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화
이한은 딱 잘라서 거절했다.
“교장 선생님께서 자꾸 그렇게 편의를 봐주시는 것도 특혜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술 마셨냐?
황당하다는 듯한 해골 교장의 힐난은 무시하고 이한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 혹시 파라그라눔 길드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특혜 거절한다면서...’
방금 말해놓고 뻔뻔하게 물어오는 이한의 모습에 해골 교장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잘 알긴 하지. 그런데 그걸 내가 왜 말해줘야 하지?
“저 덕분에 불사조 탑 사제들이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포상으로 대답해주시죠.”
...이런 쓰레기 같은 놈! 내가 졌다.
해골 교장은 솔직히 감탄했다.
저런 뻔뻔함이라니.
뭐가 궁금한 거냐?
“교수님이 초대하신 분들인데, 그 분들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까다로운 놈들이긴 하지.
해골 교장은 인정했다.
파라그라눔 길드의 연금술사들은 워낙 완고한 이들이라 시험 기준도 상당히 까다로울 게 분명했다.
어지간한 완성도로는 통과하기 힘들리라.
하지만 방금도 말했듯이 마법에는 빈틈이 없어도 마법사에게는 빈틈이 있다.
“?”
이해를 못하는군. 그 연금술사 놈들을 다른 방법으로 감동시키란 소리다.
“...어, 호수에 빠뜨린 다음 구해드리는 것처럼 말입니까?”
해골 교장은 순간 자신의 교육 방침을 살짝 반성할 뻔했다.
‘아니. 저건 다른 교수들 때문일 것이다.’
빠르게 합리화를 끝낸 해골 교장은 대답했다.
그런 미친 방법 말고... 부드럽고 온건한 방법들 말이다. 네가 다른 학생들을 감동시킨 것처럼.
“...어, 혹시...”
흰 호랑이 탑 말고 불사조 탑!
“아하.”
이한이 ‘목검으로 팬 다음 목숨을 구해줘서 감동시키란 겁니까?’라고 묻기 전에 해골 교장은 재빨리 말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해도 됩니까? 정정당당하게 연금술로 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1학년이 어떻게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파라그라눔의 연금술사를 이긴단 말이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전만 빼내면 승리지.
“......”
* * *
‘괜히 데려왔나?’
우레걸음 교수는 연금술사들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제국의 연금술사 길드들이 꼭 파라그라눔만 있는 건 아니었다.
수도의 건물을 점령하고 불을 지르려고 한 전적이 없는 길드들이 더 낫지 않았을까?
“크흠. 다들 뛰어난 학생들이오.”
“예. 확실히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은 대단합니다.”
파라그라눔의 연금술사들은 소스를 얹은 세비체 요리에 포크를 가져갔다가 인상을 찌푸리고 그릇을 옆으로 치웠다.
그러나 우레걸음 교수는 학생들이 만든 물약의 평가에 정신이 팔려서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역, 역시 그렇소?”
“예. 잔여물도 보이지 않고, 색도 깔끔하게 나눠집니다. 잘 만들어진 물약이군요.”
“그러면 합격할 학생들이 있을 것 같소?”
“그건 아닙니다.”
“......”
‘진짜 괜히 데려왔나?’
우레걸음 교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학생들 앞에서는 ‘너희들이 잘해야 저 길드에서 온 연금술사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거다!’라고 엄하게 말했지만, 교수 입장에서 당연히 학생들 쪽으로 팔이 굽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느 정도 학생들이 성과를 내야 교수로서 체면도 살고 뿌듯하지 학생들이 전멸해버리면 약이 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파라그라눔의 연금술사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엄격했다.
“이 정도로 잘 만들었으면 인정해줄 법도 하지 않...”
“안 됩니다. 교수님. 저희 길드의 규칙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오직 새로운 물약을 만들어 낸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미친놈들아 그건 너희 길드 가입 조건이고...!’
1학년 학생들을 시험하는데 진짜 길드 가입 조건으로 테스트를 한다는 걸 듣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러면 이 물약은? 꽤 개선이 잘 되지 않았소?”
“훌륭한 물약입니다만, 은화초를 물방울꽃으로 바꾼 건 너무... 평범하군요. 번뜩임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
똑똑똑-
“교수님?”
“들어와라.”
