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지금 다들...”
샤루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한의 몸에서 퍼져나가던 신성력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사라졌다.
신성력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걸 마법으로 구현해내진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원래 대부분의 신도들은 신성력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신성력은 신성 마법의 기초이자 근원.
한 번 신성력을 만들어 낸 사람은 결국 언젠가 신성 마법에 도달하기 마련.
“휴...”
“후...”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누가 들어도 ‘다행이다’의 뜻이 담긴 한숨이었다.
“...지금 다들 기뻐하신 건 아니겠죠??”
샤루칼은 살짝 부루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사제라면 아무리 다른 교단의 신도라도 신성 마법의 각성을 빌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모시는 신은 달라도 같은 길을 걷는 동지들인데!
“아, 아닙니다.”
“그럴리가요.”
“사실 조금...”
솔직하게 인정하려는 니기소르 사제의 입을 다른 사제들이 막아버렸다.
사실 다른 신도였다면 ‘신성 마법을 각성하셨다니 축하드립니다’라고 순수하게 축하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한은 조금 달랐다.
만약 이한이 아글타콰 교단의 신성 마법을 각성해버린다면 ‘사실 내 믿음은 아글타콰에게 있었던 거구나’하고 다른 교단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릴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사제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앙을 보여줄 기회도 없이 끝나버리는 셈이었다.
게다가 다른 이유도 하나 더 있었다.
신성력을 각성했다는 것 자체가 신앙과 믿음에 자질이 있다는 뜻.
어지간한 신도들은 신성력도 각성하지 못하는 만큼 대단히 희귀한 재능이 맞았다.
즉...
지금 데려가서 잘 설득하면 다른 교단의 신성 마법을 각성할 가능성도 높다는 것!
실제로 니기소르 사제 같은 경우에는 다른 사제들이 입을 막아도 할 말을 해버렸다.
“지금 신성력을 각성했는데 신성 마법이 발현되지 않는 거 보면, 아글타콰를 향한 신앙심이 아니라 다른 신을 향한 신앙심 아니오?”
“조용히 합시다.”
티질링 사제가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렇게 떠드는 사이 가르시아 교수가 의아해하며 다가왔다.
불사조 탑 학생들이 강의 시간에 이렇게 모여서 다른 짓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이다.
“다들 뭐하세요? 막힌 부분이라도 있나요?”
“아. 교수님. 지금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이 어느 교단의 신성 마법을 각성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제 강의가 재미가 없나요?”
* * *
그 이후 학생들은 수중 호흡 마법에 성실하게 집중했다.
절대로 가르시아 교수님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언제나 학생들에게 친절한 가르시아 교수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한. 우리 탑 휴게실 갈 거지?”
“아닌데?”
“...불, 불사조 탑 휴게실 가는구나. 그, 그래. 그렇겠지.”
가이난도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텃밭 가서 일하러 갈 건데.”
“아!”
가이난도의 얼굴이 밝아졌다.
“잘 됐군. 너도 와서 도와라.”
“아.”
가이난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 사실 해야 할 일이...”
“가이난도 저 자식 해야 할 일 없어. 오늘 오후에 새 카드 덱 만든다고 했거든.”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이 친절하게 제보해줬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없다니 와서 도우면 되겠네.”
“...나 어제도 당번이었다고...!”
“??”
이한은 가이난도의 말에 의아해했다.
당번이라니?
“나 없는 동안 너희들끼리 알아서 일을 나눈 거냐? 이런 기특한...”
솔직히 감동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듣는다면 ‘워다나즈 저 자식은 왜 저런 것에 감동하지?’하겠지만,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살면서 자기 옷 한 번 개본 적 없는 놈들이었다.
이한이 하나하나 지시를 내리지 않으면 어지럽혀진 휴게실이 알아서 치워질 줄 아는 놈들.
그런 학생들이 2학기 들어서 알아서 당번을 정하고 열심히 일한다고 하니 괜히 감동이 밀려왔다.
‘에인로가드의 순기능이 여기에 있었군.’
“아. 그게 아니라...”
“?”
내가 설명해주마.
푸른 용의 탑 학생 몇 명은 비명을 지르며 기절할 뻔했다.
옆도, 뒤도 아닌 저 위에서 해골 교장이 둥둥 떠서 내려온 것이다.
