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나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한도 느끼고 있었다.
볼라디 교수가 바실리스크 키우기 전문가가 아닌데다가 다른 제자들이 있는 것도 아닐 테니...
...이한이 바실리스크를 돌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슴이 쓰라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잘 해봐라. 정말 귀한 경험이니까.”
“아, 예.”
“좋은 경험이고 귀한 경험이고 그딴 경험을 왜 해야 합니까?”
우레걸음 교수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그러자 번개걸음 교수가 무슨 소리를 하냐며 어이없어했다.
“생각해봐라. 바실리스크의 알을 돌보고 키우는 경험을 또 언제 어디서 해보겠냐? 그리고 그 경험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냐? 저걸 잘 하고 나면 이제 제국의 다른 뱀 몬스터들은 애송이처럼 느껴질 거다.”
‘퍽이나 그렇겠군.’
제국에 몬스터들이 수없이 많은데 굳이 뱀 몬스터들을 미리 대비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나오는 곳에 안 가면 되는 일 아닌가.
“제가 보기에는 그냥 위험한 곳은 피하거나 뱀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만...”
우레걸음 교수는 그렇게 말하며 이한에게 먹을 게 든 바구니를 내밀었다. 빵과 떡, 봉투로 포장한 큼지막한 고깃덩이, 치즈, 소금, 설탕, 꿀로 절인 과일이 들어간 병, 통조림 몇 개가 들어있었다.
“뭡니까?”
“가져가서 좀 먹어라. 안 그래도 늦게 와서 바쁠 텐데.”
이한 정도라면 2주 늦게 와도 충분히 다른 학생들의 진도를 따라잡을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2학기 때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보면 식사라도 좀 든든히 해야 했다.
이한은 솔직히 감동받았다.
이런 걸 해주는 교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이다.
“교수님...!”
“흥. 착각하지 마라. 네가 일을 잘 해서 주는 거니까.”
“감사합니다.”
이한은 고개를 숙인 다음 품속에 숨긴 통조림들을 꺼내 바구니에 다시 담았다.
그걸 본 우레걸음 교수는 이한을 노려보았다.
* * *
저녁.
이한은 오두막과 텃밭에서 갖고 온 식료품들을 사용해 간단하게 저녁을 준비했다.
학교에서 주는 식사보다는 풍성했지만 아직 밖에서 물자를 제대로 갖고 오지 못한 만큼 식탁 위에는 허전한 구석들이 분명히 있었다.
사제들이 사냥이나 채집을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아니었고.
‘으음. 좀 눈에 밟히는군.’
이한은 떡과 고기와 아스파라거스를 꿰뚫은 꼬치를 불 위에 돌려서 구운 다음 사제에게 내밀었다.
“아직 좀 아쉽긴 한데 다음 외출 때까지는 다들 참아달라고. 나가기만 하면 꽉꽉 채워서 갖고 올 테니까.”
“무슨... 지금만으로도 충분한데요!”
“맞습니다! 여기서 더 사치스럽게 먹으면 벌을 받을 겁니다.”
사제들은 감자와 야채와 향신료와 쌀을 넣어서 끓인 걸 허겁지겁 퍼먹으며 말했다.
그 기특한 모습에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해졌다.
‘푸른 용의 탑 놈들이 저걸 보고 배워야 하는데.’
방금까지만 해도 준비하면서 ‘푸른 용의 탑 놈들은 잘 먹고 있을지 걱정이군’했는데 사제들 모습을 보니 ‘뭐 알아서 잘하겠지’로 생각이 바뀌었다.
“참. 이한 님. 같이 배정받으러 가시겠습니까?”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군. 그러지.”
이한은 샤루칼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샤루칼은 다른 사제들이 눈치챌까봐 서둘러 이한을 끌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서두르지?”
“다른 사제들께서 눈치채면 귀찮... 아니, 원래 제가 가서 당번을 새로 받아야 하는데 조금 늦었습니다.”
“그렇게 늦은 것 같지는...”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어디 가셨지?
-글쎄? 잠깐 탑에 들어가신 거 아닌가?
-잠깐, 샤루칼 사제가 배정받으러 갔잖나! 같이 가신 거 같은데?
-쫓아가!
“......”
이한은 샤루칼을 빤히 쳐다보았다. 샤루칼은 시선을 못 본 척 무시했다.
“빨리 가시죠!”
“사제들은 거짓말 싫어하는 거 아닌가...?”
