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화
“생각해보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럼 뭐가 중요한...”
들으려던 우레걸음 교수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정확히 뭘 했는지 제자의 입으로 듣고 싶었던 것이다.
“요아넨 메이킨 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저희는 이런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이 분의 도움을 받아 <파라그라눔의 장막> 제조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그런데 1학년 학생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습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우레걸음 교수는 투덜거렸다.
어떤 놈이 저것만 듣고 1학년 학생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도와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아부하려고 온 이한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교수님. 혹시 잠시 공방을 빌려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시오.”
연금술사들은 매우 감사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한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공방의 작업실로 향했다.
“...?!”
우레걸음 교수는 뒤늦게 깨달았다.
‘저거 비전 배우는 거잖아!?’
이렇게 물 흐르듯이 그냥?!
* * *
“그런데 제가 연금술에 그리 경험이 많진 않습니다만.”
“그렇습니까? 요아넨 메이킨 님의 공방에서 일했다고 하셔서 경험이 많은 줄 알았습니다.”
“반 년 정도...”
이한의 대답에 파라그라눔 연금술사들은 믿기 힘든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경악한 얼굴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제까지 별다른 감정 변화 없던 연금술사들이 이러자 이한은 살짝 부담감을 느껴서 말했다.
“...그것보다 조금 더 길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습니까? 어느 정도?”
“1개월 정도 더?”
“......”
연금술사들은 갑자기 자기들끼리 수군대기 시작했다. 이한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서 갑자기 후회가 됐다.
“이한 님. 혹시 파라그라눔 길드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다행히 연금술사들은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고 순수하게 제안을 해왔다. 이한은 안심하며 대답했다.
“전 늘 파라그라눔 길드를 존경해왔습니다. 제국의 연금술사 길드 중에서 언제나 새로운 발견에 전념하는 길드 아닙니까. 2년 전에 청혈병의 치료약을 만들어 낸 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과분한 평가십니다.”
연금술사들은 이런 칭찬 몇 마디에 흔들리는 이들은 아니었지만, 이한이 파라그라눔 길드에 대해 호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꽤나 높게 받아들였다.
길드에 대해 호의를 갖고 있다면 졸업하고 나서 들어오려고 할 가능성도 높았으니까.
“그렇지만 저희 길드가 다른 연금술사 길드들이 가지지 못하는 몇 가지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건 부정하기 힘듭니다.”
“그렇습니까?”
이한은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역시 밖에서 듣는 소문보다 더 정확한 건 내부에서 근무하는 이들의 평가 아닌가.
이 연금술사들이 생각하는 장점은 무엇일까?
파라그라눔의 연금술사들은 희미한 자부심을 담아서 말했다.
“일단 한 번 연구를 시작하면 휴식 같은 핑계로 멈추지 않습니다.”
“...?”
이한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연금술사들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다른 길드에서 하지 않는 위험한 연구도 저희 길드에서는 진행됩니다.”
“오... 혹시 다른 길드보다 연금술사들이 가져가는 보수도 적습니까?”
“잘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쓸데없이 금화를 가져가는 대신 연구에 쓸 수 있습니다.”
“참 정말 좋은 길드입니다.”
“그렇습니다.”
대화가 끝나고 이한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파라그라눔 길드는 건물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겠군.’
생각보다 더 미친 길드였다.
“그래서 <파라그라눔의 장막>은 어떤 물약입니까? 저는 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만...”
시중에 공개된 물약이라면 그래도 이한이 이름을 들어봤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상하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공개된 적이 없으니 당연히 들으신 적이 없을 겁니다.”
“그렇... 잠깐. 그럼 비전 아닙니까?”
이한은 당황했다.
밖에 공개되지 않은 물약이면 길드의 비전인데 그걸 이렇게 알려줘도 되나?
“예. 맞습니다.”
“제가 알아도 됩니까?”
“연구에 필요한 일이잖습니까?”