연금술 강의를 듣는 학생 한 명이 문을 두드리자 우레걸음 교수는 급히 물약을 치우고 대답했다.
“말씀하신대로 물약을 준비해왔... 앗, 식사 중이셨습니까?”
“아니다. 갖고 왔으니 한 번 줘봐라.”
우레걸음 교수는 학생이 내민 물약을 받았다.
보아하니 밤안개 물약을 기반으로 두 가지 성분을 바꾼 것 같았는데, 아쉽게도 조금 뻔했다.
특정한 재료를 비슷한 성분의 재료로 바꾸는 건 어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꽤 잘 만들었...
“별로입니다.”
“이건 통과하기 힘듭니다.”
“무리입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해오겠습니다!!”
“잠, 잠깐만! 잠깐만!”
학생이 소리치고 돌아서서 뛰쳐나가자 우레걸음 교수는 어떻게든 붙잡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학생은 멀어진 뒤였다.
“...앞으로는 나한테 먼저 말해주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장 분한 건 파라그라눔의 연금술사들이 방금 있었던 일에서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연금술사들은 학생이 뛰쳐나가거나 말거나 자기들끼리 연금술 이야기만 나눴다.
“그러니까 거기서 새 재료를 쓰는 것이...”
“제 생각에는 아예 처음부터 다시 짜는 게 낫다고 봅니다.”
“비효율적인 방법일 텐데 굳이 왜...”
“크흠. 크흠.”
“앗. 혹시 조언을 주시려는 겁니까?”
“...그거 말고, 방금 온 학생한테 할 조언 같은 건 없소?”
연금술사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입을 모아 동시에 말했다.
“다시 만들어 오십시오?”
“...됐소.”
그 이후로도 물약을 만들어 온 학생들이 하나둘씩 찾아왔다가 떨어져나갔다.
어느 순간 방문이 끊기자 우레걸음 교수는 소문이 퍼졌다는 걸 깨달았다.
‘끄응...’
학생들이 겁먹어서 오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학생들도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우레걸음 교수 본인도 자존심이...
똑똑똑-
“계십니까?”
“!!!”
이한의 목소리에 우레걸음 교수는 눈을 크게 떴다.
가장 믿음직한 카드가 도착한 것이다.
“워다나즈냐!”
“...예? 맞긴 한데 왜...”
“들어와! 들어와라!”
우레걸음 교수는 손수 문을 열어주었다.
갑작스러운 환영에 이한은 매우 경계심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오듯이 교수가 친절하게 굴면 안 좋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여기, 연금술 강의 수석 학생이오!”
“오.”
“과연.”
“놀랍습니다.”
“......”
파라그라눔 길드의 연금술사들은 관심 있는 척 하는 일에 매우 서툴렀다.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시험 내용 듣는 가이난도도 저것보단 관심을 보이겠군.’
“...됐다. 갖고 온 물약이나 꺼내봐라.”
“예? 안 갖고 왔는데요.”
“뭐?”
우레걸음 교수는 당황했다.
“왜 안 갖고 왔냐?”
“물약 제출하러 온 게 아니라 교수님 일 도와드리려고 온 겁니다만.”
정확히 말하자면 파라그라눔의 연금술사들을 파악하려고 온 것에 가까웠지만 이한은 교수를 배려해서 그렇게 말했다.
우레걸음 교수는 울컥 감동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한 같은 제자가 또 없었다.
어느 제자가 이렇게 능동적으로 교수를 생각해서 찾아오겠는가.
“녀석...!”
“식사중이셨습니까?”
“식사... 뭘 먹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 저기 연금술사들이 사람의 진을 빼놓는군.”
“그럼 왜 초대하신 겁니까?”
“짜증나게 맞는 말 하지 마라.”
우레걸음 교수와 함께 공방의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온 이한은 연금술사들이 앉아 있는 탁자를 둘러보았다.
보아하니 식사는 거의 건드리지 않고 연금술 이야기만 주구장창 한 모양이었다. 의외로 교수들 사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었기에 이한은 놀라지 않았다.
“제가 뭐라도 차릴까요?”
“됐다. 그러지 마라.”
“괜찮습니다.”
“아니. 진짜 그러지 마라. 저 놈들한테 뭐 더 먹여주기 싫어서 그런다. 배고프면 주방에서 뭐라도 더 가져다달라고 하겠지.”