해골 교장은 절대로 똑같은 방법으로 학생을 겁주지 않았다.
네가 없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모를 거다. 알다시피 너희 무쇠대가리들은 한 학기를 여기서 보냈지. 텅 빈 머릿속에도 어느 정도 지혜가 생겼을 거다. 물론 솜털보다도 가벼운 양이겠지만.
“......”
“......”
훈훈한 해골 교장의 칭찬에 학생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서 2학기 때는 너희들에게 조금 더 자유를 주기로 한 거다.
해골 교장이 자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아무도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이한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다.
“무슨 자유 말입니까? 혹시 주말마다 외출 허락이라도...”
2주 늦게 왔다고 정신이라도 나갔느냐? 누가 들으면 네가 교수인 줄 알겠구나.
“...그러면 뭡니까?”
각자 학교의 일을 책임지고 맡아서 할 자유지.
해골 교장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이한이 없는 사이 다른 1학년 학생들은 다 설명을 들은 상태였다.
각자 탑마다 돌아가면서 학교의 잡일을 맡아서 처리해야 하는 책임을 부여받은 것이다.
연금술 공방 폐기장 청소, 1층 주방 창고 정리, 실험 여파로 엉망이 된 강의실 정돈, 마구간 근처 청소 등등.
에인로가드의 드넓은 부지와 무한에 가까운 건물 내부를 생각해봤을 때 학생들이 해야 할 잡일은 끝없이 나왔다.
해골 교장은 이런 잡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학생들에게 선사한 것이다.
“와.”
가끔 마법학교에 대해 오해를 하는 학생이 있는데, 이 마법학교는 감옥 같은 곳이 아니다. 다만 자격에 걸맞은 자유를 허락해줄 뿐이지. 자격도 없는데 풀어줬다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느냐.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렇지?
학생들의 즐거움을 충분히 망쳤다고 생각했는지 해골 교장은 다시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가이난도는 우울한 얼굴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어제 자연발생한 슬라임들 치우느라 놀지도 못했어.”
“그렇군. 와서 도와라.”
“...?!”
분명히 봐줄 분위기였는데 가차 없이 데리고 가는 이한의 모습에 가이난도는 당황했다.
봐주는 거 아니었나?
“그래서 불사조 탑이 맡은 일은 뭐지?”
“아. 오늘 저녁에 새로 배정받을 겁니다.”
“그렇군. 2주 동안 아무것도 안 했으니 난 참가하고 싶은데.”
이한의 말에 사제들의 얼굴이 갑자기 굳었다. 그 모습에 이한은 멈칫했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저도 참가해도 됩니까?”
“무슨 소리를... 저번 주에 고생하셨으니 이번 주는 쉬셔야죠. 이번 주는 제가 하기로 했습니다.”
“일을 돕는데 차례가 뭐 중요하겠습니까. 하하.”
“무리하다가 병나십니다. 쉬시죠.”
사제들이 앞다퉈 일하려는 모습에 이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섰다.
그 내막을 모르는 가이난도는 매우 부러워했다.
“와. 사제들은 자기가 나서서 일하려고 하네. 진짜 부럽다.”
“조용히 하고 일하러 가자.”
* * *
우레걸음 교수의 오두막 뒤편 텃밭은 안 본 사이 꽤 어수선해져 있었다.
이한은 가이난도와 같이 주변을 정리하고 닭들에게 먹이를 줬다.
몇 달 만에 돌아온 이한을 알아본 닭들이 반가워하며 꼭꼭거리는 울음소리를 냈다.
가이난도는 침을 삼켰다.
“저거 잡을 거야?”
“달걀 얻는 용도인데.”
“힝.”
가이난도는 그래도 달걀이 어딘가 싶어서 닭들을 쓰다듬으려고 했다.
그러나 닭들은 사악한 마음을 품은 마법사를 내버려두지 않고 바로 부리로 쪼아버렸다.
“악! 이 자식들이!”
“가이난도. 그만 놀고 이리 와서 잡초 좀 치워라. 여기에 새로 씨앗을 심어야겠군.”
헉헉대며 잡일을 하던 가이난도는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잠깐. 언데드 소환하면 안 돼? 걔네도 일하면 되잖아!”
