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강제로 휴식을 취하게 된 이한은 시아나 사제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시아나 사제. 시아나 사제는 이번 당번 아니지 않았나?”
“플레맹 님의 진정한 뜻을 알려주기 위해서 일 조금 더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겠어요?”
“...그, 그렇군.”
불사조 탑 사제들이 보여주는 잔잔한 광기는 이한도 종종 압도시키곤 했다.
다른 탑 학생들은 가기 싫어서 온갖 핑계를 대고 빠지려고 하는데 남한테 믿음을 전파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같이 오다니.
“그리고 워다나즈 님도 원래 아닌데 오신 걸로 아는데요?”
시아나 사제의 말에 이한은 멈칫했다.
“나는... 조금 다르지.”
“그래요? 비슷한 것 같은데...”
“...기도나 할까?”
이 화제로 오래 이야기해봤자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이한은 말을 돌렸다.
시아나 사제는 반색했다.
“저는 예전부터 워다나즈 님이야말로 플레맹 님의 뜻을 이어받을 인재라고 생각했었어요.”
“혹시 칭찬 때문에...?”
“예?”
“아무것도 아니야.”
시아나 사제는 차례대로 제구(祭具)를 늘어놓았다. 플레맹을 섬기는 사제들이 기도에 사용하는 도구였다.
그릇과 잔. 유리병과 램프.
신들을 모시는 자세는 교단마다 차이가 있었고, 플레맹 교단은 아글타콰 교단보다는 격식을 차리는 편이었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그 변화를 일으키시는 분이여, 오늘도 이렇게 믿음을 보내니 그 신도에게 변화의 실마리를 내려주소서.”
“사물의 본질을...”
이한은 시아나 사제의 기도문을 따라 읊었다. 그리고 아글타콰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플레맹에게 마력을 바쳤다.
파아아앗!
“!!!”
저번과 똑같이 신성력이 발휘되자 시아나 사제는 뛸듯이 기뻐했다.
‘역시 저번 아글타콰 교단은 우연의 일치였던 게 분명하군요!’
플레맹을 향한 신앙심이 우연과 착각으로 잠깐 옆길로 샌 게 분명했다.
연금술에 이렇게 진심인 사람이 아글타콰의 신도일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빠르게 신성력이 발휘됐으니 머지않아 신성 마법도 각성하리라.
열심히 연습하던 이한은 잠깐 멈추고 물었다.
“시아나 사제. 혹시 시아나 사제도 신성 마법을 쓸 줄 아나?”
어떤 마법을 배울 때 그 마법을 먼저 보고 경험하는 것만큼 좋은 가르침도 없었다.
만약 플레맹 교단의 신성 마법을 본다면 감을 잡는데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아. 그것부터 먼저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역시 쓸 줄 안다니. 플레맹 교단에서...”
이한은 1분 정도 칭찬을 했다.
지나가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워다나즈가 뭔 약을 잘못 먹었나?’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시아나 사제는 매우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마법을 준비했다.
“별 건 아니지만...”
뱀 수인족 사제는 손톱 끝으로 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그리고는 피 한 방울을 잔에 담긴 물에 넣었다.
주문과 함께 물이 부글거리더니 약으로 바뀌었다.
“대단하군!”
이건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물약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까다로운 과정을 필요로 하는지 이한은 방학 내내 공방에서 고생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뒤였다.
신성 마법이 규칙과 상식을 깨는 게 많다지만 이렇게 피 한 방울로 물약을 만들어 내다니.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에요. 물약의 성능도 한계가 있고... 뛰어난 사제분들은 더 대단한 물약들을 만들어낸다고 하시더라구요.”
이한은 매우 집중해서 들었다.
만약 시아나 사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플레맹 교단의 신성 마법은 확실히 매력적이었다.
높은 수준에 도달한다면 피로 금을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꼭 피로 만들어야 하나?”
“침을 뱉어도 되긴 하는데... 마시는 사람들의 기분을 생각해보면 피가 더 낫지 않아요?”
이한은 몰래 숨기면 안 되냐고 물으려다가 사제한테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참았다.
“그렇군. 반드시 오늘 신성 마법을 각성해보겠다.”
“...아, 아니요. 꼭 오늘 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그리고 그렇게 억지로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시아나 사제는 이한의 반응에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신성 마법은 다른 마법과 달리 의욕을 낸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다. 괜히 의욕만 앞세우다가 다칠 수도 있었다.