“......”
속 좁은 우레걸음 교수의 말에 이한은 감탄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초대해놓고 저렇게 행동한다니.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건 뭐냐?”
우레걸음 교수는 이한이 들고 있는 짐을 보며 물었다.
“아. 검은 거북이 탑 친구들하고 고기 없는 미트로프를 만들어봤습니다. 가는 길에 푸른 용의 탑 친구들 주려고...”
고기와 각종 재료들을 섞어서 양을 불린 다음 덩어리로 잘 구워낸 요리가 미트로프라면, 에인로가드식 미트로프는 고기도 빼고 나머지 재료로 구워내는 요리였다.
밖에서라면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이게 요리야?’라고 하겠지만 안에서라면 ‘이게 요리구나’하고 허겁지겁 퍼먹을 것이다.
“정 내놓고 싶으면 그걸 내놓으면 되겠군.”
“예? 싫은데요?”
“돌아갈 때 원하는 만큼 재료 갖고 가게 해주마.”
“마음껏 쓰시죠.”
이한은 망설이지 않고 내밀었다.
우레걸음 교수는 자신이 말하고서도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같이 만든 정성이나 담긴 마음 같은 건 괜찮냐?”
“교수님께서는 그런 걸 일일이 생각하시면서 물약 만드십니까?”
“누구 제잔지 몰라도 참 잘 배웠구나.”
우레걸음 교수는 투덜거리면서 고기 없는 미트로프를 꺼내 자른 다음 내밀었다.
“다들 너무 적게 먹은 것 같은데, 이거라도 드시면서 이야기하시오.”
“감사합니다.”
‘욕하는 거 아니야?’
이한은 속으로 살짝 걱정했다.
밖에서 맛있는 거 먹다가 온 사람들이 이걸 먹으면 ‘에인로가드가 우리를 무시하는 겁니까?’라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었다.
“!”
이한의 걱정대로 연금술사들은 놀라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한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게 왜 이런 걸 내놓으신 겁니까?”
“아주 재밌습니다.”
“...?”
“????”
이한과 우레걸음 교수는 예상 밖의 반응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연금술사들은 흥미로워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별로 쓰지 않는 재료들을 굳이 넣어서 만들다니. 새로운 시도군요.”
“아까 요리보다 훨씬 흥미롭습니다.”
“...??”
이한은 옆에 남은 세비체 요리를 살짝 먹어보았다.
우레걸음 교수는 뛰어난 연금술사였고, 그 말은 즉 뛰어난 양조장이이자 요리사라는 뜻이었다.
재료를 아끼지 않고 완벽한 과정으로 만든 세비체는 신선하고 상큼했다. 가짜 미트로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
‘혀가 고장났나?’
“이런 재료들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어... 예. 뭐, 연금술사라면 요리를 만들 때에도 언제나 신선한 시도를 해야 한다고... 교수님께서 가르쳐주셨습니다.”
파라그라눔의 연금술사들은 낮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우레걸음 교수와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우레걸음 교수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게 진짜 맛있으십니까?”
“요리는 맛으로 먹는 게 아니라 영양을 섭취하려고 먹는 겁니다.”
“맛을 즐기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새로운 시도를 즐기는 거고 말입니다.”
‘내가 저딴 놈들을 위해 요리를 했다니.’
우레걸음 교수는 한탄했다.
그냥 부츠에다가 맥주 부어서 새 요리라고 갖다 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학생의 가문과 이름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입니다.”
“이한!”
연금술사들은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이한은 상대가 워다나즈 가문의 이름을 듣고 놀라는 줄 알았다.
‘워다나즈 가문하고 관계가 있나?’
“요아넨 메이킨 님한테 칭찬 많이 들었습니다. 혹시 두 달 전에 공방에서 일하신 적 있지 않습니까?”
“...있긴 합니다만...”
“이렇게 만나다니 놀랍습니다. 요아넨 메이킨 님이 말씀하시는 걸 듣고 한 번 뵙고 싶었는데.”
“...대체 뭐라고 말씀하셨길래?”
‘솔직히 나도 궁금하다.’
우레걸음 교수는 옆에서 들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이 녀석은 대체 방학 때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고 왔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