“좋은 생각이긴 한데 언데드들은 이런 일에 안 어울려. 좋지 않은 마력이 붙거든.”
“......”
가이난도는 속으로 흑마법을 욕했다.
정말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되는 마법이었다.
두 시간 가까이 땀을 흘리고 나자 얼추 마무리가 됐다. 이한은 채소와 버섯, 달걀과 통조림, 절인 고기 등을 바구니에 챙겨서 가이난도에게 줬다.
“가지고 가서 나눠먹어.”
“좋, 좋아! 내가 잘 요리해볼게!”
“아니. 요리는 네가 하지 말고. 갖다 주기만 해.”
“......”
가이난도는 뾰로통해졌다.
“나도 요리 하면 잘 할 수 있...”
“아니. 갖다 주기만 해.”
“...응.”
바구니를 받아든 가이난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채소야 그렇다쳐도 나머지 식료품들은 낯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거 교수님 오두막 안에 있던 거 아닌...?”
“빨리 돌아가. 난 뒷정리 좀 더 하고 갈 테니까.”
이한은 가이난도를 쫓아내듯 보냈다.
그러고나자 우레걸음 교수와 번개걸음 교수가 멀리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어쩐지 깔끔하다 싶었는데 네가 치웠군. 고생했다.”
번개걸음 교수는 호탕하게 웃으며 이한을 칭찬해줬다.
“안에서 고생 많았고. 용케 그런 유적을 찾았군?”
“운이 좋았습니다.”
옆에서 듣던 우레걸음 교수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운이 좋은 거냐?”
“그 정도면 운이 좋은 거지. 찾고, 무사히 나왔잖냐.”
“그게 무슨... 참. 아까 황자 놈 나오던데 걔 바구니에 있던 통조림 혹시 내 거...?”
“어쨌든 이렇게 두 분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이한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 조금 늦어서 따라오려면 많이 열심히... 아니군. 조금 열심히... 아니다. 그냥 편하게 해라. 그래도 따라오겠군.”
“......”
우레걸음 교수의 대충하는 말에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열심히 해야지 편하게 하면 어떻게 따라갑니까?”
“넌 편하게 하라고 해도 열심히 할 놈이니까.”
“참. 배그렉 교수한테는 가봤나?”
번개걸음 교수가 들고 있던 포대를 ‘쿵’하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포대 위에는 <바실리스크용 사료>라고 쓰여 있었다.
“...아직 안 가봤습니다만, 어째서 그런 질문을...?”
“어? 바실리스크 키우기로 한 거 아니었나? 못 들었냐?”
“......”
이한은 잊고 있었던 몬스터의 이름을 듣고 시무룩해졌다.
방학 때도 볼라디 교수가 바실리스크의 알을 들고 와서 ‘이 놈을 잘 키워야 널 열심히 죽이려고 할 텐데’라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정확한 말은 조금 달랐지만 담긴 뜻은 대충 비슷했다.
‘나중에 바실리스크 하나 잡으면 공작 저택에 던져버리든가 해야지.’
이한은 공작을 저주하며 말했다.
“예... 알을 부화시키려고 하시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 이번 학기에 부화시키려고 하시더군. 상태가 좋은 알이라 충분히 가능할 것 같더라. 너한테도 좋은 경험일 거다.”
“예... 뭐...”
자길 죽이려는 바실리스크를 열심히 돌보고 부화시키는 것도 좋은 경험일 수는 있었다.
오두막 안에서 번개걸음 교수가 마실 걸 갖고 오자 우레걸음 교수가 물었다.
“바실리스크를 부화시킨답니까?”
“그래.”
“배그렉 교수가요? 죽이는 건 몰라도 부화시키지는 못할 것 같은데요. 손 많이 가잖습니까.”
바실리스크는 알에서 부화시키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레걸음 교수가 볼라디 교수와 친하지는 않더라도, 볼라디 교수가 바실리스크를 죽이는 것에 익숙하지 키우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잘 알았다.
번개걸음 교수한테 조언을 듣더라도 힘들 텐데?
번개걸음 교수는 맥주를 홀짝이며 괜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여기 제자 있잖냐. 잘하겠지.”
“아하. 하긴.”
“......”
이한은 뭐가 ‘하긴’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