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이한이 안 본 그 짧은 사이에 제비를 만들어서 순서를 정하다니.
이한은 불사조 탑 학생들의 성실함과 협력성에 감탄할 수밖에 없았다.
만약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었다면 아직도 누가 먼저 제비 뽑느냐로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샤루칼이었나?”
“예.”
바다와 폭풍의 신, 아글타콰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보통 뱃사람이나 해양생물 쪽 수인이 많았다.
상어 수인인 샤루칼이 아글타콰를 믿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제 생각에 이건 운명입니다.”
“무슨?”
“이렇게 아글타콰 님의 가르침을 보여주기 좋은 장소도 없잖습니까. 이 바다를 보시죠!”
“호수잖...”
“저는 이 바다를 보면 아글타콰 님이 생각이 납니다.”
“으응.”
이한은 일단 들어주기로 했다.
평소에는 과묵한 사제들이라 하더라도 신앙 이야기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예전에 이한은 티질링 사제한테 간식 먹이다가 ‘그런데 프리싱가 님은 왜 스스로를 희생해서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거지’ 한 마디 했다고 세 시간 동안 설명을 들은 적도 있었다.
이럴 때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괜히 자극했다가는 이야기가 몇 배로 길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아글타콰 님이 취해서 술을 쏟으셨는데 그게 바로 바다가... 참.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학생들 중에서 가장 마법에 관심이 많다고 들으셨는데.”
“딱딱하게 예의 갖추지 않고 편하게 불러도 된다. 그리고 그건 오해가 좀 있는 것 같군.”
“겸손하시군요.”
“오해...”
이한은 자세하게 설명하려다가 포기했다.
이한이 만약 샤루칼이었어도 모든 학파 강의 듣는 사람이 ‘저는 마법에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습니다’하면 ‘뭔 개소리지’했을 테니까.
“...그래서 왜?”
“아. 저는 이한 님이 어떻게 하면 아글타콰 님에게 관심을 가질까 고민했습니다. 부? 권력? 그런 건 이한 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테니까요.”
‘아닌데.’
이한은 샤루칼 사제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만약 어느 교단에서 ‘저희 교단을 믿으면 기도 때마다 금화 한 닢을 드립니다’라고 선언하면 이한은 그 때부터 그 교단의 열렬한 골수 신도가 될 자신이 있었다.
“그 때 깨달았죠. 아! 부나 권력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이한 님이 관심을 가질 만한 건 바로 마법이라고. 그래서 아글타콰 님의 신성 마법을 보여드리려고 준비했습니다.”
“오.”
이한은 샤루칼의 말에 갑자기 흥미를 느꼈다.
‘그런데 내가 신성 마법을 배우지는 못할 텐데.’
이한이 아는 뛰어난 마법사들이 신성 마법에 대해 남긴 말들이 있었다.
A 교장.
-나 또한 신앙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나는 신을 믿기에는 너무 똑똑하기 때문이지.
B 가주.
-신성 마법을 배우려는 건 좋은 생각이다. 네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고 싶다면 말이다. 수식과 이론을 배경으로 정교화된 진짜 마법에 비하면 신성 마법은 그냥 믿음과 감성에 취해 울부짖는 야만인들의 개짓거리지.
저 정도까지 극단으로 가진 않더라도, 이한은 저 두 마법사들이 주장한 신성 마법의 원리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었다.
제국의 마법은 오랫동안 쌓아올린 이론과 지식을 바탕에 뒀다.
어떤 현상을 구현해내기 위한 가장 효율적이고 정확한 마법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마법을 반복했을 때도 같은 결과가 나오는가? 다른 마법사가 써도 재현성을 가지는가?
이러한 역사와 원칙들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제국의 마법사들이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며 같이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제국의 마법사들은 아직도 각자의 지역에서 각자만의 규칙으로 따로 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제국의 마법도 마법 세계의 모든 것을 설명하진 못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는 원시 마법, 명맥이 끊긴지 오래 된 고대 마법, 마법을 체계적으로 배우지도 않은 사람이 본능적으로 발동시키는 초능력, 이론보다는 믿음으로 굴러가는 신성 마법...
