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그러나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잘 맞아 떨어졌다.
“맞는데? 어떻게 알았냐?”
“......”
혹시 몰라서 우레걸음 교수를 찾아가 질문을 던졌던 이한은 황당해했다.
볼라디 교수라면 그렇게까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1학기 때 전적이 있었으니까.
하다못해 잉걸델 교수였어도 납득은 했을 텐데, 우레걸음 교수까지 이런 짓을 하다니!
“연금술을 배우는데 왜 외부인이 필요한 겁니까?”
“그야 연금술의 세계는 넓고 끝이 없어서... 에인로가드에 기록된 비법뿐만 아니라 다른 연금술사들의 비법도 배울 필요가 있으니까?”
우레걸음 교수는 너무나도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이 되물었다.
그 대답에 이한은 할 말이 없었다.
‘하긴 맞는 말이군.’
방학 때 공방에서 일하면서 느낀 거였지만 어느 분야든 간에 마법은 끝이 없었다.
당장 연금술만 해도 A 공방에서 전문적으로 개발한 비법이나 제조법들이 있었고, B 길드에서만 사용하는 마법들이 있었다.
이런 걸 배울 수 있다면 외부에서 어느 누구든 초대하는 게 맞았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다른 사악한 분들이 하도 외부 인사들을 초대해 강제로 대결을 시키는 바람에 제가 편견을 가졌나봅니다.”
이한은 진심을 담아서 사과했다.
그러자 우레걸음은 살짝 머쓱해진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교수님??”
“어... 미리 말하자면, 내가 교장 선생님처럼 너희들을 괴롭히고 싶어서 외부 인사들을 초대한 건 아니다.”
“저는 사악한 분들이라고 했지 교장 선생님이라고는 안 했...”
“그런데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대결이 맞긴 하다.”
“......”
이한이 빤히 쳐다보자 우레걸음 교수는 급히 말을 이었다.
“내가 좋아서 한 게 아니야!”
“예 뭐... 교장 선생님도 그런 말씀 종종 하시던데...”
“연금술사들은 괴팍하단 말이다! 아무 대가도 없이 그냥 비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무리 에인로가드의 이름이 높아도 그건 아니지!”
사실 연금술사뿐만 아니라 모든 마법사들이 다 각자 나름대로 괴팍하긴 했다.
하지만 원래 자기 분야의 미친놈들이 가장 미친것처럼 보이는 게 사람 마음.
우레걸음이 이번에 초대한 제국의 연금술사들은 돈이나 명예, 혹은 해골 교장의 협박으로 설득될 만큼 만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비법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은 이들을 실력으로 직접 납득시키는 것뿐.
“결국 대결이잖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다른 교수들과는 좀 다른...”
“그래도 대결 같습니다만.”
우레걸음 교수는 속으로 이한을 욕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우레걸음 교수는 연금술 강의에서 사실을 발표했다.
-오늘 이렇게 제국 파라그라눔 길드의 연금술사들을 모셔온 것은 너희들에게 아주 귀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파라그라눔 길드!! 2년 전에 청혈병의 치료약을 만들어 낸 그 길드입니까?
-바로 맞췄다.
-정말 영광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까 다들 열심히 해서 한 방 먹여줘라.
-예?
학생들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시험 기간도 아닌데 제국에서 이름 높은 연금술사들 상대로 무언가를 보여주고 실력을 인정받아야 한다니.
2학기 시작하고 연금술 열심히 배우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 그냥 시험을 보면 안 됩니까?
-시험은 중간고사 때 볼 텐데 뭘 벌써.
-혹시 인정 못 받아도 강의 성적에는 평가 안 들어가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냐?
연금술 강의를 선택한 학생들은 우울한 표정으로 걸어 나와야 했다.
사실 꼭 연금술 강의를 듣는 학생들만 우울한 건 아니었다. 다른 강의 듣는 학생들도 비슷하게 우울했다.
2학기도 2주 넘게 지나자 슬슬 교수들이 본색을 드러내며 난이도를 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믿을 수 없다고 부정했지만, 1학기 때의 교수들은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을 배려해서 친절하게 가르쳐 준 게 맞았다.
“누구를 찾고 있소?”
“아. 니기소르 사제.”
이한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불의 정령 혼혈 사제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푸른 용의 탑 친구들 중에서 연금술 듣는 애들한테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볼 생각이었거든. 잠깐 이야기하고 나왔더니 벌써 사라졌네.”