본관 앞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언데드가 이한과 샤루칼을 반겼다.
-빨리 도착했군.
“......”
-그런데 워다나즈 가문의 핏줄은 왜 사제들 사이에 있는 거지?
“사정이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한테 물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아. 주인님께서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을 괴롭히고 싶어하시나?
“...그래서는 아니고... 아니. 맞나?”
-하긴 푸른 용의 탑의 1학년들은 저번 학기에 너무 안락하게 지냈지. 주인님께서도 몇 번이고 욕하셨고.
“......”
이한은 못 들은 척 하기로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다른 탑 학생들도 하나둘씩 도착했다.
이한, 샤루칼과는 달리 다른 탑 학생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이한은 손을 흔들며 친구들을 불렀다.
“저녁 잘 먹었어? 가이난도가 재료는 제대로 갖다 줬고?”
친구들은 이한을 발견하더니 손을 같이 흔드는 대신 울기 시작했다.
“워, 워다나즈...! 크흑! 제발 돌아와줘!”
“...가이난도가 요리했나?”
“아니. 가이난도는 요리 못하게 했는데...”
푸른 용의 탑 학생은 울먹이며 말했다.
이한은 나름 주의를 한다고 했지만 그 생각에는 맹점이 있었다.
가이난도를 요리 못하게 한다고 해도 딱히 다른 친구들이 요리를 잘하는 건 아니라는 점!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태우고, 간을 잘못 맞추고, 안 어울리는 재료들을 섞는 등 초보자가 할 모든 실수들을 저질렀다.
아무리 요네르 같이 연금술에 뛰어난 학생이 통제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불 세기 줄여! 불 세기 줄이라고!
-왜? 불이 세면 요리 빨리 되니까 더 좋은 거 아니야?
-소금 제대로 계량해서 넣어!! 그냥 뿌리지 마!!
-어? 워다나즈는 그냥 뿌렸는데? 감각으로 하는 거 아니야?
-처음 하는데 무슨 감각이야!! 거기! 물 더 넣지 마! 채소에 수분 많아서 충분하다고 말했잖아!
“탑 이름을 배고픈 푸른 지렁이 탑으로 바꾸지 그러냐?”
“우린 저 정도는 아니다. 후후.”
옆에서 듣고 있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갑자기 거만해졌다.
물론 이한이 보기에는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굽는 것밖에 못하는 자식들이 뭐라는 거야...’
푸른 용의 탑 학생들보다는 나았지만 그건 사람새끼라면 당연히 나아야 하는 것이었고,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요리에 뛰어나지는 않았다.
모라디나 더르규한테 들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토끼 잡았어!
-오... 굽자!
-빵 구해왔어!
-오... 굽자!
-생선 사왔어!
-오... 굽자!
-향신료하고 설탕 좀 챙겨왔는데 이걸로 뭔가 만들 수 없을까? 워다나즈 놈이 했던 요리 같은 거. 그거 맛있었는데.
-좋은 게 있지. 구운 다음에 뿌리자.
굽는 것밖에 모르는 새끼들!
‘하긴 굽는 거라도 하는 게 어디냐.’
“너희는 그냥 생으로 먹어라. 괜히 요리하지 말고.”
학생들이 다 모인 걸 확인하자 언데드가 입을 열었다.
-주목. 다들 모였군. 그럼 이번 주 해야 할 일들을 설명하겠다. 먼저... 3학년 학생들이 4층 주방을 털려다가 실패해서 안에 불이 났는데, 이걸 싹 치워야 한다.
학생 중 한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어... 그런데 3학년 선배들은 왜 그걸 안 치우죠?”
-좋은 질문이다. 3학년 선배들은 4학년이 저지른 사고를 치우고 있거든.
“......”
“......”
-그리고 다음은... 본관 남쪽 시냇물의 숲에 가본 학생 있나?
“저 가봤습니다.”
흰 호랑이 탑 학생 한 명이 대답했다. 이한은 그걸 보고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렇군... 아직 거길 가라고 한 적이 없을 텐데 몰래 들어갔단 말이지? 이름 기억해두겠다.
“아, 아니...!”
‘역시.’
절대 대답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해충이 들끓는다는군. 그렇게 강한 놈들이 아니니까 가서 처리하면 될 거다. 다음은... 2층 창고실 정리군. 워낙 잡동사니가 많아서 오래 걸리는 모양이야.
“!!”