이론과 지식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감각으로 굴러가는 이런 마법들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몇몇 제국 마법사들은 이런 마법을 분석하고 해명하는 걸 아예 자신의 업으로 삼을 정도였다.
‘신성 마법은... 믿음이 필수적이니까.’
개인의 능력과 감각으로 굴러가는 마법들 중에서 신성 마법은 ‘믿음’이 중요했다.
신을 향한 강렬한 믿음.
그 믿음이 제국 마법과는 궤가 다른 특이한 현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한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었다. 애초에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가짜 신도 아닌가.
‘솔직히 나도 해골 교장 주장이 맞는 것 같다.’
신이 정말 존재해서 그 힘을 빌리는 게 아니라, 수많은 신도들이 보내는 믿음이라는 의지가 현실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 아닌가?
마법사도 자신의 의지로 현실을 바꾸는 만큼 수많은 사람이 집단으로 보내는 의지는 현실을 뒤흔드는 강렬한 힘을 만들어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마법이지?”
이한은 샤루칼이 무슨 마법을 쓸 지 짐작할 수 없었다.
신성 마법은 개인의 능력과 감각의 차이가 큰 만큼 나타나는 마법도 일관적이기보다는 제각각이었다.
물론 교단과 모시는 신의 특성에 따라 일반적인 경향성은 있었지만...
“깊은 심해 속에서 꿰뚫어보시는 아글타콰시여. 당신의 수족을 제게 보내주소서.”
샤루칼은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정신을 집중하거나 마력의 흐름을 배열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촤아아악-
호수 밑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샤루칼의 발 근처로 물고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이한은 놀라워했다.
“해양생물들을 불러오는 건가?”
“그렇죠, 이한 님.”
옆에 있던 사제들도 감탄하는 걸 보니, 샤루칼의 신성 마법은 상당히 대단한 수준이 분명했다.
‘하긴 아직 1학년인데 저 먼 곳의 생물들을 불러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니지.’
이한은 자신도 1학년이라는 건 잊어버리고 같이 감탄했다.
저렇게 멀리 있는, 그것도 물속이라는 악조건을 뚫고 생물에게 닿을 정도의 힘을 제국의 마법으로 보여주려면 복잡한 과정과 이론, 준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저런 식으로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마법처럼 다양하고 범용성 좋지는 못하더라도 특정 상황에서는 따라올 수 없을 만큼 효과적.
“어떻습니까? 이한 님?”
샤루칼은 진땀을 흘리며 물었다.
믿음으로서 마법을 성공시켰다지만 정신력이나 마력의 소모가 없을 수 없었다.
이한은 샤루칼의 부담을 빨리 덜어주기 위해 대답했다.
“감탄스럽군. 저 멀리서 이렇게 생물들을 불러오다니. 게다가 아주 유용해. 바로 잡아ㅁ...”
“하하. 이 생물들은 제 친구나 마찬가지라, 제가 부탁하면 최선을 다해서 들어주려고 합니다. 언제나 고마울 뿐이죠.”
“...그 우정은 정말 황금처럼 빛나는군! 부럽다!”
이한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샤루칼은 이한이 자신의 친구들을 싱싱한 횟감으로 생각했다는 건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말을 이어갔다.
“어렸을 때, 바다로 조각배를 몰고 나갔다가 폭풍을 만나서 표류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글타콰 님에게 기도하고 또 기도했죠. 다행히 아글타콰 님이 저를 갸륵히 여기셨는지 저한테 이 마법을 주셨습니다. 바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죠.”
듣고 있던 이한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과연. 그렇다면 나도 조각배를 몰고 나가서 폭풍을 만나야 하는 건가?”
“...예!? 그렇게 하실 필요는 없죠!”
샤루칼은 이한의 극단적인 발언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고행이란 말인가?
“어? 그런가? 하지만 딱히 정해진 방법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경험을 그대로 따라하는 게 가장 가능성 높은...”
“그건 너무 위험한데요... 저는 그냥 그만큼 진심을 담아 기도해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군.”
‘그걸로는 약할 것 같은데.’
이한 자신의 신앙과는 별개로, 이한은 저런 식의 기도에 조금 회의적이었다.