연금술사들은 ‘당연한 질문을 왜 하는 거지?’하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했다.
‘음. 우레걸음 교수님을 데리고 올 거 그랬군.’
“...이해했습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파라그라눔의 장막>은 일종의 은신 물약입니다.”
“은신... 물약이요?”
이한은 놀라워했다.
은신 계열 물약은 그 효과가 꽤 제한되어 있는 편에 들어갔다.
‘변환 마법이나 부여 마법 쪽 원리 말고 더 있나? 개선이야 가능하겠지만...’
방식과 원리를 바꾸고 지속 시간이나 효과를 늘릴 수야 있겠지만 파라그라눔 길드가 연구하는 것치고는 꽤나 소소한 물약이었다.
“예. 하지만 생각하시는 것과는 좀 다를 겁니다. 저희가 숨기려는 건 형태나 형상이 아니라 특정한 기운입니다.”
“!”
존재가 뿜어내는 기운.
그건 마력으로 인한 압박감일 수도 있었고, 정령이 뿜어내는 속성의 기운일 수도 있었으며, 기사가 뿜어내는 살기일 수도 있었다.
이런 특정한 기운만을 잘라내는 건 생각치도 못한 발상이었다.
“그게 가능합니까?”
“이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입니다. 남은 건 실험뿐이지요. 저희가 이한 님에게 도움을 받고 싶은 부분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마력. 재료에 마법적 처리를 할 때 비정상적인 수준의 마력을 투입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비정상적인 수준까지는 아니지 않나...”
이한은 중얼거렸지만 연금술사들은 무시했다.
“원래라면 연금술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방법은 아닙니다.”
연금술은 오차 하나 없는 철저한 계산의 학문.
계산만 정확하면 이한처럼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마력을 과투입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물약이 완성되기도 전에 연금술사가 먼저 쓰러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파라그라눔의 장막>에서는 경우가 좀 다릅니다. 저희는 마력 과투입이 이 물약의 효과를 완성시켜주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과연... 잠깐. 두 가지라면 다른 한 가지는 뭡니까?”
“이한 님이 마력으로 인한 위압감을 뿜어내 정령들을 겁먹게 한다고 들었는데, 물약이 완성되면 그 위압감을 지워보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여러 기운들 중 정령처럼 예민한 존재가 감지하는 기운이 가장 숨기기 어려운 법.
정령에게 겁을 주는 사람 상대로 물약이 성공적으로 작동한다면, 사실상 이 물약은 성공한 셈이었다.
“...상관없긴 한데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요아넨 메이킨 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요아넨 님!’
이한은 속으로 요네르의 언니를 부르짖었다.
굳이 왜 저런 사실까지...
* * *
“다시.” “다시.” “다시.” “그런데 마력이 정말 많으십니다.” “다시.” “다시.” “다시.” “다시.” “다시.”
구경하러 온 우레걸음 교수는 이한의 인내심에 감탄했다.
옛날 우레걸음 교수가 배우던 시절에는 저런 식으로 가르칠 경우 열 명 중 다섯 명은 포기하고 세 명은 도망가고 한 명은 스승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으며 한 명은 끝까지 버티곤 했다.
그리고 이한은 마지막 경우에 속했다.
파라그라눔 길드의 연금술사들이 미친놈처럼 ‘다시’를 반복해서 외쳤지만 이한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재료를 계량하고 지팡이를 휘두르고 불의 세기를 조절했다.
“다들 잘 되어가고 있소?”
“예. 이한 님의 뛰어난 재능 덕분입니다. 잠깐. 다시 해주십시오.”
우레걸음 교수는 힐끗 이한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주먹을 꽉 쥔 상태가 아니었다.
잉걸델 교수한테서 이한의 검술 실력을 들어서 알고 있는 만큼 우레걸음 교수로서는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주말인데 조금 쉬었다 하는 게 낫지 않소?”
학생들에게는 열심히 해서 배우라고 했지만 우레걸음 교수에게도 양심이 있었다.
