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이한은 언데드 마법사에게서 더 정보를 캐내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언데드 마법사도 밖의 상황이 매우 궁금했는지 이한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해줬다.
원래 이 궁전은 구울의 왕이 거처로 쓰던 곳이었고, 왕의 친위대가 왕좌를 호위하고 있었으며, 왕의 병사들이 궁전 주변을 순찰하며 떠돌이 침입자들의 접근을 단호하게 막아내곤 했다.
구울의 왕은 난폭한 폭군이었지만 그 힘은 진짜였기에 왕의 궁전은 인근에서 혼란이 일어도 조금의 빛바램 없이 고고하게 암흑으로 타오르고...
“그런 거 없었습니다?”
-뭐라고??
“그런 거 없었는데요. 타오르는 암흑 같은 건 없고... 그냥 평범한 건축물이었습니다. 손쉽게 들어올 수 있었고요.”
언데드 마법사의 얼굴에는 살점이고 근육이고 없었지만 뼈만으로도 경악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타화자재(他化自在)의 불꽃이 꺼졌다고! 오만한 왕께서 그걸 그냥 두고 보셨을 리가 없지 않느냐!
“저한테 소리치셔봤자...”
언데드 마법사는 이 믿기지 않는 바깥소식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혼란스러워했다.
그 때 반대쪽 통로에서 철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큰일났다! 죄수들이 오고 있어!
“같은 죄수 아니십니까?”
-처지야 같지만 신분이 다르다. 저놈들은 투쟁과 고통을 즐기는 놈들이야.
이 궁전 지하의 감옥에 갇혀있는 자들은 처지는 똑같았으니 신분은 제각각이었다.
언데드 마법사처럼 구울의 왕이 내린 명령을 거부하고 투옥된 자도 있었다면, 지금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놈들처럼 난폭하게 싸움을 즐기다가 붙잡혀서 처박힌 자들도 있었다.
후자 같은 경우에는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에 갇혔다고 절망하기보다는 그 안에서도 자신의 취미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감옥 안의 같은 죄수들을 공격하고 쓰러뜨리려는 것이다.
어차피 이 지하감옥의 언데드 죄수들은 박살나서 쓰러진다 하더라도 일주일만 지나면 다 회복되서 부활하게 되어 있었다. 투쟁을 좋아하는 전투광에게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장소였다.
-여기에 왜 창살이 없는지 아느냐? 왕께서 죄수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기 위해서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뭘 어떻게 해?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시비를 걸면 더 좋아할 놈들이야.
지하감옥의 언데드 광전사들은 싸움 그 자체에 매료된 자들이었다.
언데드 마법사처럼 숨어서 운 좋게 피해가면 모를까 맞서 싸우는 건 상대를 자극하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이한에게 언데드 마법사의 말은 받아들일 수 없는 헛소리였다.
‘난 부활 못하잖아.’
“같이 싸웁시다.”
-뭘 같이 싸우자는 거냐? 내가 왜?
“어차피 적이 다가오면 제가 무조건 끌어들일 겁니다. 괜히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처음부터 같이 싸웁시다.”
-...어디서 온 놈인지는 몰라도 비열한 핏줄을 타고 난 놈이 분명하겠구나!
언데드 마법사는 욕설을 내뱉으며 감방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래도 마법사는 이한 같은 침입자보다 매번 행패를 부리는 언데드 광전사들이 더 싫었는지 밖으로 나오자 성실하게 조언해줬다.
-놈들은 단단하고 숫자가 많다.
셀 수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이 감옥을 돌아다니면서 강한 놈의 살덩어리를 갖다 끼우고 근육을 갈아치운 결과 언데드 광전사들의 방어력은 어지간한 마법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끈질겼다.
게다가 한 놈이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패거리를 만들어 돌아다니니, 언데드 마법사 입장에서는 아무리 마법으로 승부하려고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셈이었다.
-이걸 공략하기 위해서는 마법 하나로는 부족한데... 그래서 너는 무슨 마법을 쓸 수 있지?
이한은 대답 대신 마법을 시전했다.
시간이 없는 만큼 일일이 말하면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열 구가 넘는 스켈레톤 전사들이 복도에 자리 잡자 언데드 마법사는 제법이라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어느 왕국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석 마법사 정도는 되는 모양이구나.