왜 수많은 사제들이 위기나 긴급 상황에 신성 마법을 각성하곤 하겠는가.
사람은 극단적인 상황에 빠져야 믿음이 더욱 강력해지기 마련이었다.
그걸 떠나서 이한 본인도 볼라디 교수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 마법 실력이 확 늘었...
‘...이런 미친. 내가 볼라디 교수처럼 생각하고 있군!’
이한은 스스로의 광기에 깜짝 놀랐다.
볼라디 교수 때문이 틀림없었다.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심연도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더니...
“그래. 그러면 한 번 기도해보겠다.”
이한은 그래도 샤루칼의 성의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기도해 볼 생각이었다.
성공하든 성공하지 않든, 사제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서 나쁠 것 없었으니까.
신성 마법을 쓰지 못하더라도 성실한 신도는 교단에서 뭐라도 챙겨주기 마련이었다.
‘아글타콰 교단은 뭘 챙겨주지? 횟감?’
“저 자식은 왜 수중 호흡을 안 하고 다른 짓을 하냐?”
“멍청한 놈. 워다나즈잖냐. 수중 호흡 따위는 이미 익혔겠지.”
옆에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떠드는 목소리에 이한은 고개를 들었다.
“샤루칼?”
“예?”
“수중 호흡부터 연습하고 하자.”
“아, 아차!”
* * *
30초 후.
“성공했군.”
“......”
“......”
옆에서 연습하고 있던 흰 호랑이 탑 학생 둘이 째려봤지만 이한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샤루칼 넌 연습 안 해도 되나?”
“전 원래 물에서 호흡할 수 있습니다만?”
“......”
“......”
옆에서 연습하고 있던 흰 호랑이 탑 학생 둘은 아까보다 더 날카롭게 째려봤다.
“그래. 그러면 그... 기도를 어떻게 하면 되지?”
“평소에 바다를 향해 갖고 있던 생각을 담아서 기도해보시죠. 처음 믿으시는 분들은 보통 그렇게 시작하거든요.”
샤루칼은 이한이 아글타콰에게 성의 있게 행동하는 모습에 아주 신이 나서 싱글벙글했다.
그에 비해 이한은 생각이 많았다.
‘바다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데.’
굳이 따지자면 작년에 제국 남부에 청어 열풍이 불어서 투자를 하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고민한 정도?
“아글타콰 님이시여... 음...”
이한은 어떻게든 없던 신앙심을 끌어내보려다가 포기했다.
차라리 되던 안 되던 자신의 방식으로 해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아글타콰를 믿는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상상하고.
그 거대한 에너지의 대양(大洋)을 떠올리고.
그리고...
‘그냥 달라고 하면 안 되겠지.’
이한은 합리적으로 생각했다.
다른 사제들이 바치는 믿음과 신앙심이 없는 만큼, 이한은 그냥 마법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내 마력을 바칠 테니 보상으로 그 에너지의 대양에서 조금만 빌려달라고.
그 순간 이한의 마력이 움직이더니 소모되었다. 바친 마력이 사라진 것이다.
‘역시 아무 일도 없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한은 실망하지 않았다.
원래 이게 보통이었으니까.
마법사가 마력을 소모해서 무언가를 바란다고 모든 현상이 다 마음대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세상의 질서와 규칙은 기본적으로 마법사의 의지보다 질기고 단단했다.
그래도 이한은 샤루칼의 시선을 의식하고 몇 번 더 마력을 바쳤다.
어차피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마력을 낭비해도 크게 상관없...
꿈틀.
샤루칼은 눈을 크게 떴다.
이한의 몸에서 보통의 마력과는 성질이 다른, 이질적인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제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마력.
신성력이었다.
“바로 그겁니다!! 바로 그거에요!! 이한 님! 역시 아글타콰 님에 대한 진실된 신앙심이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있으셨던 겁니다! 더! 더 기도해보세요! 그게 시작... 잠깐. 다들 왜 이쪽으로 와요?!”
샤루칼은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깨닫고 급히 외쳤다.
불사조 탑 사제들이 어느새 몰려와서 매우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