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그러나 신이 난 시아나 사제는 듣지 못하고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사조 탑에서 사제들이 허둥지둥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진짜십니까?!?!”
“아... 아깝다! 내가 제비만 제대로 뽑았더라면 분명 우리 교단의 신성 마법을 각성하셨을 텐데!”
“크읏!”
이제는 본심을 숨기지도 않는 사제들의 모습에 이한은 황당해졌다.
신성 마법을 저렇게 대해도 되나?
“신성 마법을 그렇게...”
“제게! 이번에는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오늘 도전해보면 될지도 모릅니다!”
사제의 말에 니기소르와 시이나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신성 마법은 몸에 무리가 꽤 가는데, 오늘 벌써 두 번이나 시전했소.”
“맞아요. 다음에 하세요.”
“...지금 자기들은 성공했다고!!”
“아, 아니... 순서대로 하는...”
“워다나즈 님이 받아갈 수 있었던 진정한 영광을 뺏어간 셈 아닌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불사조 탑 사제들은 서로 목소리를 높여가며 다투기 시작했다.
물론 푸른 용의 탑이나 흰 호랑이 탑에 비교하면 훨씬 더 온화하고 예의바른 다툼이었지만, 사제들이 저 정도로 다투는 것 자체가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멀리서 둥둥 날아오던 해골 교장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대체 어떻게!!!
별 생각 없이 날아왔다가 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밌는 장면을 보게 된 해골 교장은 완전히 반해버렸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
이한은 해골 교장이 대마법사만 아니었다면 바로 공격을 날렸을 거라고 속으로 욕했다.
전통적으로 불사조 탑의 양떼들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서로 다투지 않았는데! 워다나즈. 난 네가 진심으로 자랑스럽다!
해골 교장에게 진심 어린 칭찬을 받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이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왜 오신 겁니까?”
오고닌이 널 기다리고 있다. 몇 주나 늦게 왔으니 기다릴 법도 하지.
“아.”
환상 마법사 오고닌은 원거리로 이한에게 환상 마법을 전수하고 있었다.
2학기가 시작되고 나서 몇 주 늦게 왔으니 꽤 기다리고 있으리라.
“지금 가겠습니다.”
싸우는 걸 조금만 더 구경하고 가자꾸나. 이걸 또 언제 보겠느냐.
“...그냥 말려주시면 안 됩니까?”
이한은 참다못해 말했다.
그러나 해골 교장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저렇게 싸우는 건 저기 사제들한테도 좋은 일이다.
“예?”
제국의 사제들은 교단은 달라도 비슷한 악덕을 강요받으면서 크곤 하지. 헌신, 희생, 인내...
“악덕이 아니라 미덕...”
이런 악덕을 강요받은 사제들은 그 사고방식과 가치관들이 딱딱하게 굳어서 자유롭게 사고하기 힘들어진다. 나는 언제나 사제들이 그 알을 깨고 세계 밖으로 사유하길 원해왔지.
“......”
해골 교장의 말에 이한은 솔직히 감탄했다.
확실히 제국의 사제들은 다들 어렸을 때부터 신전 안에서 지내며 교단이라는 세계만 알고 자라왔다.
아무리 신앙이 선하다 하더라도 저런 식으로 성장하면 사고방식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왜 싸워야 할까? 서로 화해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싸우지 않는다는 건 얼핏 들으면 좋게 들리지만 서로 원하는 걸 드러내지 않고 참는다는 거다. 원하는 것도 드러내지 못하는데 신앙에 대해서는 어찌 이야기할까. 계속해서 사제로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뜻을 이야기하고 상대와 부딪치는 법을 배워야 해.
“교장 선생님...”
이한은 살짝 물기 섞인 목소리로 해골 교장을 불렀다.
정말 처음으로 감동했...
이햐! 멱살 잡아라! 그렇지! 멱살을 잡으라니까! 하 참, 싸워 본 적이 없으니 계속 손만 부르르 떠는군! 멱살을 잡으라니까! 잡아!
“......”
‘괜히 감동했군.’
이한은 곧바로 후회했다.
* * *
-죄송합니다. 일이 많아서...
-아, 아닐세. 지금 충분할 정도로 빠르게 배우고 있네.
오고닌은 과연 인자했다.