“......”
옆에서 부축 받고 있던 오골도스는 황당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동작이 너무 느리군. 언데드 소환을 별로 연습하지 않은 모양인데.
“예.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한은 스켈레톤 전사들이 든 창과 활에 냉기 마법을 걸었다.
알시클에게 배운 냉기 마법이 걸리자 둔탁한 뼈 창과 화살에서 서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과연. 언데드 소환보다는 다른 쪽을 더 집중해서 익혔군... 냉기 마법은 좋은 선택이다.
“박무여, 퍼져라.”
이한이 환상 마법까지 쓰자 언데드 마법사는 놀라워했다.
-환상 마법까지? 흑마법사가 환상 마법까지 쓰는 건 드문 일인...
“손이여. 적을 갈라버려라.”
-???
강화 마법까지 나오자 언데드 마법사는 놀라움을 넘어 당황스러워했다.
-잠깐, 어느 왕국 출신이라고 했지?
* * *
시간만 있었다면 이한이 어느 왕국의 어디서 일하는지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언데드 마법사는 이한의 마법을 대략 듣자마자 준비에 들어갔다.
-저 입구가 뚫리면 무조건 패배라고 생각하면 된다. 광전사 놈들과 근접전으로 붙으면 승산이 없으니.
언데드 마법사는 감옥 복도 끝에 뼈로 된 바리케이드를 치고 이한의 스켈레톤 전사들을 그쪽에 배치시켰다.
그런 뒤 자신의 언데드 소환수들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
갑주를 입은 두 언데드 기사가 눈에서 시퍼런 안광을 뿜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불러내는 소환수의 강함만 봐도 마법사의 실력을 알 수 있는 법.
-강해보여도 이걸로 막는 건 한계가 있다. 다른 마법으로 지원해주지 않으면 바로 뚫리겠지.
“최선을 다해 막아보겠습니다.”
이한은 스켈레톤 전사의 뼈 활을 들고 <하급 속도 증가>, <하급 중량 증가>, <하급 관통력 강화>를 걸기 시작했다.
내구도 낮은 뼈 활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이한은 이번만 넘기면 된다는 각오로 아슬아슬하게 시전했다.
언데드 마법사는 눈앞의 길목을 보강하느라 정신이 팔려 이한이 연속강화마법을 시전하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봤다면 마법을 왜 그렇게 이상하게 낭비하냐고 놀랐을 것이다.
-왔다!
“!”
언데드 마법사의 나직한 외침과 함께 샤르칸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2m는 가볍게 넘을 것 같은 살덩이 광전사가 눈을 번뜩이더니 고함을 터뜨렸다.
-■■■■!
마치 쓸만한 상대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 같았다. 이한은 기다리지 않고 바로 쏘았다.
쐑!
-무슨...?
언데드 마법사가 무슨 하찮은 공격이냐고 놀라워하는 사이 뼈 화살이 반쯤 광전사의 가슴팍에 꽂혔다.
그 단단한 근육과 질긴 피부를 찢고 들어간 공격에 언데드 마법사도, 광전사도 놀라워했다.
-...터져나가라!
언데드 마법사는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뼈 화살의 통제권을 뺏어 폭파시켰다.
뼈 안에 있는 가스가 마력과 함께 반응해 폭발하면서 광전사에게 타격을 줬다.
-■■■...
그르렁대는 소리와 함께 광전사가 몸을 수습하려고 했다. 언데드 마법사는 바로 다음 마법을 시전했다.
-포박해서 끌어내려라!
부위 한 곳이 아닌 광전사의 몸 전체를 뼛조각들이 덮었다. 놈의 움직임이 느려지자 언데드 마법사는 길게 호흡하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나와라, 맹독의 촉이여, 놈을 녹여버려라!
다른 마법과 달리 유난히 길고 강한 주문 시전에서 이한은 언데드 마법사의 장기가 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복잡한 마력 형태의 독이 생겨나더니 화살의 형태로 변해 쏘아져나갔다.