12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솥 앞에 서서 ‘다시’를 들으면서 반복하는 제자를 불쌍하게 여기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교수님. 이한 님이 파라그라눔 길드에 대해 높게 평가하시는 점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 수도에 불을 지른 거?”
“아닙니다. 한 번 연구가 시작하면 휴식 같은 핑계로 멈추지 않는 것을 높게 평가하시더군요.”
“......”
우레걸음 교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국자를 휘젓고 있던 이한이 처음으로 주먹을 불끈 쥔 걸 볼 수 있었다.
...저러다 맞는 건 아니겠지?
“그... 그렇군. 난 분명히 말렸소. 알겠지? 난 분명히 말렸다.”
“??”
우레걸음 교수가 누구한테 말하는지 모르는 연금술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로 그 때였다.
“아아아!!”
연금술사 한 명이 비명을 지르자 우레걸음 교수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참다못한 이한이 연금술사를 솥 안으로 밀어버린 게 아닌가 걱정됐던 것이다. 옛날에는 종종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사고는 아니었다. 솥 안에서는 은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완성이오?”
“예! 드디어!”
우레걸음 교수는 뛰어난 연금술사로서의 직감으로 지금 눈앞의 물약이 완성되었다는 걸 느꼈다.
무슨 물약인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이건 축하할 일이었다.
“축하하오. 그렇게 고생하더니.”
“아닙니다. 저희만의 힘으로는 완성시키기 힘들었을 겁니다.”
“이 정도로 마력을 과투입하는 게 정답이었다니. 다들 들으면 놀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한 님?”
연금술사들이 놀라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완성 직전에서 계속 물약이 실패했는데, 정답이 재료에 거는 마법의 마력을 미친듯이 올리는 거였다니.
그냥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라 정말 ‘이 정도로 마력을 쏟아 부어야 하나?’싶을 정도로 불어넣는 게 숨겨져 있던 정답이었다.
“마력을 너무 소모하셔서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그럴 것 같지는 않...?”
우레걸음 교수가 부정했지만 이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친 얼굴로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피곤하긴 하군.’
쉬지 않고 어마어마하게 긴 과정의 물약 제조를 연속으로 반복했으니 지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연금술사들이 최선을 다해 도와준다 하더라도 부담은 쌓이기 마련.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좋은 기회긴 했다. 이한은 왜 우레걸음 교수가 외부의 연금술사들을 초대한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재료를 다루는 방식부터 시작해서 사용하는 마법들까지. 에인로가드의 방식과는 달랐다.’
다른 연금술사들의 작업을 보는 것만으로도 생각의 경계가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이한이 이미 알고 있는 몇 가지 물약의 레시피도 파라그라눔 길드의 비법을 몇 개 섞어서 다시 만들어본다면 지금보다 좀 더 괜찮은 결과가 나오리라.
이래서 길드들이 자신의 노하우를 꼭꼭 비전으로 숨겨놓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 이런 걸 배웠으니 확실히 감사해야 할...’
“이한 님. 괜찮으십니까?”
“예.”
“마력도요?”
“예.”
“내가 뭐라고 했소.”
우레걸음 교수는 그것 보라는 듯이 대꾸했다.
“그러면 정령을 불러와 물약 테스트를 진행하겠습니다.”
“......”
이한이 어이없어서 말문이 막힌 사이 연금술사들은 자기들끼리 결정을 내리고 밖으로 향했다.
넓은 공간에서 정령을 불러와 이한과 대면시키기 위해서였다.
단 둘이 남은 우레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변명했다.
“...다음에는 절대 파라그라눔 길드 연금술사들을 부르지 않으마.”
“아닙니다. 가능한 꼭 불러주십시오.”
“정말이냐?”
“예. 후배들이 배울 기회를 뺏으면 되겠습니까.”
“......”
우레걸음 교수의 귓가에는 왠지 모르게 ‘배울’이 ‘당할’으로 들렸다.