“아... 푸른 용의 탑 분들은 아까 돌아갔소. 말하는 걸 들었는데, 서있으면 빨리 배가 꺼지니 돌아가서 누워있겠다고 했소.”
“재밌는 농담이군.”
“?”
“...농담이 아니었나? 기숙사로 가야겠군.”
이한은 불사조 탑에 들러 간식을 좀 챙긴 다음에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니기소르 사제는 이한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어,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아. 이번에는 나한테 차례가 돌아와서 같이 행동하고 있소.”
“...그, 그래라.”
이한은 니기소르 사제와 같이 짐을 챙겨서 푸른 용의 탑으로 향했다.
니기소르 사제는 걷는 동안 세상을 불태울 정도의 화염을 만들기 위해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이한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 * *
아산 달카드는 휴게실에 누워서 친구들을 멀끄러미 쳐다보며 깃펜을 놀렸다.
어느새 2학기의 세 번째 주말이 찾아오고 있다. 오늘 과제를 마무리 지으면 아껴뒀던 빵 한 조각을 먹을 생각이다.
처음에는 워다나즈 없이 학기가 시작된 것이 교장 선생님의 음모인 줄 알았다. 우리가 편안하고 안락하게 지내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고 수작을 부린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사람은 가혹한 절망에 맞서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지금 푸른 용의 탑은 날카롭게 갈고 닦여진 삶의 강렬함과 투쟁심으로 가득하다. 아! 이 진짜 삶을 제국의 다른 귀족들은 절대 모를 것...
앞에서는 감자 한 알을 놓고 체스로 죽이니 마느니 다투고 있었지만 아산은 못 본 척 했다.
어쩌면 이게 진짜 삶일지도 몰...
“달카드. 이한이 부르는데.”
“그걸 왜 지금 말하는 거냐!”
아산은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집어던지고 허둥지둥 뛰쳐나갔다.
밖에는 이미 연금술을 듣는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래도 다들 연금술 듣는 만큼 좀 안색이 낫군.”
연금술에 재능이 있다는 것은 주변에 펼쳐진 식물들 중에서 먹을 수 있는 걸 찾을 줄 안다는 것.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조금 생활력이 부족해도 그 중 연금술을 듣는 사람들은 그나마 좀 낫...
털썩!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학생 한 명이 옆으로 쓰러졌다. 요네르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현기증이 났나봐.”
“...다들 일단 좀 먹고 이야기하자.”
이한은 잘라 온 빵에 잼과 버터를 듬뿍 발라서 친구들에게 내밀었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마법이 시전되어서가 아니라 다들 먹는 것에 너무 집중해서였다.
이한은 그 모습에 살짝 압도되는 걸 느끼며 요네르에게 물었다.
“이 정도로... 심했나?”
“다들 좀 많이 배고파하긴 했어.”
다행히 요네르는 피곤해보이는 것 말고는 크게 이상해보이지 않았다.
사실 피곤한 건 공부를 포기하지 않은 에인로가드 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랬다.
“연금술 듣는 사람들도?”
“어... 음... 그... 직접 찾는 건 또 다르거든.”
요네르는 친구들의 실력을 비난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돌렸지만 이한은 바로 알아들었다.
“설마 저택에 있을 때에는 하인을 시켜서 재료를 구해왔던 건가?!”
“...켁켁.”
“쿨럭쿨럭.”
주변이 너무 조용해서 이한의 외침이 유독 크게 들렸다. 학생들은 목이 메어서 기침을 해댔다.
“하, 하인 안 부릴게... 워다나즈... 미안...”
“...아니. 내가 미안하다. 우유 마셔라.”
이한은 우유를 한 잔 따라주었다. 옆을 보니 황녀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간절한 눈빛으로 우유가 담긴 항아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
이한은 황녀에게도 따라줬다. 상대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추종자들이 먹을 거 안 주나?”
“가이난도도 아니고, 추종자들 거 뺏어먹을 사람이 아니잖아.”
“저런... 차라리 가이난도였으면 마음이 편할 텐데.”
“그치.”
이한과 요네르가 속삭이는 소리에 황녀는 뭐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참고 우유만 마셨다.
“니기소르 사제. 좀 들겠나?”
“괜찮소. 그보다는 기도를 하고 싶소만.”
“기도?”
이한은 아프하 교단의 기도를 떠올렸다.
불을 숭배하는 교단인 만큼, 사제의 기도에는 불이 필요했다.