친구들이 멈칫하자 이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놀라지?”
“아. 저건 저번 주에도 나왔던 거거든요. 흰 호랑이 탑 분들이 맡으셨었죠.”
“그렇군.”
이한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보며 물었다.
“저건 어땠지?”
“으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워다나즈.”
“양이 많아서 못 끝내긴 했지만...”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에 이한은 바로 알아차렸다.
‘힘들었나보군.’
흰 호랑이 탑 놈들의 반응을 보니 작업량이 많고 힘든 게 분명했다.
안 그랬다면 저 놈들이 다시 하려고 했을 테니까.
-자. 그러면 나누겠다.
언데드는 주섬주섬 제비를 만들더니 하나씩 날렸다. 샤루칼이 이한의 손목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이한 님. 아글타콰 님에게 기도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어... 바다와 폭풍의 신 아니었나?”
아글타콰가 제비뽑기도 관장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예. 하지만 아글타콰 님의 힘은 위대하시니, 분명 믿고 기도한다면...”
이한은 제비를 펼쳤다.
2층 창고실 정리.
“......”
“...생각해보니 제비뽑기는 관장하지 않으시네요.”
* * *
“괜히 미안하군. 힘든 걸 뽑은 것 같아서.”
“아닙니다. 이런 일에 힘들고 쉬운 게 어디있겠습니까.”
“맞아요. 차라리 힘든 게 더 보람차죠.”
‘적응 안되는군.’
이한은 사제들의 말에 괴로워했다.
차라리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라면 대놓고 뻔뻔하기라도 했지 여기 사제들은 너무 착해서 좀 괴로울 때가 있었다.
끼이이익-
문을 열자 거대한 쓰레기장이 학생들을 맞이했다.
누가 쌓아놓은 건지는 몰라도 온갖 잡동사니가 꽉꽉 구겨 넣어진 창고였다.
에인로가드 내부의 지형은 심심하면 바뀌었고, 그러다보면 이런 식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몰래 창고로 쓰던 공간이 갑자기 튀어나오곤 했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계속 내버려뒀다가는 이 공간이 갑자기 터져서 사방팔방에 쓰레기를 흩뿌릴 수도 있었다.
발견한 이상 가능한 빨리 치워야 했다.
“...잠깐.”
잡동사니의 산을 둘러보던 이한은 옆의 구석을 덮은 천을 발견했다.
천을 치우자 그 안에는 새로운 쓰레기더미가 있었다.
그것 자체는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이 쓰레기더미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이한은 수상함을 느끼며 쓰레기더미 위를 확인했다.
그러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자주 쓰던 부러진 목검들이 나왔다.
“..흰 호랑이 탑 놈들이 청소하다가 귀찮아서 여기에 쓰레기를 숨겨놓은 것 같은데.”
“저런...”
“저희가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겠군요.”
사제들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이한은 사제들을 빤히 쳐다보다가 잠깐 생각한 뒤 말했다.
“나 잠깐 탑 좀 갖다 와도 되나?”
“물론이죠. 편하게 다녀오세요.”
* * *
“시냇물 숲은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위험한 놈들 없어. 내가 몇 번이고 사냥하러 가봤는데.”
“그래?”
숲에 들어가 본 적 있는 흰 호랑이 탑 학생은 자신감 있게 말했다.
“그래. 여기 위험한 몬스터는 절대 없 컥!”
퍽!
이한은 흰 호랑이 탑 학생 한 명을 뒤에서 마법을 날려 제압한 다음 다른 학생 한 명에게 지팡이를 겨눴다.
“손 들어라. 손가락 움직이는 순간 어디 한 군데 부러질 거다.”
“워... 워다나즈!! 너 이 자식! 아까 배고픈 지렁이 탑이라고 놀렸다고...”
“무슨 소리냐?”
“...아니야?”
“저번 주에 창고 청소한 놈들. 제대로 했나, 안 했나?”
이한의 질문에 흰 호랑이 탑 학생은 움찔했다.
누가 봐도 찔리는 게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우... 우린 열심히 했는데.”
“그렇군. 오른쪽으로 두 발자국 움직여라.”
“왜, 왜지?”
“거기서 기절하면 시냇물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 옷이 젖는 건 싫겠지.”
“...사실 조금... 편법을 쓰긴 했는데...”
“그렇군. 오른쪽으로 두 발자국...”
“조, 조금이라고! 진짜 조금이잖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