일들이 많아서 환상 마법 연습을 그리 많이 하지 못했다는 이한의 말에 친절하게도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해 준 것이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박무 마법을 익힌 것만으로도 지금 충분히 대단하다니까!? 배운 걸 다듬기만 해도 되네! 괜히 무리하지 말게!!
이한은 친절한 오고닌의 말에 괜히 미안해졌다.
다른 교수들은 못 배우면 멱살 잡고 공격 날린다고 열심히 하고, 오고닌은 친절하게 가르쳐준다고 대충 한다면 그건 옳은 일이 아니었다.
선량하게 대해준 오고닌은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더 열심히 해야지.’
끝났군. 고생했다.
강의가 끝나자 벌써 새벽별이 뜨고 있었다. 어느새 한 주가 끝나고 벌써 토요일이 찾아온 것이다.
‘큰일이군. 아직 연금술 준비가 안 끝났는데.’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가르친 건 오고닌인데. 그나저나 영혼에서 냄새가 많이도 빠졌구나.
해골 교장은 본인도 언데드면서 언데드들의 기운을 마치 악취처럼 묘사했다.
이렇게 빠르게 빠지기 쉽지 않을 텐데... 사제들하고 단체 기도라도 매일매일 했나?
“비슷합니다. 신성 마법 수련을 했거든요.”
뭐? 그런 낭비를?
“...체계적이지 않고 이론이 조금 부족하긴 한데 낭비까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신성 마법은 분명 쓸모가 있었다.
마법으로 구현하려면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길을 믿음으로 극복해버리는 힘.
물론 해골 교장 같은 대마법사한테는 시큰둥한 소리였다.
그게 낭비지 뭘... 잠깐. 아까 사제들이 다투던 게 설마?
해골 교장은 경악했다.
뭔 짓을 해서 사제들을 다투게 한 걸까 궁금했는데, 저 워다나즈가 신성 마법을 각성한 거라면 말이 됐다.
단순한 기부금이나 방문과는 차원이 다른 미끼였으니까.
각성한 거냐? 그래서?
“예.”
말도 안 돼! 그렇게 멍청했나?! 아니, 그렇게 멍청했다면 이제까지 마법들을 배울 수가 없었을 텐데?
“...각성 두 번 한 거 가지고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운이 좋았나보죠.”
운으로 신성 마법을 각성할 수 있으면 사제들이 왜 그리 고행을 하겠나. 지독할 정도의 광신(狂信)이 있어야 아주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셈인데. 응? 두 번?
말하던 해골 교장은 이한의 숫자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지금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지 않느냐? 두 번이라고?
“한 번 했는데 두 번 할 수도 있죠 그게 뭐 중요하다고...”
신앙심도 없는 놈이 뭐라는 거냐?
해골 교장은 정말로 놀랐다.
신성 마법을 두 개나 각성하다니.
사제들이 왜 미쳐서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이 보기에는 저 워다나즈의 신앙심이 진짜 중의 진짜처럼 보일 것이다.
하긴 겉으로 하는 행동만 보면 저렇게 신실하고 성실한 놈도 없었으니...
다시 생각해도 믿기질 않는군... 신성 마법이라니. 그것도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
안 그래도 여러 교단에서 워다나즈 가문 출신인 이한이 신전에 꼬박꼬박 방문해서 관심 보여주는 모습에 매우 호감을 표하고 있었다.
제국의 이름 높은 대가문들 중에 워다나즈 가문처럼 신앙에 무관심한 가문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두 개나 각성하다니.
이게 알려지면 불사조 탑 사제들만 미쳐서 열광하는 게 아니라 바깥의 사제들이 미쳐서 열광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다못해 이한이 신앙심이라도 투철했다면 ‘그래 네 깊은 믿음과 멍청함이 여러 신성 마법을 불러 온 모양이구나’하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해골 교장이 보기에 이한은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언데드 계의 사기(邪氣)는 빨리 빠지겠구나. 그래서 아까 물어보려던 게 뭐냐?
“공간 계열 마법에 대해 아십니까?”
알지. 쓸 줄도 알고. 하지만 네가 아무리 뛰어나도 지금 배우는 건 무리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가르시아 교수라도 똑같이 말할 거다.
“...배우겠다는 게 아닙니다.”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간단 말인가.
아니었나? 배우고 싶어 하는 줄 알았군.