당연히 시아나 사제도 오늘 결과를 볼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맞습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신성 마법은 억지로 각성하려고 하면 몸을 다칠 수 있습니다.”
“...다들 여기서 뭐하세요?”
어느새 뒤에 몰려와 고개를 끄덕이며 조언하고 있는 사제들의 모습에 시아나 사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이 사제들이 진짜...!
* * *
이한은 결국 신성 마법을 각성하지 못했다(다른 사제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 이한은 못 들은 척 했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생각이 나서 이한은 시아나 사제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기.”
“혹시 플레맹 님에 대해 궁금하신 게 생기셨나요?!”
“...그게 아니라. 혹시 이 물약이 어떤 물약인지 아나 궁금해서 말이야.”
이한은 방학 때 요네르의 언니, 요아넨에게 받은 물약 레시피를 꺼냈다.
직접 만들어보면 알 것이라고 어떤 물약인지 알려주지 않았기에 아직도 이한은 이 제조법이 어떤 물약의 제조법인지 알지 못했다.
‘강화 계열은 맞는 것 같은데...’
“이 물약은... 와. 정말 대단하군요!”
시아나 사제는 보자마자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느 연금술사 길드나 공방에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다양한 재료들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배치해서 효과를 극대화시킨 솜씨가 보통 뛰어난 게 아니었다.
이 제조법을 완성한 연금술사는 필시 빈틈 하나 없는 완벽주의자이리라.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한 건지 신기할 정도네요.”
한참을 돌려보던 시아나 사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짐작은 가요. 신전에서 비슷한 걸 만드는 걸 도왔었거든요.”
“역시 시아나 사제...”
시아나 사제는 칭찬하려는 이한의 말을 멈추게 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던 것이다.
“잠깐만요. 재료로 푸른 메아닐 꽃. 동하소, 주르란이 들어가는데 이건 예지 관련 물약 만들 때 자주 쓰거든요. 아마 예지력을 강화시켜주는 물약이 아닐까 싶은데요.”
“!”
이한은 놀랐다.
“예지력 강화 물약이라니... 그게 의미가 있나?”
강화 물약의 종류는 다양했다.
마력 강화부터 시작해서 체력, 근력, 민첩, 반사신경, 회복력 등등.
그러나 그 중에서 예지력을 강화시켜주는 물약은 극히 희귀했다. 이한도 들어본 적 없을 정도로.
‘효과가 없을 텐데?’
예지력 강화 물약은 난이도의 문제가 아니라 효과의 문제였다.
당장 예지 마법 자체도 시전하기 어렵고 시전한다 하더라도 그 결과를 제대로 해석한 건지 확신하기 어려운데, 예지력을 강화하는 물약은 더욱 어불성설이었다.
제대로 강화가 됐는지 되지 않았는지 판단하기도 힘든 물약은 무엇하러 개발하겠는가.
“그렇긴 해요. 아무래도 예지 관련 물약은 잘 만들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신전에서도 아주 가끔 만들 때가 있긴 하고... 이걸 만드신 분의 실력을 봤을 때, 뭔가 확신이 있어서 만드신 거 아닐까 싶은데요?”
효과를 보기 어려워도 가끔씩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만들어서 쓰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교단에서 쓰는 신성 마법들은 체계적이지 않은 만큼, 고위 사제들이 신성 마법을 쓸 때 가능한 최대한의 자원을 퍼붓곤 했다.
그런 선례 이야기까지 들으니 이한은 살짝 솔깃하기 시작했다.
‘요아넨 님의 실력은 확실하다. 신전에서도 몇 번 시도가 있었던 레시피라면... 훨씬 더 개량된 버전일지도 모른다.’
강렬한 예지력은 뛰어난 직감과 비슷한 것.
이한은 이 물약을 마시고 해골 교장의 시험을 보는 스스로를 떠올려보았다.
-크아아악! 너무나도 분해서 내 해골이 박살나버리겠다!
‘흠. 이 정도까진 아니겠지.’
“참. 워다나즈 님?”
“응?”
“아까 하던 칭찬 마저 해주셔도 되는데요.”
“...으응.”
이한은 순간 시아나 사제를 살짝 가이난도 같다고 생각했다.
* * *
아침.
모처럼 오전에 강의가 없는 만큼 이한은 느긋하게 보내려고 했다.
