.
갑작스러운 치유 마법에 오골도스는 비명을 질렀다.
“멈춰! 뭐하는 거야! 안 돼!”
같은 2학년 사제가 치유 마법을 실패해 친구의 살짝 삔 손가락을 360도 회전시켰던 기억이 떠오른 오골도스는 필사적으로 말렸다.
삔 손가락도 위험한데 부러진 상처는 더...
“움직여보십시오.”
“...???”
오골도스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팔을 움직였다.
놀랍게도 통증이 없었다.
이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급한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이 먼저 시전했습니다.”
“......”
오골도스는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입을 열려고 했다.
“고... 고...”
-크르릉.
“샤르칸. 저기 길이 있다고? 고맙다. 선배. 저기 길이 있답니... 무슨 말 하려고 하셨습니까?”
“고... 고통스럽다.”
“저런. 부상이 심하셨나보군요.”
-크릉.
“샤르칸.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 선배도 다치고 싶으셔서 다친 게 아니잖아.”
“......”
* * *
오골도스는 가시방석에 앉아본 적이 없었다.
3학년 선배 한 명은 징벌방 지하 고학년실에서 가시방석에 앉아봤다고 주장했었지만(오골도스는 그게 허풍인지 아닌지 아직도 헷갈렸다), 오골도스는 다행히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오골도스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제, 제기랄. 마법이...”
마법사는 섬세한 생물이었다.
마법을 실패하는 충격은 물론이고 사방의 벽이 춤추고 바닥이 사라져서 낙하하는 충격으로도 마력이 뒤흔들려 일정 기간 동안 마법을 쓰지 못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오골도스가 기를 쓰고 집중해도 몸 안의 마력 흐름이 꼬여서 움직이질 않았다.
“선배. 괜찮습니다. 제가 마법 쓰면 됩니다.”
“...내가 한다니까. 잠시만... 크윽.”
“고나달테스. 선배를 부축해드려.”
“괜찮... 뭐? 뭐라고?”
“예? 뭐가요?”
“아니... 그... 아니다. 됐다.”
오골도스는 스켈레톤 전사의 이름에 대해 말하려다가 말았다.
자기 소환수의 이름을 뭘로 짓든 그건 마법사의 자유였지만...
...저건 좀 심하게 자유롭지 않나?!
-■ ■■■■■.
“......”
이한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샤르칸과 고나달테스를 제외한 다른 스켈레톤들은 전부 다 소환 해제시켜놓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너무 느려서 움직일 때 방해가 됐던 것이다.
물론 오골도스의 입장에서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나 때문에...!’
후배가 자신을 부축하느라 다른 언데드까지 취소한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건...”
이한은 발걸음을 멈췄다.
지하 통로 저편에서 으스스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아직 암흑 시야 마법이 남아있던 오골도스는 눈을 깜박이더니 말했다.
“감옥...”
“징벌방... 아, 감옥이군요. 습관적으로.”
“......”
놀랍게도 통로 끝에 연결된 곳은 지하감옥이었다. 이한은 유적 지하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유적이면 다 부서지고 망가진 곳만 있는 줄 알았는데.’
통로를 쭉 걸어서 도착하면 원형으로 사방(舍房)이 쭉 배치되어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어떤 쇠창살도 없다는 점이었다. 원래라면 죄수가 나오지 못하게 가로막았어야 할 벽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한은 순간 누가 먼저 와서 창살을 뜯어갔나 싶었다.
-누구냐? 어느 겁 없는 침입자가 왕의 감옥을 어슬렁거리는 거냐?
“!”
이한은 자신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상대방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상대가 이한보다 뛰어난 마법사면 모를까, 아닌 경우라면 무조건 먼저 상대의 마력을 먼저 감지해냈던 것이다.
-빨리 숨는 게 좋을 거다. 들키면 무사히 있지 못할 테니까.
말을 건 것은 근처 감방 안에 있던 언데드 마법사였다. 이한은 왜 자신이 상대방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상대가 두르고 있던 망토를 치우자 그제야 마력이 느껴졌다.
몬스터 특유의 적대감이 보이지 않자 이한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누구냐니. 왕의 명령을 지키지 못한 죄인이지.
“그러니까 왕이 누굽니까?”
-...무슨 소리를... 너,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냐? 여기가 구울의 왕께서 군림하시는 궁전인 것도 모르고 들어온 거냐? 바깥의 병사들은??
“...?!”
어딘가 익숙한 이름에 이한은 멈칫했다.
설마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