“마법에 대해 묻는다고 다 배우고 싶어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거 말고 물을 이유가 있나?
“예. 있지요. 그보다 가르시아 교수님은 왜 말하신 겁니까?”
가르시아 교수의 주 연구 분야거든. 그래서 배우고 싶은 게 아니면 왜 물어본 거냐?
“제가 학교를 돌아다니다가 웬 공간 이동 마법을 쓰는 적한테 두들겨 맞고 쫓겨났는데...”
해골 교장은 웃었다.
해골 교장은 크게 웃었다.
해골 교장은 교장실이 뒤흔들리고 창문이 깨져나가고 마침내 본관 자체에 웃음소리가 우렁우렁 차올라서 뒤흔들릴 때까지 웃었다.
세계 하나가 새로 창조될 만큼 긴 시간 동안 웃고 나서야 해골 교장은 즐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 수 있었다.
이야! 안 됐구나!
“...예. 뭐. 어쨌든 말입니다.”
이한은 해골 교장이 비웃는다고 해서 흔들리지 않았다. 애초에 상대에게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놈을 상대할 방법이 있을까요?”
있지.
“그게 뭡니까?”
배그렉 교수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해라.
“......”
이한은 정색하고 해골 교장을 노려보았다.
살벌한 눈빛에 해골 교장은 답답하다는 듯이 해명했다.
이번 건 널 놀리는 게 아니다.
“그러면 방금 건 놀리는...?”
잘 들어라. 네가 두들겨 맞았을 정도면 아마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시전하는 놈이었겠지? 에인로가드의 마력을 이용한다면 그 정도 시전 속도도 충분히 가능하다.
해골 교장은 이한의 전투력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미친흡ㅎ... 아니, 볼라디 배그렉 교수의 가르침을 버텨낸 데다가 타고난 마력을 가진 덕분에, 전투력만 놓고 보면 다른 뛰어난 마법사들보다 유리한 점이 제법 많았던 것이다.
전투란 건 누가 더 복잡하고 어려운 마법을 쓸 줄 아느냐로 승패가 갈리지 않았다. 누가 더 빠르게 상대의 심장에 단검을 꽂느냐로 갈렸다.
워다나즈는 체질도, 배운 가르침도 후자에 특화된 녀석인 만큼 보통의 공간 마법으로는 제압하기 힘들 터.
상대가 누군진 몰라도 느리고 복잡한 시전을 극복한 놈이 분명했다.
“예.”
지금 네가 갖고 있는 마법으로는 그런 전략에 대응하는 게 쉽지 않다.
원래 준비할 시간을 주면 강해지는 게 마법사였지만 이번은 예외였다.
약점을 극복한 공간 마법의 강력함은 이한처럼 온갖 학파의 마법을 배운 마법사도 대응하기 힘들 정도로 까다로웠다.
어떤 전략을 준비해가도 쉽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언제나 빈틈은 있는 법이지. 마법은 빈틈이 없어보여도 마법사에게는 언제나 빈틈이 있다.
아무리 빈틈없는 마법이라 하더라도 마법사에게는 빈틈이 있었다.
공간 마법을 쓰기 전에 보여주는 마력의 흐름. 공간 마법을 시전할 때 고르는 위치의 습관...
이런 것들을 철저하게 분석해서 준비한다면 한 번의 공격은 막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한은 온갖 마법에 적성이 있는 만큼 이런 무식한 방법도 제법 가능성이 있었다.
넌 예지 마법에도 적성이 있으니 잘 됐다. 운이 좋군.
“이해는 했습니다만... 그게 왜 배그렉 교수님에게 도와달라고 해야 할 일입니까?”
그야 저런 걸 잡아낼 정도로 공간 마법에 익숙해지려면 계속해서 널 공격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런 사람이 그리 많지 않잖느냐. 가르시아 교수는 마음이 약해서 그런 짓을 못할 거다.
볼라디 교수한테 계속 맞으면서 공간 마법의 전조를 어느 정도 느끼고 패턴을 읽는 법을 배운 다음 다시 지하로 내려가서 조각상의 빈틈을 파악한다(아마 이 과정에서도 또 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한은 이 지혜로운 충고에 감탄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냥 지하실로는 안 가야겠군.’
쑥스러우면 내가 대신 말해주랴?
“하하.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