단단함이나 속도만 놓고 보면 광전사의 근육도 뚫지 못하고 튕겨나가야 할 테지만, 맹독 화살은 그대로 살점과 근육을 녹여버리며 길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광전사는 고통도 느끼지 않는지 웃음을 터뜨리며 뼛조각들을 떨쳐내기 시작했다. 둔기를 휘두르는 살벌한 동작에 주변 스켈레톤 전사 두 마리가 날아갔다.
“찔러!”
하지만 다른 스켈레톤 전사들은 남아있었다. 이한은 마력을 터질 정도로 퍼부으며 명령을 내렸다.
뼈 창은 이한이 직접 쏘아낸 화살과 달리 광전사의 몸을 뚫지는 못했지만, 그 끝에 부여된 냉기가 약간이나마 광전사를 느리게 만들었다. 연속된 공격들이 들어오자 광전사는 성가셔하며 둔기를 다시 휘두르려고 했다.
“냉기여, 화살이 되어 쏘아져라!”
이한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얼음 화살을 쏘아냈다. 얼음이 적중되자 냉기가 터져 나오며 광전사의 움직임이 다시 한 번 멎었다.
샤르칸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발목을 절단할 기세로 집요하게 노리는 공격에 광전사는 공세를 포기하고 주변 적들부터 처리하려고 했다.
우드드득!
공격 한 번에 스켈레톤 전사들이 절반쯤 몰살당하자 언데드 마법사는 한탄했다.
언데드 소환이 주전공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어설플 줄이야.
저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마력을 아껴서 다른 원소 마법에 쓰라고 했을 텐데...
“일어나라, 뼈로 이루어진 전사들이여!”
이한은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1초 차이로 일이 꼬일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박살난 스켈레톤 전사들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일어났다. 광전사는 황당하다는 듯이 이한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마력을 낭비하지 마라!
“알아서 계산하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게 정말이냐? 그렇다면...
언데드 마법사는 솔직히 믿기지 않았지만, 이한의 말을 일단 인정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 상황에서 진실을 따질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왕국에서 제법 높은 지위를 가진 마법사 같은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진 않으리라.
-독이여, 뼈를 녹이고 근육을 태우는 독이여, 다시 안에서 차올라...
독을 사용하는 마법사들에게는 여러 가지 요령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독을 미리 소환해서 몸 어딘가에 저장해놓는 기술이었다.
매우 위험한 방법이었지만 독이라는 원소의 특징을 살려서 비상시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라, 뛰어난 독 원소 마법사는 이런 기술에도 능했다.
언데드 마법사는 저장된 독을 토해냄과 동시에 마력을 소모해 독을 다시 채워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마력이 슬슬 바닥나는 걸 느꼈다.
-뼈여, 마력을 주인에게 바쳐라...
궁여지책으로 아까 쏘아낸 뼈에 남은 잔여마력을 흡수해서 회복하던 언데드 마법사는 옆을 보고 경악했다.
이한이 미친놈처럼 얼음 화살을 난사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파파파파파파파팍!
광전사의 몸에 새하얗게 성에가 낄 정도로 얼음 화살이 작렬했다.
몸을 관통하는 공격은 없었지만, 안 그래도 스켈레톤 전사들이 붙잡고 늘어진 상황에서 냉기까지 파고들자 광전사의 움직임이 눈에 띌 정도로 느려졌다.
이한은 초조한 상황에서 정신을 가다듬으며 빠르게 계산했다.
‘화살로 가야하나? 시간도 시간일뿐더러 데미지에 한계가 있다. 수옥탄은... 무리겠군. 차라리 번개 원소라면...’
이한의 지팡이에서 번개가 번쩍이며 모여들기 시작하자 언데드 마법사가 외쳤다.
-번개는 쓰지 마라! 마력 낭비다. 놈들은 번개에 내성이 강해!
“그렇습니까!?”
이한은 페르쿤트라를 욕했다.
하여간 이 도움 안 되는 정령 같으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내 비전의 타각독을 알려주겠다. 네가 독을 만들어내서 쓰는 거다!
“저는 독 원소 마법에 그리 익숙하지 않습니다!”
-왕국 수석 마법사라면 금세 익힐 수 있을 거다. 이론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 조합이 어려운 거지!
“제가 왕국 수석 마법사가 아닌데다가 독 원소 마법에 익숙하지 않...”
이한의 말은 무시하고, 언데드 마법사는 바로 독 원소 마법 설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