“안 그래도 연금술 준비하려고 불을 붙이려고 했는데 잘 됐군. 같이 준비하지. 뭘 하면 되나?”
이한의 말에 니기소르 사제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방학 때 신전으로 찾아와 교단의 일을 도운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푸른 용의 탑 출신 천재는 아프하와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말하는 순서대로 하기만 하면 되오. 자. 먼저 창목탄 가루를 꺼내서...”
마법사의 지팡이 하나로 불을 붙일 수 있었지만 교단의 사제들은 그러지 않았다.
직접 준비하는 정성도 정성이지만 이렇게 준비하는 과정에서 화염의 세기와 성질을 조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숯가루와 몇 가지 금속 가루를 섞어서 바닥에 쌓아올리고, 니기소르 사제가 불을 붙였다.
그러자 평소와는 다른 색을 뿜어내는 화염이 탄생했다. 이한은 감탄하며 친구들을 불렀다.
“이 불 신기하지 않나? 느껴지는 마력의 속성이...”
말하던 이한은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이 전부 다 빵을 먹느라 이쪽에는 관심도 주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닫고 머쓱해졌다.
“나, 난 재밌게 보고 있어.”
“요네르...”
이한은 살짝 눈물이 날 뻔했다.
불을 다 피운 니기소르 사제가 물었다.
“한 번 기도를 올려보시겠소?”
“그러지.”
어려울 것도 없었기에 이한은 앞에 섰다.
마력을 바치고 집중하자 신성력으로 바뀌어서 돌아왔다.
원래라면 니기소르 사제에게 아프하 교단의 신성 마법에 대해 물어봐야 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몇 번 실패하자 신성 마법이 그리 빠르게 성공하지는 않을 거란 확신이 든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신성력이 이한의 통제를 떠나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본능과 비슷했다.
살기를 흩뿌리는 적을 만나면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손이 먼저 검으로 향하는 것처럼, 신성력이 이한의 의지보다 앞서서 흐르기 시작했다.
‘무슨...?!’
이한의 놀람이 끝나기도 전에 신성력은 마법처럼 날실과 씨실로 서로 엮여 현실을 바꾸었다.
팟!
이한 앞의 화염이 갑자기 흰색으로 바뀌더니 사납게 타올랐다. 그걸 본 니기소르 사제는 눈을 크게 뜨고 기쁨으로 외쳤다.
“역시!!! 역시 그럴 줄 알았소!”
“이게 지금 설마...”
“바로 그렇소!! 다들 보고 있으시오?”
니기소르 사제는 너무나도 흥분해서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돌렸다.
이 아름다운 기적을 다른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었다.
“...보시오! 보란 말이오!!!”
“???”
빵 먹던 친구들은 갑자기 사제가 소리를 지르자 당황했다.
왜 저러지?
“이 기적을??”
“불... 불이잖아?”
“흰색 불이잖소!”
“마법인가?”
“마법이 아니라...!”
니기소르 사제가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리며 설명하려는 동안 이한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화염을 쳐다보았다.
마법과 달리 신성 마법은 발현을 했음에도 불구하도 대체 어떻게 한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마치 돌멩이를 던져서 빗금 친 원에 딱 알맞게 집어넣는 것과 비슷했다.
자신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어떻게 한 것인지 정확한 설명이 불가능한 감각적인 마법.
‘화염의 속성이 변한 건가?’
이한은 흰색 화염에서 기묘한 마력의 파동을 느꼈다.
신성 마법으로 속성이 변환된 화염인 만큼 결코 평범하지는 않았다.
“...어. 잠깐. 니기소르 사제. 신성 마법으로 달라진 화염은 혹시 통제가 좀 쉬워지고 그러나?”
“그런 건 들어본 적 없소만?”
“고맙다...”
이한은 씁쓸해했다.
솔직히 화염을 강화시키는 힘보다는 화염을 통제하는 힘을 원했다.
강화는 지금도 사실 크게...
“이한. 그런데 이렇게 성공해도 괜찮아?”
요네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이한은 의아해했다.
“왜?”
“난 네가 일부러 실패하는 줄 알았거든.”
“일부러 실패할 수도 있나? 그보다 그럴 이유가 없잖아.”
“그... 하나만 성공하면 불사조 탑의 다른 사제분들이 서운해하실까봐 그러는 줄 알았어.”
“하하. 사제들이 그 정도로 마음이 좁...”
말하던 이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