텃밭 가서 작물들 좀 가꾸고, 바실리스크 알도 확인해보고, 마구간 가서 폰리그 얼굴도 좀 보고...
사실 별로 느긋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한은 느긋하다고 믿으려고 애썼다.
“워다나즈! 워다나즈!”
“빨리 가자!”
앙라고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부르기 전까지는.
“...점심 이후에 가도 되지 않... 알겠다. 가자.”
이한은 나중에 가도 되지 않냐고 말하려다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얼굴을 보고 포기했다.
거절했다가는 정말 대성통곡을 하며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를 것 같은 얼굴이었던 것이다.
쾅쾅쾅!
“아. 골렘 갖고 왔구나.”
문을 두드리자 버두스 교수는 하품을 하며 자신의 탑에서 걸어 나왔다.
교수가 작동 정지된 골렘을 훑어보는 동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초조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워다나즈. 괜찮을까? 나을 수 있을까?”
“그걸 나한테 왜 물...”
“넌 심장이 없냐!!”
“......”
“미, 미안하다. 너무 흥분했군. 골렘이 걱정되서...”
‘이 자식들이 이렇게 감성적인 놈들이었나?’
이한은 속으로 앙라고와 친구들의 평가를 바꿨다.
맨날 검만 휘두르면서 ‘우어어 나는 휘두른다 검’하는 짐승무리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 만들었네. 십 년은 넘었는데도 이 정도라니.”
“혹시 교수님 제자분들이 만드셨을까요?”
“글쎄? 난 내 제자들이 뭐 만드는지 잘 몰라서.”
버두스는 깃펜을 들더니 끼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학생들에게 건넸다.
“자.”
잘 손질된 박달나무 묶음 다섯 단, 화강암 벽돌 세 상자, 현무암(큼지막한 덩어리로), 조마영 한 자루, 세벨란 산 결합 물약 두 통...
“이게 뭡니까?”
“수리에 필요한 재료.”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당황했다.
당연히 버두스 교수가 그냥 고쳐줄 줄 알았던 것이다.
게다가 들어가는 재료가 생각보다 많았다. 밖이라면 모를까 학교 안에서 구하려면 몇 배로 힘들었다.
“교수님은 재료 없어요?”
“나? 있는데?”
“그, 그걸 쓰면 되잖아요?”
“왜? 너희 골렘이잖아.”
“......”
말문이 막힌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도와달라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지만 이한은 못 본 척 무시했다.
이건 버두스 교수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좋습니다. 구해오겠습니다! 구해오시면 꼭 고쳐주시는 겁니다!”
“그래! 빨리 갖고 와!”
활활 타오르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모습에, 이한은 살짝 걱정이 되서 물었다.
“갖고 올 수 있겠냐?”
“걱정 마라. 워다나즈. 우리는 기사다. 기사가 한 번 서약하면 어떤 고난도 그 맹세를 꺾을 순 없다.”
“그, 그래라.”
* * *
“결석한 학생들이 있는 것 같군요...”
잉걸델 교수는 검술 강의 시간에 모인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는 불참한다고 해서 불이익을 주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검술은 결국 스스로 쏟아 넣지 않으면 더 위로 올라갈 수 없으니 말입니다. 자. 그러면 각자 나눠져서...”
“...워다나즈.”
지젤이 이한에게 말을 던졌다. 이한은 자신이 방학 때 무슨 짓을 했나 빠르게 점검해보며 대답했다.
“왜 그러지?”
“혹시 안 온 놈들... 너한테... 아니다. 됐다.”
“...할 말 다 해놓고 뭘 됐나? 내가 공격 안 했다.”
“내가 뭐라고 했나. 모라디. 이한이 범인 아니라고 했잖나.”
더르규가 매우 안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친구를 굳게 믿은 사람치고는 너무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살다 보면 결석할 수도 있는...”
말하던 이한은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빠진 놈들이 앙라고와 친구들이었던 것이다.
‘...이 자식들 설마 재료 모으려고 강의도 빠졌나??’
이한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놀라운 결의였다.
“...숲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오늘은 숲에서 싸울 때를 상정해보겠습니다.”
잉걸델 교수의 말에 이한은 둘을 보며 물었다.
“궁금한 게 있다.”
“뭐지? 이한?”
“...?”
“잉걸델 교수님이 숲에 들어갔는데 결석한 학생들이 숲에서 놀고 있는 걸 보면 화를 내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